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 혁신성장의 조건] 이어지는 위기설의 원인 ‘국가 경쟁력 약화’…각 경제 주체 다시 뛰어야
한국, 혁신 통해 ‘제자리걸음’ 벗어나자
[한경비즈니스 = 이홍표 기자] 9월 말 금융 투자업계를 중심으로 ‘10월 위기설’이 고개를 들었다. 1997년 10월과 2008년 10월 한국을 덮쳤던 금융 위기가 2017년 10월에도 찾아올 것이라는 것이 그 내용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전면 개정, 노동당 창건일에 맞춘 북한의 미사일 발사 우려를 비롯해 한·중 통화 스와프 만기 연장 불발, 미국의 환율 조작국 지정 가능성 등이 그것이다.

불안감이 심해지자 정부가 진화에 나섰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10월 2일 “대내외 리스크 관리에 한 치의 빈틈이 없도록 만전을 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행스럽게도 10월 위기설은 ‘설’로만 끝났다. 하지만 위기설은 잊을 만하면 다시 불거지고 있다. 올해만 해도 북한의 6차 핵실험 가능설 등으로 ‘5월 위기설’이 생겨난 이후 8월과 9월에도 위기설이 있었다. 이처럼 계속 터져 나오는 위기설은 한국이 대내외적으로 그만큼 믿음을
주지 못한다는 얘기다.

현재 한국의 경제 상황을 보여주는 각종 지표들은 위기설을 단순히 설로만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들고 있다. 단적인 예가 다시 0%대로 떨어진 성장률이다. 국책 연구 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의 김현욱 거시·금융경제본부장은 “7~8월 지표를 감안하면 3분기 경제성장률은 2분기와 비슷한 0.6% 내외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줄줄이 마이너스 기록한 경제지표
이유는 빤하다. 경제지표 대부분이 제자리걸음이거나 마이너스다. 통계청이 9월 발표한 ‘산업 활동 동향’을 보면 8월 전체 산업 생산 증가율은 전달 대비 0%로 집계됐다. 소비와 투자는 모두 감소했다. 소비 지표인 소매 판매는 전달보다 1.0% 줄었다. 설비투자도 0.3% 감소했다. 설비투자는 7월(-5.1%)에 이어 2개월 연속 줄었다. 소비와 설비투자가 모두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은 2016년 9월 이후 처음이다.

물론 경제가 잠시 주춤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한국이 이런 ‘지리멸렬한 상황’을 오랜 기간 이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은행은 10월 12일 ‘우리 경제의 역동성 점검’ 보고서를 통해 2002~2016년 우리 경제의 성장률, 소비·투자, 생산성 등 거시 지표와 산업구조 개편, 기술 혁신 분야를 종합한 ‘역동성지수’ 분석 결과를 공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02년 4.48로 기준선(3)보다 높았던 역동성지수는 하락세를 나타내면서 글로벌 금융 위기 직후인 2009년부터 기준선을 밑돌기 시작했다. 급기야 지난해에는 1.57 수준까지 떨어졌다.

한국의 장점은 역동성이었다. 그런데 그 역동성이 떨어지자 국가 경쟁력도 약화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국가 경쟁력을 판단하는 지표는 크게 두 가지가 권위를 인정받는다. 하나는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발표하는 지표, 다른 하나는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에서 발표하는 지표다.

9월 WEF가 매긴 국가 경쟁력에서 한국은 4년 연속 26위다. 6월 스위스 IMD의 국가 경쟁력 순위도 2년째 그대로다. 이 지표에서 한국의 국가 경쟁력 순위는 63개국 중 29위에 그쳤다. 양 기관이 지목한 한국의 약점은 비슷하다. WEF는 노동·금융 등 만성적인 취약 부문이 국가 경쟁력 상승을 제약한다고 지적했다. 경제 사정이 비슷한 신흥국과 비교해 우위를 점했던 혁신 역량도 약화 추세라고 분석했다. IMD도 노동 부문을 지목했다. 노동시장 순위는 52위, 노사 관계 순위는 62위까지 떨어졌다.

