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희망으로 떠오른 치료제 개발, 필름 쇠퇴로 무너진 코닥과 대비

[테크 트렌드] ‘에볼라 킬러’…후지필름의 끝없는 혁신
올여름 전 세계는 다시 한 번 온몸을 쭈뼛하게 만드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소리 없이 다가와 온몸을 헤집고 부풀어 올라 피범벅을 만들어 버리고 이내 90%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21세기판 흑사병, 바로 ‘에볼라’ 출혈열 때문이다.

그 공포가 현실로 다가온 순간은 역시 서아프리카 지역에서 의료 봉사를 하던 미국인 2명이 에볼라에 감염됐다는 발표가 나왔을 때였다. 미국인들조차 발병한 이들을 본국으로 후송해서는 안 된다고 아우성을 칠 정도였으니 말이다. 엄격하게 격리된 특별기편으로 에모리대병원으로 이송되는 환자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북미에 에볼라가 창궐한다는 재난 영화 ‘아웃브레이크(Outbreak)’의 장면이 겹치며 몸서리쳤을 것이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또 다른 놀라운 뉴스를 듣게 됐다. 꼼짝없이 죽을 것만 같았던 환자들이 아직 시험 단계인 치료제 지맵(Zmapp)을 투여 받아 급격히 상태가 호전됐다는 것이다.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세계 여러 제약 회사들이 치료제를 개발 중이라는 사실은 엄청나게 고무적이다. 이에 맞춰 전 세계 방역 당국은 비상시 현재 시험 중인 치료제의 현황을 파악하고 긴급 확보 대책 마련에 나섰다. 그 결과 실전 투입이 가장 유력하다고 판명된 것은 바로 일본 후지필름의 ‘파비피라비어(favipiravir)’였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후지필름? 말 그대로 사진 제품으로 주로 알려진 이 회사가 에볼라 출혈열 치료제를 만든다고? 그것도 이미 일본에서는 올해 초 당국의 제조·판매 허가까지 받고 미국에서도 동물실험 단계일 정도로 앞선 제품을? 그러나 이것은 이미 극적으로 변화한 후지필름의 광범위한 사업 영역을 모르고 하는 소리일 뿐이다. 그 이면에는 기술 트렌드 변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코닥과는 대조적으로 화려한 재탄생을 이뤄낸 후지필름의 노력이 있었다.


디지털 사진 ‘쓰나미’로 생존 위기
모두가 알다시피 후지필름은 코닥과 함께 세계 사진용 필름 시장을 양분해 온 강자였다. 그전부터 사무용 기기 등 다양한 사업 영역을 개척하긴 했지만 2000년까지도 여전히 필름 등 사진 재료 부문은 후지필름 전사 영업이익의 60%를 벌어들이는 핵심 사업이었다.

그러던 후지필름에도 디지털카메라의 급성장이라는 시련은 여지없이 찾아왔다. 21세기 들어 단 5년이 지나지 않아 사진 재료 부문의 실적은 적자로 곤두박질쳤다. 이제 누가 보더라도 과거 방식의 사진필름은 회복은커녕 몰락이 확실한 사업이었다. 불과 10년 전의 후지필름은 이처럼 한쪽으로 기울어 깊은 심연에 빠져드는 배와도 같았다.

2003년 최고경영자(CEO)에 취임한 고모리 시게타카는 고심을 거듭한 끝에 2005~2006년에 필름 사업 부문의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국내외 생산 시설을 통폐합하고 당시 1만5000명 수준이던 인력 중 5000명을 감축했다. 그리고 이전부터 파인픽스(FinePix) 브랜드로 해 오던 디지털카메라 사업에 한층 무게감을 실어 줬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거센 테크 트렌드의 조류를 이겨내는 데 역부족이었다. 필름 사업에는 절대 강자였다고 하더라도 이미 디지털카메라 시장에는 소니·캐논·니콘·올림푸스 등 쟁쟁한 라이벌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단순히 디지털카메라에 매달리는 것만으로는 필름 사업에서 누리던 영광을 재현하기는커녕 그전에 회사가 망할 판국이었다. 바로 코닥이 그런 운명을 밟았듯이 말이다.

후지필름은 그 대안으로 한창 각광받고 있던 평판 디스플레이, 그 가운데서도 액정표시장치(LCD) 패널에 들어가는 재료 사업에 투자하고 있었다. 2000년대 초반 플라스마디스플레이패널(PDP) TV와 LCD TV의 주도권 경쟁이 치열하던 시기에 후지필름은 과감하게 LCD TV가 대세가 될 것이라는 쪽에 베팅했다. 그리고 후지필름의 광학 기술 노하우가 톡톡히 발휘된 편광판 사업에 심혈을 기울여 2000년대 초부터 수조 원대의 설비투자를 해 왔다. 그 결과 2000년대 중반 필름 사업을 정리하는 험난한 시기에 후지필름은 LCD 패널용 편광판 시장에서 무려 80%라는 시장점유율을 누리며 구조조정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007년부터 본격화된 글로벌 금융 위기의 충격으로 LCD의 시장 수요가 급감하면서 편광판 등 관련 재료의 주문도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테크 트렌드 변화의 파고 하나를 넘었나 싶었더니 이제는 예기치 않았던 급격한 시장 분위기의 반전을 맞은 것이다.

