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버스토리= 혁신성장의 조건 ⑤금융 ]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 위험을 감수하려는 ‘야성’ 회복해야
황영기 금투협회장 “모험자본 공급할 금융의 혁신 필요하다”
(사진) 황영기 금융투자협회회장 / 이승재 기자

[한경비즈니스=이정흔 기자 미국을 대표하는 정보기술(IT) 공룡으로 성장한 아마존은 1994년 미국 시애틀의 어느 작은 창고에서 온라인 서점으로 출발했다. 이후 창업 3년 만에 기업공개(IPO)에 성공한 뒤 다양한 영역에서 왕성한 인수·합병(M&A) 식욕을 자랑하며 영역을 넓혀 왔다. 그러는 사이 2010년 3만 명 수준이던 직원 수는 2017년 38만 명으로 늘어났다.

혁신 기업의 육성이 국민경제, 특히 일자리 창출에 얼마나 기여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례다. 물론 아마존이 지금과 같이 성장하는 데 순탄한 길만 있었던 건 아니다. 초창기 자금 사정이 녹록하지 않아 생존에 위협을 받았던 때도 있었다. 이때 ‘동아줄’이 된 것이 미국의 대형 투자은행(IB)들을 필두로 한 모험자본시장에서의 자금 조달이었다.

아마존뿐만이 아니다. 애플·에어비앤비·우버 등 지금 글로벌 경제의 혁신을 이끌어 가고 있는 주역들 모두 마찬가지다. 골드만삭스·피델리티 등의 글로벌 IB들이 투자를 통해 유니콘 기업(기업 가치가 10억 달러 이상인 스타트업)으로 성장시킨 기업들이 수두룩하다. 벤처캐피털 분석 업체 CB인사이트에 따르면 피델리티가 투자한 유니콘 기업의 수는 20개, 골드만삭스는 19개(2017년 1월 기준)에 달한다.

2017년 대한민국 경제는 중대한 분수령에 서 있다. 한국 경제의 핵심 성장 전략인 ‘4차 산업혁명’을 육성하기 위해 무엇보다 우선돼야 할 것은 ‘자본시장의 역할’이다.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으로부터 한국 경제성장을 위한 자본시장 발전 방안을 들어봤다.

황 회장은 “우리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아마존·구글같은 기업을 키울 수 있어야 한다”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모험자본을 공급할 수 있는 자본시장의 혁신이 필요하다”고 힘줘 말했다.

-4차 산업 시대에 모험자본을 공급하는 ‘자본시장의 역할’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기업들이 경영을 잘하기 위해서는 ‘돈과 사람’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한국에는 좋은 인재가 부족하지 않습니다. 기업에 돈을 공급하는 주체로서의 자본시장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죠. 역사적으로 한국은 은행이 이 같은 역할을 해 왔습니다. 다만 이제는 자연스럽게 이 역할이 주식시장으로 넘어와야 해요. 이미 자본시장 중심 경제성장 모델의 ‘초입’에 들어와 있다고 판단합니다.”

-지금까지 국내 금융업계가 이 같은 역할을 얼마나 잘했다고 평가하시나요

“삼성이나 현대와 같은 국내 대표 기업들이 성장하기 위해 초창기 필요한 자금을 공급해 준 곳은 국내 은행들이었죠. 당시만 해도 은행과 같은 금융회사가 ‘모험자본 공급’의 역할을 해준 거죠. 지금이야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당시만 해도 이들 기업에 자본을 공급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상당한 위험을 감수한 거니까요.

그런데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와 금융 위기를 거치면서 조금 달라진 측면이 있어요. 구조조정 등을 통해 국내 금융회사들도 재무 건전성이 높아졌고 또 기업들의 부채가 줄어드는 등 긍정적인 측면도 컸죠. 기본적으로는 우리 은행들은 위험관리 능력도 탁월하고 경영도 매우 탄탄하게 잘하고 있어요. 하지만 모험자금 공급 측면에서 보면 예전에 비해 위험을 감수하려는 ‘야성’이 줄어든 경향이 분명 있죠. 국내에 혁신 기업들이 많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예전과 같은 야성을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황영기 금투협회장 “모험자본 공급할 금융의 혁신 필요하다”
서울대 무역학과를 졸업한 뒤 삼성그룹에 입사해 삼성전자 자금팀장, 삼성생명 전략기획실장 등을 역임했다. 삼성 출신의 대표적인 금융통으로 꼽힌다. 삼성투자신탁운용 대표이사 사장에 올라 삼성투신운용과 삼성생명투신운용을 합병했고 삼성증권 대표이사 사장을 맡았다. 런던정경대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뱅커트러스트은행에서 근무하며 국제적인 감각을 쌓았다. 삼성그룹을 떠난 뒤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우리은행장과 KB금융지주 초대 회장으로 활동했다. 2015년 2월부터 제3대 금융투자협회장을 맡고 있다.