사정이 이런데도 각 경제 주체들은 상황을 타개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 정부 및 정치권은 의미 없는 규제를 양산하며 성장의 의지를 꺾어 왔다. 규제 정보 포털에 따르면 국내 등록 규제 수는 1998년 1만185건에서 2007년 5114건으로 대폭 줄었다. 하지만 2013년에는 1만5269건
으로 큰 폭으로 늘었다. 2015년 7월에는 1만4688건으로 비슷한 수준을 보였다. 1998년 규제개혁위원회 설치 이후 모든 정부가 규제 개혁을 외쳤지만 결국 20년 전 수준으로 복귀했다.

‘규제’정치·‘무대화’ 노동·‘갑질’ 기업
정부뿐만이 아니다. 각종 이해 단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국회도 규제를 쏟아냈다. 18대 국회에서 가결된 규제 신설·강화 법안(266건) 중 의원 발의는 219건(82.3%), 정부 제출은 47건(17.7%)이었다. 19대 국회에서 가결된 2793개 법률의 31.3%인 874개가 규제 관련 법률이었
다. 이 중 의원 발의 규제 법률은 757개(86.6%)였다. 20대 국회에서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개원 이후 지난해 9월까지 발의된 2277개 법률의 38.3%(871개)가 규제 관련 법률이었다. 이 가운데 의원 발의 규제 법률은 813개(93.3%)나 됐다.

또 다른 경제 주체인 노동계는 아예 대화의 문을 닫아버렸다. 새로운 성장 모델을 만들기 위해서는 독일의 하르츠 개혁, 네덜란드의 바세나르 협약, 스웨덴의 살츠셰바덴 협약 등 노사정 간의 ‘사회적 합의’가 필수다. 정부는 핵심 정책 추진 수단의 하나로 ‘사회적 대화’를 내세우고 있다.

이를 위해 정부는 9월 노사정위원회 파행의 단초가 된 이른바 ‘양대 지침 폐기’를 결정했다. 노동계가 주장한 ‘쉬운 해고’의 근거가 된 양대 지침이 폐기되면서 ‘사회적 대화’가 시작될 것이라는 기대가 많았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양대 지침 폐기는 환영한다면서도 노사정위 복귀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오히려 또다시 새로운 대정부 요구 사항을 들고나오고 있다.

기업도 구태를 반복하고 있다. 불투명한 기업 지배구조를 가지고 오너의 부를 축적하는 대기업과 ‘갑질 논란’ 등을 빚어내는 중견·중소기업은 비록 일부에 그치더라도 국민들에게 큰 실망감을 안기며 ‘반기업 정서’를 만들어 내고 있다.

결국 지금 한국이 놓여 있는 ‘지리멸렬한 상황’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지금까지의 구태를 벗고 ‘혁신’을 통해 새로운 성장의 어젠다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혁신은 창조적 파괴를 통해 나온다. 슘페터의 말이다. 창조적 파괴를 가로막는 과거의 불필요한 유산들을 찾아내고 이를 파괴해야 혁신이 비로소 이뤄질 수 있다. 특히 지금 세계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돌입했다. 창의적 인재를 키울 교육개혁, 기업가가 자유롭게 기업 활동이 가능한 규제 개혁, 노동시장의 경직성과 이중 구조를 해소하는 노동 개혁이 필요한 시기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정부가 그간의 ‘소득 주도 성장’론을 뒤로하고 ‘혁신 성장’론을 내세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혁신 성장은 소득 주도 성장 전략 못지않게 중요하다”며 혁신 성장의 개념을 조속히 정립하고 집행 전략을 마련하라고 9월 26일 지시했다. 이제 기업과 노동계도 나설 때다. hawlli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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