사람이 곧 혁신이다 33


이병철 회장은 생전에 “삼성SDI를 세계 최대의 브라운관 기업으로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후 이 회장의 목표를 바탕으로 드디어 ‘컬러 브라운관 연산 1000만 본’을 생산해 내며 세계 최대 메이커로 성장했다. 하지만 생산량으로 세계 최대를 자부하는 건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도입 이후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치게 됐다. 바로 품질의 문제였다. 전사적으로 매달린 ‘월드 베스트’ 전략과 세계 최대 생산량은 맞지 않았다.

이건희 회장은 “양은 우리가 제일인데, 기술은 소니가 최고다. 언제 따라가겠나”라는 질문을 던졌다. 새로운 목표를 제시한 것이다. 필자가 1996년 당시 삼성전관 사장으로 갈 때 다른 요구는 아무것도 받은 게 없었다. 오직 하나, “소니를 따라 잡으라”는 것 하나뿐이었다.

소니는 당시 이미 ‘트리니트론’이라는 기술 특허로 만든 원통형 브라운관으로 세계를 제패하고 있었다. 소니를 제외한 전 세계 어떤 제조사도 구형 브라운관을 벗어나지 못했다. 구형 브라운관과 트리니트론은 들어가는 부품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그 어느 기업도 ‘소니에 도전하겠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삼성SDI의 ‘타도 소니’와 소형 디스플레이의 ‘부활’
누구도 넘볼 수 없었던 소니의 아성

소니를 뛰어넘기 위해선 그들의 기술과는 다른 우리만의 새로운 기술이 필요했다. 어차피 소니의 방식이 아닌 독창적인 혁신 기술을 개발해야 했다는 뜻이다. 그 결과 개발된 것이 ‘섀도마스크’ 방식을 적용한 17인치 ‘다이나플랫’ 브라운관이다. 1998년 4월에는 29인치를 개발하는 데도 성공했다. 그 당시 완전 평면 브라운관 생산능력을 갖춘 곳은 소니·삼성·마쓰시타밖에 없었다.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선 기술자들의 생각부터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당시는 황창규 전 삼성 기술총괄사장이 삼성 반도체연구소장을 맡고 있을 때다. 필자는 황 소장을 찾아가 “반도체는 이미 세계 1등이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느냐”고 자문했다. 그리고 우리 공장 직원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해 달라고 부탁했다. 황 사장은 흔쾌히 동의했고 얼마 후 부산 공장을 찾아왔다.

황 사장이 밝힌 세계 1등의 비결은 ‘수요 공정회의’였다. 매주 수요일 오후 모든 기술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술 이슈에 대해 벌이는 토론이다. 그 자리에선 직급과 경력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든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고 토론한다고 했다. 수요 공정회의는 반도체 사업부 설립 초기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었다. 필자가 2004년 삼성 인력개발원장으로 있을 때 황 사장이 직원들과 함께 워크숍을 온 적이 있는데 바로 ‘수요 공정회의 700회’를 기념하는 행사였다.

황 사장은 “모든 기술을 공유하면 저절로 업그레이드가 이뤄진다”고 말했다. 문제가 생긴 사람이 잘 아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고 훌륭한 인재를 발탁하기도 하고 아이디어도 창출되는 곳이 바로 수요 공정회의였다.

이를 벤치마킹해 삼성SDI도 ‘금요 공정회의’를 만들었다. 저녁을 먹고 회사 밖에서 토론을 벌였다. 밤 12시 혹은 1시를 넘기면서까지 끝장 토론이 이어졌다. 이를 매주 반복하다 보니 황 사장의 말처럼 새로운 역량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소니와의 경쟁, 대만대첩의 완성 등 삼성SDI의 경쟁력은 다분히 금요 공정회의에서 나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후 크게 히트한 원적외선 브라운관, 기(氣) 브라운관, 프레시바이오 브라운관 등의 창의적 아이디어들이 금요 공정회의를 통해 나왔다. 기 브라운관은 러시아에서 대히트를 기록했는데 러시아는 추운 기후 덕에 일찍부터 원적외선의 효과를 알고 있었다. 러시아 사람들이 삼성 TV 앞에 쭉 둘러앉아 방송을 보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처음 삼성전관 대표이사 발령을 받고 당시 김광호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인사하러 갔다. 그 자리에서 김 부회장은 “전관에 소형 액정표시장치(LCD) 사업에서 해마다 수백억 원씩 적자가 난다. 10년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정리하는 게 좋겠다. 반도체도 잘되고 있으니 생각해 보라”고 조언했다.



