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곧 혁신이다 42

2001년 삼성종합기술원에서 ‘미래기술연구회’를 발족했다. “앞으로의 시대는 융합 기술의 시대다. 새로운 융합은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들이 서로 교류하고 이해하는 시너지에서 나온다. 삼성의 미래는 바로 이 융합 기술에 달려 있다.” 연구회가 발족된 배경이다.

한국 최고의 전문가들을 연구회 회원으로 초청해 강연을 열었다. 나노·바이오·통신·컴퓨터에서 건축과 사회 분야 전문가까지 20명 정도를 조직했다. 지금도 2, 3기로 이어지고 있다. 이 자리에는 삼성전자의 차세대 리더들과 최고경영자가 함께 참여했다. 당시 전무였던 이재용 사장도 멤버였다. 기술원의 전문가들, 삼성전자의 최고기술경영자들이 함께 참여해 이들과 교류했다. 서로 듣고 배우는 자리였다.

연구회에 참여한 사람들 모두가 만족감이 대단했다. 이들은 서로 각 분야에서 1등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다른 분야는 잘 몰랐다. 흔하지 않은 교류의 기회를 열어준 것에 대해 굉장히 고마워할 정도였다. 삼성도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 대표들의 지혜·지식을 나눌 수 있는 기회였다.

요즘 동반 성장과 공생이 화두인데, 사업 초기만 해도 모회사만 잘되고 하청 업체들은 수단만 제공하는 시대였다. 그야말로 하청 관계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협력회사’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지금에 와서는 공생 시대를 말하게 됐다. 단순히 어떤 회사와 거래 관계에 있는 협력회사가 아니라 전자산업 전체를 뒷받침하는 큰 생태계(클러스터)를 올바르게 육성하는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개념으로 발전한 것이다. 생태계를 바탕으로 모기업이 크고 협력사도 발전하면 개인이나 작은 기업도 상승 발전하게 된다. 어장을 크게 만들어야 큰 물고기가 많이 놀고 어부도 고기를 잘 잡을 수 있다. 미래기술연구회는 융합 기술의 리더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생태계를 만들자는 개념이었다. 오늘날의 공생이나 동반 성장과 같은 개념이다.



한국 최고들이 모인 미래기술연구회

4세대 통신 연구가 좋은 예다. 처음부터 5개 대학의 교수들을 중심으로 한 대학에 10~20명 정도의 연구 인력이 참여하는 대형 산학협력 클러스터를 만들었다. 일종의 4세대 통신 생태계다. 오늘날 한국이 통신 강국으로 자리한 것도 이런 생태계가 뒷받침이 됐다.

2004년 1월 필자는 5년간의 기술원 생활을 마감하고 삼성인력개발원장으로 부임했다. 그 시절 항상 고민했던 것 중 하나가 “왜 공대를 나오고도 기업에 오면 3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제 역할을 하는가”였다. 미국에선 졸업 후 바로 기업 활동에 뛰어들어도 적응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2~3년씩 교육을 해야만 했다. 중소기업이나 대기업 할 것 없이 수천만 원에서 1억 원 넘게 재교육에 투자했던 것이다. 삼성도 마찬가지다. 해마다 뽑는 신입 사원들을 제일 처음 교육하는 곳이 바로 인력개발원이다. 학교와 기업 사이의 변화를 이어주는 중간 다리 역할이다.

삼성의 신입 사원 교육은 유명하다. 4주간에 걸쳐 짜임새 있는 교육이 강도 높게 진행된다. 인력개발원을 거치고 나야 비로소 삼성맨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신입 사원들의 특성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는 곳도 개발원이다. 각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는 어떤 인재인가, 우리가 받아들인 인재는 어떤가. 우선 이 갭부터 채워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연수 기간 안에 모든 과목과 훈련 내용을 식스시그마적으로 분석해 설계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즉, 과학적인 분석 방법론이다.

