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곧 혁신이다 34

1994년에 삼성전자 전략기획실에서 프로세스 혁신을 경험한 것은 이후 최고경영자(CEO)로서 가질 수 있는 귀중한 자산이 됐다. 1995년 말 삼성SDI 사장으로 부임했을 때는 이미 2년간 ‘프로세스 혁신(PI)’ 과정을 온전히 겪고 난 뒤였다.

막상 삼성SDI에 가보니 혁신은커녕 과거 삼성NEC(삼성과 일본 NEC의 합작회사) 시절의 업무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컴퓨터도 NEC 것을 쓰는 등 모든 것이 NEC의 시스템이었다. “간접 부문의 생산성을 300% 올리고 이를 통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자”는 승리 전략을 직원들에게 제시했다. 방법은 역시 PI였다.

삼성전자의 PI는 1994년부터 시작해 6년간 장기 플랜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삼성SDI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신경영 1차 종료 시점인 1998년 6월까지 어떻게든 마쳐야 했다. 첫째 목표는 ‘프로세스 혁신을 1년 안에 끝낸다’였다. 보통 아무리 짧아도 3년은 걸리는 게 기본이었지만 그래선 망하기 십상이었다. 어찌 보면 무모한 도전이었다. 지금까지 누구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PI는 전문가의 도움과 감독이 필수다. 이를 위해 세계 각국의 컨설팅 회사를 찾았다. 언스트앤영(삼성전자 PI 담당), 앤더슨, KPMG 등이었다. 그런데 미국 회사들은 “1년 만에는 불가능하다”고 모두 손사래를 쳤다. 유일하게 독일의 KPMG만 “가능하다”는 연락이 왔다. 이 프로젝트를 맡은 KPMG 담당자의 이름이 슈미트였다. 그는 “기간 내에 맞추지 못하면 고객이 망한다는데, 맞춰줘야지 어쩌겠느냐”며 우리의 요구에 응했다.

당시 독일에는 SAP라는 회사가 만든 시스템이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독일이나 유럽 안에서도 부분적(재무·구매 등)으로만 깔려 있었지 회사 전체 시스템에 이를 적용한 사례는 없었다. KPMG는 바로 이 점을 노렸다. SAP 시스템을 기업 전반에 적용해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던 것이다. KPMG의 향후 컨설팅 마케팅에서 이보다 좋은 메리트는 없었다.

KPMG 안에서도 “내부의 인재를 키우려면 이런 큰 프로젝트 해봐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고 한다. 그 덕분에 삼성SDI의 PI를 담당하게 된 직원들은 KPMG 안에서도 욕심과 열정을 가진 인재들이었다. 이들은 1년 내내 휴가를 가지 않을 정도로 똘똘 뭉쳤다. 나중에 슈미트를 만나 물으니 “1년 사이에 체중이 20kg이나 줄었다”고 말했다.

제일 어려웠던 것은 직원들의 부인들을 일일이 만나 설득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유럽은 우리와 달리 1년 동안 휴가 없이 지낸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노동환경이었다. PI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난 후 담당자인 슈미트에게 ‘슈드 미트(should meet)’라는 별명을 지어 줬다. ‘고객의 요구를 반드시 들어주는 사람’이란 뜻에서였다.



프로세스 혁신 1년 만에

1995년 들어 제너럴일렉트릭(GE)의 잭 웰치 회장이 식스시그마를 천명했다. 당시 삼성과 GE의 합작사인 삼성GE메디컬시스템즈가 있었는데, 필자도 삼성 쪽 이사로 참여 중이었다. 그 덕분에 이사회 때마다 공장을 방문하고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마다 나오는 게 식스시그마 얘기였다. “그게 뭐냐”고 물으니 “100만 번에 3.4회 불량이 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몇 % 불량률’을 얘기할 때 그들은 이미 100만 개 수준을 지향하고 있었다.

결국 프로세스만 바꾼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회사의 모든 사람들이 방법론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생각에 식스시그마 도입을 천명했다. 하지만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반대했다. “PI를 1년 만에 끝내 죽을 지경인데 뭘 또 하느냐”는 소리였다. 여기서 필자가 내놓은 게 ‘곰탕론’이다. 한국 사람은 곰탕을 끓이고 비빔밥을 먹는 사람들이다.

