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곧 혁신이다 40

기업의 혁신과 성장을 이끌 연구 방법론을 배우기 위해선 이를 잘 실천하고 있는 선진 기업을 찾아가 보고 듣고 실천하면 된다. 삼성도 과거 일본의 일류 기업을 배우고 이들과 협력하는 것이 중요한 전략이었다. 소니·도시바·히타치·도요타·캐논·일본전장 등과 같은 기업을 방문하고 실무자 미팅 등을 통해 연구 방법론도 서로 교류해 왔다.

일본의 연구소들은 일본식의 방법론으로 혁신을 추진했다. 미국과는 많이 달랐다. 문화의 차이 때문이다. 우리는 어차피 거의 모든 기술이 일본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연구원들 중에는 많은 수가 미국에서 공부한 이들이었다.

‘미국과 일본의 장점, 여기에 한국의 문화를 융합해 우리 것을 만들면 일본을 이길 수 있지 않겠나’하는 데 생각이 미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래서 삼성종합기술원의 연구·개발 방법론은 일본과 서구 방식이 섞여 있었다. 바로 한국 특유의 ‘곰탕·비빔밥론’이다.


일본에서 배운 조직 문화 혁신

우리의 기업·조직 문화에서 제일 부족했던 것 중 하나가 토론 문화다. 과거 세종 때는 집현전에 학사들이 모여 밤낮없이 왕과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새로운 기술, 국가 경영 시스템 등이 주요 안건이었다. 조상들은 이미 600년 전에 가장 성공한 조직 문화 모델을 만들어 활용한 것이다.

특히 ‘경연(經筵)’이 매우 활발했는데, 이는 임금과 관리, 학자가 모여 앉아 학문을 논하고 국정을 토론하는 자리였다. 세종 때 열린 경연의 횟수만 해도 1898회에 이른다. 이런 토론을 통해 국가 전체의 지식 수준이 올라갔다. 전체가 업그레이드되는 효과다. 또 경연을 통해 우수한 인재를 발탁하고 기술자들끼리 융합해 시너지를 낼 수 있었다.

왕이 토론을 중요하게 여기며 이끄니 전국 방방곡곡에 이런 문화가 퍼졌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어떤가. 어느 때부터인가 훌륭한 전통이었던 토론 문화를 잃어버린 채 권위적인 문화로 바뀌었다. 톱 다운의 단순한 문화로 바뀐 것이다. 이런 상황에선 개개인의 잠재 역량이 발휘되지 않고 조직 전체의 지혜도 모이지 않는다. 이러니 동기부여가 있을 수 없다.

도요타와 캐논을 견학하고 제일 감탄했던 것이 바로 ‘와글와글 미팅’이다. 과거 일본의 능률협회가 ‘도대체 왜 일본의 생산성이 떨어지는가’를 연구한 적이 있는데, 결론은 토론의 부재였다고 한다. 반면 미국인들은 어려서부터 가정에서도 토론을 벌이는 데 익숙하다. 학교 수업도 역시 토론으로 진행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기에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다.

그런데 동양적 사고에서는 나와 다른 얘기를 하는 사람을 내 생각에 반대하고 거부한다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아예 얘기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알아도, 몰라도 말 자체를 안 하는 것이다. 토론과 말하기를 좋아하는 미국의 조직 문화에선 서로 뭘 알고 모르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러다 보니 시너지가 창출되는 것이다.

‘이런 문화를 일본도 배우자’고 해서 탄생한 것이 와글와글 미팅이었다. 서로 자유롭게 떠들면서 토론하자는 것이다. 전문 용어로 바꾸면 ‘KI(Knowledge Intensive) 미팅’이다. 구체적인 방법을 보자. 제일 먼저 하는 건 벽에 자기 의견을 붙이고 공유하게 하는 것이다. 말하는 것은 어렵고 쑥스러워도 쓰는 건 거부반응이 적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토론이 이뤄진다. 삼성기술원에서도 이를 도입했다. 일본에서 KI 미팅을 창시한 분을 초청해 교육도 받았다. 직접 도입해 보니 놀라운 성과가 나타났다. 개발 기간, 시간, 비용이 모두 30% 줄어드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지금은 포스코가 이를 도입해 활용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자동차 강판을 만드는 원동력 가운데 하나다.
삼성종합기술원 휴먼컴퓨터인터페이스 연구팀원들이 음성인식 로봇 실험을 하고 있다./신경훈기자khsh@hankyung.com

마감안된/이공계살리기
삼성종합기술원 휴먼컴퓨터인터페이스 연구팀원들이 음성인식 로봇 실험을 하고 있다./신경훈기자khsh@hankyung.com 마감안된/이공계살리기
창의는 자유롭게 떠들 때 나온다

기술원의 조직 문화를 바꾸는 방법론 가운데 다른 하나는 오픈 마인드였다. 이를 위해 모든 연구실을 열린 연구실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그전까지 모든 연구실의 문은 육중한 철제문으로 돼 있었다. 연구실 안에도 높은 칸막이가 쳐 있어 내부 소통마저 어려운 분위기였다.