기업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부족한 것이 데이터 조사다. 특히 신입 사원들의 기초 소양 데이터 조사에만 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이 시간을 줄이는 교육과정 개발이 부임 후 첫 번째 목표가 됐다. ‘3년 걸리던 걸 2년 안에 하자’, 그리고 다시 ‘1년 만에 끝내자’는 목표를 세웠다. 그다음에는 각 대학과 협력해 입사 후 오리엔테이션을 거쳐 바로 업무에 투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신입 사원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 중 하나가 커뮤니케이션 능력이었다. 단순한 기술 습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 두 번째는 팀워크 같은 공동체 의식이다. 하지만 부족한 점들이 있더라도 삼성에 입사한 사람이라면 이미 어느 정도 검증된 인재들이었다. 즉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인력개발원의 모든 교육과정을 대학 교육과 직장 업무 사이의 갭을 채우는 교과과정으로 개편했다. 하지만 필자가 떠난 후 애석하게도 지속적으로 추진되지는 못했다. 만약 계속 발전했더라면 대학 교육까지 심도 있는 협력이 이뤄져 큰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디를 가나, 무엇을 하나 원점에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저 연수시키고 교육하는 게 다가 아니다. 단순한 오리엔테이션 정도의 개념과 신입 사원의 역량·특성을 분석해 부족한 것을 찾고 체계적으로 교육, 보완하는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 그리고 이를 계속 분석하고 연구해 3년에서 2년, 1년, 즉시로 심화했다면 대한민국 교육의 생태계가 변화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삼성 신입 사원들은 입사 1년 후 평창에 모여 ‘수련회’를 다시 연다. 7000~8000명 수준이다. 이곳에는 교육 담당도 모두 모여 잔치를 치르듯 흥겨운 분위기가 이어진다. 1년 동안 수고했다는 축하의 의미다. 계열사 사장들도 모두 참석해 굉장히 성대하게 치러진다. 필자도 행사에 참석해 관계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잔치하는 이유가 뭐냐. 수고·격려·칭찬으로 그치는 것이냐. 신입 사원 입장에선 맞다. 하지만 교육자 입장에선 그것만으론 안 된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삼성인력개발원장 시절과 한국형 리더십 연구
한국형 리더십을 찾다

신입 사원 교육을 마친 후 각 계열사로 보내 1년이 지나면 어느 회사 신입 사원들이 역량을 발휘하고 발전했는지 비교 분석하는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 그렇게 해서 최고의 교육 방법론, 최악의 사례를 발굴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역량을 발휘하고 빠르게 적응하는지 반성하고 깨닫는 학습의 장이 1년 후의 수련회가 돼야 한다는 게 지금도 필자의 생각이다. 그렇게 해서 잘하는 곳을 벤치마킹하고 못하는 곳은 더 노력해 배우고 연구해야 한다. 이런 목적의식을 갖고 임하는 것이 인력개발원의 가장 중요한 일이자 목표가 돼야 한다.

당시 리더십 관련 교육을 체계화하면서 한국에서 최초로 체계적인 리더십 양성 과정을 만들게 됐다. 제너럴일렉트릭(GE)의 시스템을 많이 참고했는데, 실제로 GE의 컨설턴트를 초빙해 프로그램을 설계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를 진행하다 보니 모든 것이 다 서구의 교육과정이었다. 미국과 유럽의 이론과 교재가 바탕이 된 것이다. 그때 비로소 의문이 생겼다. 한국인의 특성과 생각이 서구와 다른데, 이를 그대로 도입하는 게 효과적인가. 우리나라는 지식 창조 사회의 대표적 리더인 세종이 있는데, 왜 교육에는 접목되지 않았나. 이런 의문에 답을 준 분이 국민대의 리더십 전문가인 백기복 교수였다. 백 교수는 이후 ‘세종의 마음경영’이란 책도 쓰고 한국형 리더십 연구의 중심으로 활동하는 분이다.

한국형 리더십은 달라야 한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하게 됐다. 잭 웰치와 이건희는 분명 차이가 있다. GE식이 과연 한국에 맞는지 물어보면 답은 ‘아니다’다. 한국인은 진돗개와 비슷해 위기가 오면 기적 같은 일을 이룬다. 또 한국인은 감성적이고 서구는 논리적이다. 한국인은 마음으로 통하고 승복하지 않으면 진정한 힘을 내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국에 맞는 리더십이 따로 있는 게 아닐까. 그 DNA를 분석하고 전파해 각 분야에서 한국형 리더십이 살아 움직이면 세계적 일류 국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활동이 2007년부터 벌써 6년째 이어지고 있다.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삼성인력개발원장 시절과 한국형 리더십 연구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