한 가지를 쉽게 가르쳐 놓으면 게으름을 피우기 쉽고 어려운 도전 과제를 주면 악착같이 해내는 게 바로 한국인이란 뜻이다. “한 번 해보자”며 직원들을 다독였다. 프로세스 혁신과 전사적자원관리(ERP)를 동시에 끝내는 Y형 프로세스도 겨우겨우 설득해 시작했는데, 여기에 난데없는 식스시그마까지 붙여 W형 프로세스에 도전하자는 주문이었다. 결과는 결국 성공이었다.

당시 삼성SDS 남궁석 사장이 우리의 무모한 도전을 보며 걱정했던 모습이 생각난다. “NEC 시스템을 다 끄고 바꾼다고 하던데 다른 회사들도 기존 것을 돌려가며 한다. 그렇게 하는 게 어떻겠나.” 필자의 답은 단호했다. “안 된다, 배수진을 쳐야 한다. 모든 사람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답했다. 나중에 남궁 사장을 모셔온 적이 있다. 남궁 사장으로선 말리려는 의도였으리라. 이 자리에서도 “삼성SDI를 살리는 길이 PI와 식스시그마에 달려 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는 안 된다”며 오히려 설득했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식스시그마’ 도입과 ‘2차전지’ 사업의 시작
2차전지가 미래 먹거리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삼성의 전지사업은 전기·전자·전관 등이 모두 뛰어든 상태였다. 1994년부터 시작된 그룹 전체 회의를 통해 비로소 “삼성기술원이 연구를 진행하면서 언젠가는 통합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삼성SDI로 전지사업이 일원화된 배경이다. 당시 삼성SDI는 니켈수소전지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1996년 부임해 보니 이미 파일럿 생산 단계였다.

그런데 전지 사업을 공부해 보니 그때 이미 ‘리튬전지’ 시대가 온다는 게 전문가들 사이에선 상식으로 통했다. 하지만 SDI 사람들은 파일럿 단계까지 와 있는 니켈수소전지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니 항상 “문제없다. 시장이 밝다”는 얘기만 나왔다.

결국 직접 일본에 찾아가 전지 전문가 여럿을 만나봤다.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니켈수소는 가고 리튬이 뜬다”는 소리였다. 용량이나 품질로 당할 수 없다는 게 대세였다. 돌아와 직원들을 설득하고 리튬전지에 도전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막상 리튬전지 사업을 시작하려고 보니 국내에선 이미 LG화학이 2~3년 전부터 치고 나가 상당히 앞서 있는 상태였다. 불만과 어려움을 호소하는 직원들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사람의 몸을 봐라. 제일 중요한 세 가지가 있다. 첫째가 머리, 그 다음이 보는 눈, 마지막으로 심장이다. 뇌에 해당하는 반도체는 삼성전자가 맡고 우리는 디스플레이, 즉 눈을 맡고 있다. 여기에 심장에 해당하는 2차전지까지 우리가 한다고 생각해 봐라. 결국에는 삼성전자보다 더 가치 있는 회사를 만들 수 있다.”

삼성전기 시절에 ERP 프로젝트에 함께 참여했던 일본인 나카바야시 고문도 찾았다. 그에게 ‘후발 주자가 빨리 따라잡을 수 있는 방법’을 물었더니 “전 세계의 연구 결과 어떤 것이 성공하고 실패했는지 전부 파악하면 빨리 따라갈 수 있다”는 답을 들었다. 선문답 같은 대답에 당황해 하자 웃으면서 하는 말이 “모든 기술은 연구 논문과 특허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어차피 이 사업에서 성공하려면 특허를 분석해야 했다. 어느 회사가 어떤 기술에 강하고 어디에 중점을 두는지 특허에 모두 드러나 있었다.

특허청에 달려가 모든 논문을 다 찾아 발췌하고 복사해 왔다. 수천 건에 이르는 논문이 방 안에 산더미처럼 쌓였고 연구원들이 달려들어 정리,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기술과 협력 사항 등이 소상하게 드러나는 게 아닌가. 이와 함께 토론까지 진행하니 분야별 업무 분장도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식스시그마’ 도입과 ‘2차전지’ 사업의 시작
‘빠짐없이, 중복 없이’가 연구 활동의 핵심이었다. 전력을 다해 진행하니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LG화학을 따라잡았고 양산도 우리가 먼저 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때부터 필자는 무엇보다 특허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됐다. 미국의 전문가를 모셔와 특허팀을 만들고 전 세계의 특허를 연구·분석하는 일만 맡겼다. 오늘날 삼성SDI의 2차전지 사업 기반은 순전히 기술 특허를 바탕으로 이뤄졌다.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