-증권업계는 어떤가요. 최근 ‘초대형 IB 육성’ 등 변화가 많은데요.

“증권업계는 은행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험 선호도가 높은 측면이 있죠. 하지만 아직까지는 모험자본 공급을 위해 충분한 수준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 역할이 더 많이 커져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현실적으로 국내 증권사들이 모험자본 공급의 주체로서 역할을 하기에는 개별 회사들의 규모가 작았어요. 은행과는 자기자본 규모와 같은 덩치 면에서 이미 차이가 크니까요. 체격 조건에 차이가 큰 만큼 은행과 비교해 모험자본 공급을 위한 여력이 적었던 거죠. 현재 금융 당국을 중심으로 추진하고 있는 ‘초대형 IB 육성’ 정책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IB 업무의 활성화로 특히 기대하는 효과가 있나요.

“우리 실물경제의 중추 역할을 하는 것은 중소기업입니다. 중소기업중앙회 자료에 따르면 2016년 국내 중소기업의 외부 자금 조달 비율을 살펴보면 은행 자금이 81.1%, 정책 자금이 10.6%, 비은행 금융회사가 7.5%, 주식이 0% 정도예요. 대부분은 은행에 의존하고 있죠. 그런데 은행은 담보나 보증 여력이 부족한 신생 기업 자금 공급에 한계가 있어요. 국내 신생 기업들의 창업 3년 후 생존율은 41%, 5년 후 생존율은 25% 수준입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예요. ‘데스밸리(창업 과정에서 자금 조달, 시장 진입 등 어려움을 겪는 시기)’를 통과하지 못한다는 얘기입니다.

IB 업무가 활성화되면 기업의 성장 주기에 따라 맞춤형 자금 공급이 가능해요. 직접 대출 외에도 적극적인 위험 인수 및 중개 업무를 통해 창업·성장·성숙·구조조정 단계에 따라 각각 크라우드 펀딩, 지분 투자, 기업공개, 자산 유동화, M&A, 부실채권 인수 등 토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겁니다.”

-금융시장의 발전을 위해서는 ‘야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개인적으로는 국내 금융업계의 미래가 밝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4차 산업 시대에 맞춰 어떤 변신이 필요하든지 간에 변신을 위한 기초 체력이 상당히 탄탄합니다.

다만 현재 국내 금융사들은 가계 대출, 부동산 대출 금융 등 ‘비생산적 금융’에 상당히 쏠려 있다는 지적은 타당하다고 생각해요. 미래형 고부가가치 산업의 성장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생산적 금융’의 역할을 확대해야 합니다. 현실에 안주하기보다 신상품 개발, 신사업 발굴, 해외 진출 등이 필요한 시점이에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모험을 걸어보는 용기가 있어야죠. 기본적으로 ‘야성과 상상력’이 뒷받침돼야 가능한 일들입니다.”

-‘야성과 상상력’을 키우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노동과 교육, 두 가지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금융은 기본적으로 ‘프로들의 시장’이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기본이 돼야 합니다. 근본적으로는 ‘직장’이 아니라 ‘직업’을 선택한다는 인식이 밑바탕이 돼야 해요. 은행과 보험업의 경우 상대적으로 ‘직업’보다 ‘직장’이 중심이 됩니다. 이에 비해 증권과 자산운용은 이직이 자유롭죠. ‘직장’이 아니라 ‘직업’을 선택하는 겁니다. 물론 고용의 안정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고용의 안정성’과 호봉제와 같은 ‘급여의 경직성’이 조합된다면 이는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교육은 아무래도 금융뿐만 아니라 우리 경제 발전을 위해 가장 근간이 되는 문제겠죠.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교육 방식은 ‘객관식 사지선다형’에서 정답을 찾는 방식이었습니다. 앞으로 자본시장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는 절대로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미 나와 있는 선택지 중에서 고르는 게 아니라 남이 가보지 않은 길을 찾아갈 수 있는 인재를 길러야 합니다. 이는 장기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황영기 금투협회장 “모험자본 공급할 금융의 혁신 필요하다”
-‘자산운용 산업 중심의 아시아 금융허브’ 정책 추진을 제안하셨습니다.