고모리 CEO는 이 단계에서 보다 적극적인 사업 변신에 베팅했다. 그는 2006년 뜬금없이 ‘화장품’ 사업에 진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도대체 필름과 화장품이 무슨 상관이 있기에 시세이도 등 유명 브랜드가 이미 즐비한 시장에 발을 디뎠을까.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필름과 화장품에는 놀라운 유사성이 있었다.

화장품은 외부 환경으로부터 피부에 쏟아지는 자외선과 활성산소를 막아주고 유익한 성분이 피부 속에 잘 침투되도록 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런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면 피부가 노화되고 윤기와 탄력을 잃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사진필름도 똑같은 문제에 시달려 왔다. 오래 묵혀 놓은 필름을 꺼내 촬영해 보면 색이 바랜 듯한 느낌이 난다. 필름도 유통 중 외부 환경과 접촉하면서 ‘노화’되는 것이다. 특히 필름은 대단히 민감한 색소 관련 화학약품들을 발라 놓은 것이어서 산화되고 변질되기도 그만큼 쉬웠다. 표면을 정교하게 처리하고 항산화 물질을 도포해 유해 활성산소와의 접촉을 막는 것이 필름 산업의 핵심 기술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필름은 빛이 원활하게 통과할 정도로 화학물질을 여러 층에 걸쳐 얇게 쌓은 것이다. 층당 두께는 약 1마이크로미터(㎛), 즉 0.001mm에 불과하다. 이 얇은 면에 발색 물질이 골고루 퍼져 있지 않으면 사진이 얼룩이 진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러려면 이들 물질들을 0.1㎛(100나노미터) 정도의 이른바 ‘나노 입자’로 곱게 나누어 까는 기술이 필요했다. 화장품에 제아무리 좋은 성분을 넣었다고 하더라도 피부의 미세한 구멍을 통과해 침투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후지필름의 이 나노 입자 기술은 유익한 성분이 피부 깊숙이 침투할 수 있도록 가공하는 데도 중요한 기술이었다.


화장품·헬스케어 투자로 극적 반전
결국 후지필름은 이런 항산화 처리 기술과 나노 입자 기술을 종합한 화장품 ‘아스타리프트’ 시리즈를 2007년 출시했다. 처음에는 모두가 코웃음을 쳤지만 소비자들의 호평이 잇따르면서 시장점유율이 꾸준히 높아졌고 이제 적어도 일본 화장품 업계에서 후지필름은 뚜렷한 존재감을 가진 기업으로 성장했다. 사진필름이라는 거대한 제품군은 몰락했지만 그 원리와 노하우는 우리의 얼굴에 바르는 필름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화장품도 놀랍지만 정작 시장을 놀라게 한 결단은 바로 이듬해인 2008년에 벌어졌다. 그해 2월 중견 제약회사인 도야마화학공업 인수를 발표한 것이다. 이내 후지필름은 도대체 왜 본업과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업에 나서느냐는 날 선 질문에 시달렸다. 주가 또한 속절없이 떨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도야마화공은 당시 적자에 허덕이며 부실화 경고에 시달리던 기업이었다. 이런 기업을 1400억 엔이나 들여 인수하는 게 주주들에게 곱게 보일 리 만무했다.

하지만 고모리 CEO의 뜻은 확고했다. 후지필름이 미래에 생존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유망한 의료 사업에 교두보를 확보해야 하고 사진 기술을 위한 화학 분야의 노하우가 두터운 후지필름에 제약 사업은 상당한 연관성이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또한 앞서 화장품의 사례에서도 봤듯이 후지필름이 발전시켜 온 각종 나노 기술들은 미래 의약품에도 충분히 써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도야마화공은 당장의 실적이 부진하더라도 알츠하이머병·인플루엔자 등 다양한 질환에 대한 신약 후보 물질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만한 투자의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의료 분야 사업을 매출 1조 엔대로 키우기 위해 얼마든지 인수·합병(M&A)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고모리 CEO는 그 공언대로 미쓰비시상사·도호홀딩스와 함께 제약 사업에 공동투자에 나서 몸집을 불렸다. 이어 2011년에는 미국 머크(Merck)의 자회사였던 영국 MSD 바이오로직스, 미국 다이오신스 RTP 등을 연이어 인수하며 바이오 제약 부문까지 강화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이제 서서히 그 결실을 보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에볼라 치료제도 원래는 도야마화공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용 치료제로 개발하던 것이었지만 에볼라 바이러스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현재 후지필름 사업에서 필름 등 사진 재료 사업은 비중이 단 9%에 불과할 정도로 축소된 데 비해 화장품·의약품 등 헬스 케어 사업은 비중이 16%를 넘어섰고 나날이 성장해 가고 있다. 이제 앞으로 어린 세대들은 후지필름의 헬스 케어 기기와 약품을 쓰면서 “왜 저 회사는 ‘필름’이란 말이 붙어 있어요?”라고 물을지도 모른다.


채승병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