500억 적자를 1년 만에 흑자로

하지만 필자는 ‘적자의 원인이 무엇인지, 제대로 노력했는데도 적자인지, 뭔가 잘못된 것은 없는지’ 알아봐야겠다는 결론을 나름대로 내리고 있던 차였다. 소형 LCD 사업을 책임지고 있던 이는 엔지니어 출신의 상무였다. 사업 책임자라고는 하지만 순수한 엔지니어이지 경영자는 아니었다.

일단 간부들을 한자리에 모아 왜 적자인지 물었다. 10년쯤 위기를 겪은 사업은 대부분 위기의 원인이 한두 가지로 모아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사람마다 말하는 이유와 생각이 제각각인 것이 아닌가. 위기와 문제의식조차 통일돼 있지 않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결국 토론을 통해 하나의 문제로 집중하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우선 영업부서부터 시작했다. STN(수동형) LCD는 ‘PC용 모니터가 뜨니 모니터용 대형 디스플레이를 만들어야 돈을 번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대형 노트북용 설비 투자를 진행하게 된 배경이었다. 하지만 소형도 제대로 된 품질을 갖추지 못했는데 대형이 될 리 만무했다. 책임자는 무조건 ‘팔라’고만 하니 영업부서에선 공장에서 소화할 수 없는 스펙의 제품들까지 무조건 수주해 왔다. 그런 다음 개발 부서로 넘기면 여기서도 양산 개념 따위는 생각지도 않은 채 그냥 생산 공장으로 내려 보냈다. 자연히 공장은 난장판이 됐다. 이것이야말로 ‘모럴 해저드’다. 내 부서만 욕먹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에 책임 떠넘기기에만 급급한 모양새였다.

문제점을 파악한 후 당장 개발 부서 사람들을 불렀다. 그리고는 “너희들이 제일 중요하다. 우리 기술 역량을 알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때부터 개발부와 영업부가 따로 놀지 않고 같이 다니면서 서로 설득하고 사람도 만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렇게 하자 자연히 거래처가 정리되기 시작했다. 사실 훌륭한 거래처들은 흑자를 내는 곳도 많았다. 하지만 우리와 맞지 않는 수많은 거래처 때문에 좋은 거래처까지 만족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고객을 ABC로 나누어 관리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우량 거래처를 최우선시해 그들에게 최고의 만족을 준 후 그들로 하여금 물량을 늘리게 하자는 뜻이다. 반면 손해나고 맞지 않는 거래처의 80%를 잘라내고 20%만 남겼다.

조직이 안정을 되찾고 여유가 생기자 “또 다른 높은 수준의 고객을 찾아 개발하자”는 선순환 구조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기술 인력을 영업에 전진 배치하고 A급 고객에게 모든 역량을 총집중했다. B급은 A급으로 만들고 C급은 과감히 퇴출시켰다. 그러자 문제를 보는 눈이 점점 간단해졌다. 이전까지는 서로 엉켜 ‘네 잘못, 내 잘못’을 따지기 바빴던 이들도 변하기 시작했다.

생산 현장 인력들과 함께 신불산을 오르는 등 극기 훈련까지 진행하며 공감대를 쌓는 등 의지를 다졌다. 결과는 9개월 만에 형광표시관(VFD)의 흑자 전환으로 나타났다. 석 달 후에는 LCD도 흑자로 돌아섰다. 소형 디스플레이 혁신 1년이 지나자 모든 사업부가 흑자로 돌아섰다. 10년 동안 매년 500억 원의 적자를 내며 모두가 ‘정리하라’고 조언했던 사업이 ‘미운 오리 새끼’에서 ‘백조’로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삼성SDI의 ‘타도 소니’와 소형 디스플레이의 ‘부활’
VFD를 보니 일본의 경쟁사가 모두 미국의 ‘빅3’ 자동차 회사에 납품하고 있었다. ‘우리도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미국은 QS-9000이라는 품질 규격을 만들어 모든 부품사에 이를 따르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NEC나 호시덴 같은 기업은 별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후발 주자인 삼성SDI는 이를 노렸다. 전 사원이 똘똘 뭉쳐 1997년 9월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결국 김광호 부회장에게 “1년만 기다려 달라. 그 안에 흑자를 내지 못하면 내가 접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