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곧 혁신이다 38


필자가 삼성종합기술원에서 근무한 기간은 1999년 1월에서 2003년 1월까지로 만 5년간이다.
사실 기술원은 너도나도 가고 싶어 하는 그런 사업장은 아니다. 대부분의 최고경영자(CEO)들이 현장을 선호하지 연구소 책임자로 가는 건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곳에서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그릇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전까지 삼성 안만 바라보던 내부 지향적 사고가 대학과 수많은 연구소의 전문가들과 교류하며 확대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또 국가의 기술 정책을 만드는 과정에도 참여하는 등 활동 범위가 굉장히 넓어졌다. 개인적으로 돌아보면 경영자(CEO)로서의 인생과 이후 기술 경영인으로서의 삶으로 나눌 수 있을 정도다.
"이게 바로 영화에 쓰인 `신기전'"
(대전=연합뉴스) 임헌정 기자 = 영화 '신기전' 촬영을 위해 복원된 세계 최초의 다연장 로켓포인 신기전 기증식이 17일 대전 국립중앙과학관에서 열렸다. 사진은 화차에 실린 중신기전과 대신기전 발사대의 모습(왼쪽부터).
kan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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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바로 영화에 쓰인 `신기전'" (대전=연합뉴스) 임헌정 기자 = 영화 '신기전' 촬영을 위해 복원된 세계 최초의 다연장 로켓포인 신기전 기증식이 17일 대전 국립중앙과학관에서 열렸다. 사진은 화차에 실린 중신기전과 대신기전 발사대의 모습(왼쪽부터). kane@yna.co.kr (끝)
기술 경영인으로서의 새로운 삶

기술원장 재직을 통해 운명적인 만남도 가지게 됐다. 바로 ‘세종대왕’과의 만남이다. 세종을 통해 기술 경영인의 삶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세종과의 만남은 성신여대 총장을 지낸 전상운 박사의 ‘한국 과학기술사’라는 책을 우연히 접하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나중에 전 박사는 ‘한국과학사의 새로운 이해’라는 제목의 책을 다시 썼다. 이 책 제1장 3절을 보면 ‘세종시대 과학기술의 새로운 조명’이라는 챕터가 나오고 “이 연구는 삼성전자 기획 연구 과제로 이뤄진 것이다. 세종대(代)의 과학기술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 삼성전관 손욱 사장의 지원이 컸다”는 구절도 나온다.

전 박사의 책을 접한 필자는 ‘우리나라에도 이런 창조적 혁신의 시대가 있었구나’하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세종대에 이뤄진 과학기술의 혁신은 셀 수 없이 많았다. 훈민정음·자격루·신기전 등이 책 속에 자세히 소개돼 있었다. ‘책을 쓴 저자라면 이렇게 뛰어난 과학기술과 세종의 방법론에 대해 알지 않겠나’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이를 잘만 배울 수 있다면 우리도 창조적 혁신을 할 수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전 박사를 직접 만나 부탁했다. 도대체 어떤 리더십을 발휘했기에 세계적인 창조 기술을 이끈 시스템과 문화를 만들 수 있었는지 물었다. 그러면서 “과학기술의 내용은 이미 널리 알려졌으니 리더십이라는 측면에서 한 번 봐 달라”고 부탁했다. 전 박사도 이에 흔쾌히 동의했다. “연구를 진행하고 싶었지만 지원이 없어 손을 놓고 있었는데, 삼성이 도와주면 해보겠다”는 답이었다.

얼마 후 ‘세종의 리더십과 방법론’을 정리한 내용을 논문으로 받았다. 논문을 다 읽은 필자는 ‘이대로만 하면 바꿀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섰다. 하지만 당시에는 삼성SDI의 프로세스 혁신 작업에 쫓겨 연구·개발(R&D) 과정에서 제대로 활용하지는 못했다. 세종의 리더십을 본격적으로 도입해 활용한 건 기술원에 가서였다.

역시 전 박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연구원들의 긍지와 자긍심을 자극하려면 우리 역사에 이런 시대가 있었다는 걸 얘기해야 한다. 그런 기술들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40가지 기술이다. 지금도 삼성기술원 벽에 붙어 있다. 예를 들어 ‘신기전’은 서양식으로 하면 로켓에 해당한다. 로켓은 신기전 이후 450년이 지나서야 다른 나라에서 등장했다. 측우기도 200년이나 앞선 기술이고 금속활자도 마찬가지다. 훈민정음·자격루 등 세계 최초의 혁신 기술이 모두 세종대에 등장한 것이다.

이런 세계적인 기술들을 벽에 붙여놓고 기술원 연구원들로 하여금 “우리도 저런 걸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회의실의 이름도 ‘장영실방’ 등으로 바꿨고 세종대의 천문기기도 진열했다.