“자산운용업계의 성장 가능성을 매우 높게 보고 있습니다. 현재 국내에 운용되고 있는 간접운용자산의 합계만 보더라도 2014년(1329조원)에 비해 2017년 2분기(1837조원)까지 37.4% 늘어났습니다. 시장 잠재력 또한 선진국에 비해 충분한 수준이고요. 미국은 펀드 순자산(2경389조원)이 GDP(2경2282조원)와 비슷한 수준입니다. 한국은GDP(1693조원)에 비해 펀드 순자산(470조원)이 늘어날 여지가 더 크고요.

‘동북아 금융 허브 정책’은 참여정부 시절 처음 제안됐는데 그 이후 지금까지 성과 없이 흐지부지됐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10여 년간 답보 상태였던 ‘동북아 금융허브 정책’을 다시 추진해도 될 만큼 산업이 성숙했다고 판단합니다. 2015년 10월 사모펀드 개편 이후 신설 전문 사모 운용사 수는 93개에서 195개로 110% 증가했습니다. 자산운용업계 전체 순자산총액도 2016년 말 951조원에서 2017년 9월 1032조원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고요. 과거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더욱 과감한 금융 허브 전략을 수립하고 집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시아 자산운용 허브’를 현실화하기 위한 로드맵은 어떻게 구축해야 할까요.

“어느 한 지역을 ‘금융특구’로 지정하는 것은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이미 자산운용사들이 많이 모여있는 여의도를 ‘자산운용 국제 특구’로 지정하고 파격적으로 규제를 완화해 주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게 있습니다. 외국인들이 실제로 이곳에 들어와 ‘살기 좋게’ 만들어 줘야 합니다. 외국인 학교나 주택 문제, 영어가 가능한 가정부 등을 고용할 수 있는 방안 등을 같이 마련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싱가포르가 이와 같은 정책을 활용해 성공했습니다. 해외 업체들이 싱가포르에 자산운용사를 차리면 ‘웰컴 달러’를 제공해 줬거든요. 정부가 정책적으로 해외 자산운용사들이 시장에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자금을 지원한 겁니다.”

-자본시장 발전을 위해 ‘시장의 노력’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이 ‘제도적 뒷받침’입니다.
“맞습니다. 시장이 야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운신의 폭을 좀 더 넓혀 줄 필요가 있죠. 선진국에 비해서는 여전히 국내 자본시장의 규제가 과도한 측면이 있습니다. 특히 ‘사전 규제’가 많습니다. 사전 규제가 많다는 것은 ‘사고에 대한 두려움’이 그만큼 크다는 겁니다. 위험을 회피하기 위한 거죠. 예를 들자면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놀다가 자꾸 다치니까 운동장을 없애 버리는 것과 비슷한 겁니다.”

-그렇다면 현재 국내의 자본시장 규제는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요.

“지금 우리의 규제 방식은 ‘금융회사가 금융 상품을 만들 때에는 1번, 2번, 3번을 지켜야 한다’는 식으로 매우 세세하게 조항을 만들어 놓고 사전 규제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히려 이 같은 방식이 투자자 보호에 사각지대를 만들 수 있어요. 금융회사들로서는 ‘1번, 2번, 3번’을 지켰다는 것만 보여주면 되니까 그만큼 피해 나갈 길이 많은 겁니다.

그래서 주장하는 것이 ‘큰 원칙’을 중심으로 한 규제입니다. 금융회사가 금융 상품을 만들 때는 ‘신의 성실의 원칙’에 충실해야 합니다. 만약 이를 어긴 것이 사후에 적발되면 엄벌에 처해야죠. 미지의 신대륙을 찾아 떠나는 모험가에게는 내비게이션(디테일한 규정 중심)이 아니라 나침반(원칙 중심)이 필요합니다. 이와 같은 인식의 전환을 통해 ‘과감한 규제 완화’가필요합니다.”

-P2P·로보어드바이저 등 자본시장에도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서 변화가 큽니다. 이에 따른 국내 자본시장의 변화를 어떻게 전망하는지요.

“핀테크는 기본적으로 어떻게 하면 소비자들이 금융 서비스를 ‘조금 더 편리하고 쉽게’ 사용할 수 있을지의 문제입니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핀테크가 발전하더라도 ‘금융업의 본질’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죠. 결국 ‘본질에 충실한 금융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갈 겁니다.”

viva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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