우선 몇몇 연구실의 문을 투명한 유리로 바꿨다. 처음에는 산만하다 뭐다 해서 반대도 많았다. 하지만 이후 조금씩 분위기가 밝아지고 소통도 잘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왜 우리 연구실은 안 바꿔 주느냐”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인식이란 때로 순식간에 바뀌기도 한다.

소통을 위한 ‘커피 브레이크’도 만들었다. 일할 땐 최대한 집중하고 중간에 적절한 휴식 시간을 챙기자는 의미다. 최대한 안락한 분위기에서 소통할 수 있도록 휴게 공간도 많이 만들었다.

그 이후 일본의 조미료 제조업체인 아지노모토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굉장히 특이하고 인상 깊은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연구실은 굉장히 좁게 쓰면서도 복도는 마당처럼 넓었던 것. 복도 옆에는 예쁜 조경과 뛰어난 전망이 갖춰져 있었다. “왜 이렇게 복도가 넓으냐”고 물으니 “창의는 뭘 하자고 해서 나오는 게 아니라 우연히 나온다. 우연은 대화를 통해 나온다. 화장실에 가다가 누군가를 만나 차 한잔을 하거나 담배 한 개비를 피우며 얘기하다가 떠오르는 착상이 바로 창의다. 그런 공간이 넓고 쾌적하고 편리해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넓은 복도에 탁자나 컴퓨터 등이 갖춰져 있었다. 그때그때 생각나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바로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든 배려였다.

당시는 회사마다 금연 운동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반도체의 경우 담뱃재는 치명적이어서 회사 울타리 안에선 절대로 못 피웠다. 그런데 반도체 울타리 바로 바깥은 기술원이다. 때마침 반도체와의 협력 강화를 고심할 때였다. 물론 기술원도 건물 안에서는 금연이었다. 하지만 건물 밖에서는 편리하고 안락한 흡연 장소를 만들자고 계획했다. 그러면 반도체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오게 될 것이란 계산에서였다. 실제로 반도체 직원들은 이 공간을 즐겨 찾았다. 봄가을로는 뜰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소통하는 도시락 데이도 만들었다

이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한 연구팀이 몇 년간 열심히 연구한 과제가 있었는데, 막판에 큰 차질과 위기를 맞게 됐다. 더 이상의 아이디어도 고갈된 상태였다. 그전 같으면 포기하고 말았겠지만 이들은 새로운 발상을 실행에 옮겼다. 기술원에 1000명이나 되는 훌륭한 연구원들이 있으니 우리 연구실만이 아니라 1000명의 지혜를 구하자는 것이었다.

“○○연구실을 ○월 ○○일 점심시간에 오픈한다. 방문한 분들께 맛있는 점심과 음료를 제공한다”는 공지를 올렸다. 그리고 연구실 벽에 그동안 진행해 왔던 과제와 연구 실적, 실패 사례 등을 자세히 써 붙여 놓았다. 실제로 연구실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이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러자 40명 정도가 참여해 진지한 토론이 이뤄졌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단 몇 시간 만에 떠오른 아이디어가 몇 년 동안 고심한 것보다 더 뛰어난 해결책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특허를 얻는 등 관련 연구는 성공을 거뒀다. 그 후 열린 미팅은 기술원 안에서 유행이 됐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도요타와 캐논에서 배운 ‘와글와글 미팅’과 소통
일본은 KI 미팅을 통해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는 동력을 얻었다. 그런데 KI 미팅 같은 방법이야말로 한국인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론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서로 소통하며 창의력을 자극하고 융합과 시너지를 창출하는 문화…. 한국 사람은 예로부터 소통만 잘되면 엄청난 결과를 이뤄내 왔다. 이를 증명하는 이가 바로 세종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소통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문화가 많이 부족한 실정이어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