필자가 현재 진행하고 있는 ‘한국형 리더십’ 연구도 세종의 리더십 연구에서 출발한다. 한국형 리더십 연구원을 설립하고 이사장으로 일하는 것도 알고 보면 세종 덕택인 셈이다. 2007년부터 포스코의 후원으로 한국형 리더십 연구회를 매월 한 번씩 열고 연구 활동을 벌이고 있다. 매년 개최되는 심포지엄도 마찬가지다. 세종의 기술 개발 방식을 연구하다가 한국형 MOT(Management Of Technology) 개념이 나오는 등 모든 연구 활동에 세종이 연관돼 있다. 세종과의 만남을 운명적이라고 여기는 이유다.

세종의 꿈은 ‘품격 있는 나라’였다. 22세의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세종은 ‘왕이라는 건 백성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여겼다. 세종이 즉위해 제일 먼저 한 얘기는 “나는 잘 모르니 함께 의논해서 하자”는 말이었다. 즉 토론 문화다. 나라의 근본인 백성의 행복을 위해 모두 함께 고민하고 연구하고 실천하자는 것이었다. 그것이 세종의 가장 큰 비전이고 목표였다.



세종에게서 배운 한국형 리더십

그렇다면 세종이 생각한 행복한 나라는 무엇이었을까. 첫째, 모든 백성이 지혜로워야 한다. 그러려면 책을 많이 읽게 해야 한다. 즉 교육이다. 백성을 교육시킬 책을 출판하기 위해선 필사나 목판만으론 부족했다. 세종은 이를 위해 하루에 40벌씩 인쇄할 수 있는 고려의 금속활자를 계승해 궁궐 안에 주자소를 지었다. 왕 자신이 수시로 드나들며 이전보다 두 배나 많은 책을 찍어냈다. 특히 모든 백성들의 교과서인 ‘소학’은 1만 권이나 펴냈다고 한다. 당시 약 21만 가구가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오늘날의 기준으로 100만 권을 찍어낸 것과 비슷한 수준이다. 자연히 나라 안에 책이 넘쳤다. 한자가 어려운 백성들을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기까지 했다.

관료나 학자들과는 끊임없이 토론했다. 재위 32년 동안 경연 횟수만 1800회가 넘는다. 토론을 거듭하면 전체 관료·학자들의 지식수준이 올라가고 유능한 인재도 발탁할 수 있다. 서로 교류해 문제를 해결하니 시너지가 창출되는 건 당연했다.

세종이 꿈꾼 두 번째는 ‘행복한 사회’다. 이를 표현한 게 ‘생생지락(生生之樂)’이다. 첫 번째 생은 ‘생활’을 가리킨다. 두 번째 생은 ‘생업’ 즉, 직업을 뜻한다. 풀어 쓰면 ‘생활과 일의 즐거움’이다. 모든 이들이 자기 삶과 일을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삶이 바로 생생지락이다. 백성들이 생업을 즐기게 하기 위해서는 기술을 개발하고 교육시키고 어려움을 해결해 줘야 한다. 세종은 수시로 백성을 만나 얘기를 듣는 등 소통을 중시했다. 이런 방식을 ‘삼통’이라고 하는데, 뜻과 말과 마음이 통한다는 의미다.

뜻과 말을 세워 일방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고 백성과 관료의 마음이 통해야 했다. 상징적인 인물이 좌의정 허조다. 그는 분석력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 왕의 의견이라도 ‘안 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반대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도 세종은 허조를 무척 아꼈다고 한다. 반대하는 내용을 개선하면 성공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소통은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다. 요즘 들어 소통의 부재로 사회적 갈등이 많다고 한다. 소통에 따른 갈등 비용이 국내총생산(GDP)의 27%에 이른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마지막은 ‘존경받는 국가’였다. 이는 외부로부터의 평가다. 세종 시대는 뛰어난 과학기술력이 있었고 정신문화도 꽃피웠다. 중국의 사신들도 “중국에 있다가 조선 땅에 들어오면 모든 사람들이 질서 있고 깨끗하고 예의바르다”며 세종을 칭찬하고 부러워했다. 여기에 막강한 국방력까지 갖춰 여진족을 몰아내고 압록강 국경을 확립했다. 왜구들이 단 한 번도 침범하지 못했던 때도 바로 세종대다.
한국형 리더십과 세종대왕과의 만남
농경 기술과 문화를 일본에 전수해 일본의 농업 생산성이 400% 향상되기도 했다. 곳간마다 양식이 넘쳐 남는 식량을 왜구의 근거지에 공급한 결과였다. 힘만 있는 게 아니라 나눌 줄도 알았던 것이다. 이런 역사를 알게 되면 세종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세종대야말로 우리 역사를 통해 가장 품격 있는 나라를 일군 시기였다. 백성은 지혜롭고 사회는 행복하고 존경도 받는 나라. 기업도 마찬가지다. 행복한 일터, 사랑받는 기업이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다.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