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 통해 효율 극대화 가능…‘연금사회주의’ 논란도 피할 수 있어
"국민연금 3~4개로 쪼개자" 분할 운용론 '고개'
국민연금은 7월 30일 피투자 기업에 대한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 지침인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기로 했다.

주요 내용을 보면 지금까지 해 온 주주총회에서의 의결권 행사는 물론 기금 수익을 심각하게 훼손할 우려가 있는 기업명 공개와 공개서한 발송, 타 주주의 주주 제안과 기업이 상정하는 관련 안건에 대한 의결권 행사 사전 공시 그리고 자본시장법상 경영 참여에 해당하는 임원의 선임·해임 등의 주주 제안도 법을 고쳐 시행할 수 있도록 했다.

국민연금이 이와 같이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하기로 한 자체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국민연금처럼 장기적으로 투자하는 기관투자가들이 피투자 기업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주주의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영미의 주식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정부 입김서 자유롭지 못한 국민연금

상장된 주식회사의 주식은 대개 널리 분산돼 경영자들이 적은 지분을 가지고도 경영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경영자는 자칫 주주이기는 하지만 경영에 참여하고 있지 못한 외부 주주들의 이익을 침해하고 사적 이익을 취하기 쉽다.

이때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는 기관투자가들이 그 힘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경영을 감시, 기업의 가치가 최대한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은 현대 자본주의의 핵심 어젠다 중 하나다.

특히 한국과 같이 대기업의 시장 지배력이 크고 대기업 오너들이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사외이사를 중심으로 한 이사회가 제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다면 기관투자가들이 평소 경영자의 활동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기업 가치 보존과 기업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해야 할 당위성이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과정에서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먼저 위탁 운용사에 점진적으로 의결권 행사를 위임하고 위탁 운용사 선정·평가 시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여부를 반영하되 개별 운용사의 코드 내용과 의결권 행사 기준 등에 대해서는 국민연금 기준과 상관없이 자율성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또 기존의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를 확대·개편해 가입자 대표가 추천한 전문가를 중심으로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를 설치해 독립적이고 투명한 주주 활동을 수행하도록 하고 주주권 행사 관련 주요 사항에 대해 검토하거나 결정하며 기금운용본부의 주주 활동을 점검하는 역할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국민연금이 이와 같이 위탁 운용사에 의결권 행사를 위임하고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를 확대 개편하기로 한 것은 정부도 국민연금기금이 현재와 같이 정부의 절대적인 통제하에 놓여 있는 체제에서는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이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득보다 독이 될 것이라는 비판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개선 조치는 어디까지나 미봉책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스튜어드십 코드에서 제시하고 있는 바와 같은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가 득보다 독이 될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첫째, 국민연금기금의 규모가 우리 경제 규모에 비해 너무 크고 둘째, 국민연금기금 운용이 절대적으로 정부의 통제와 관리에 예속돼 있고 국민연금공단의 기금운용본부 역시 정부의 산하기관에 불과한 구조로 짜여 있기 때문이다.

◆독립적인 지배구조 전제돼야

한국 경제에 비해 국민연금기금의 규모가 너무 크다는 뜻에서 ‘연못 속의 고래’라고도 표현한다. 국민연금의 자산 총액은 2018년 5월 말 기준 634조6000억원에 달한다. 자산 규모로 일본의 공적연금펀드(GPIF)와 노르웨이 국부펀드(GPF)에 이어 세계 3위 연금기금에 랭크될 정도다. 국민연금은 그중 21.3%인 134조6000억원을 약 800개의 상장 주식에 투자한다. 2017년 말 기준 10~15%의 지분을 확보한 한국의 상장회사가 97개, 5% 이상 의결권 지분을 가지고 있는 상장회사는 286개에 달한다.

미국 등 선진국을 비롯해 한국에서도 투자자가 상장회사 지분의 5% 이상을 보유하면 5일 이내에 그 배경과 이유를 공시해야 하고 10% 이상을 보유하면 단 1주의 주식 변동도 즉시 보고해야 하는 ‘5% 룰’과 ‘10% 룰’이 있다.

이를 보더라도 어떤 투자자가 5% 혹은 10% 이상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피투자 기업에 매우 각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런데 국민연금기금이 이렇게 많은 기업에 이와 같이 많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국내 상장 기업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기업에 이렇게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국민연금기금에 대한 통제와 감독권이 전적으로 정부에 속해 있다. 바로 이 때문에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는 득보다 독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가 박근혜 정권하에서 있었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안에 대해 당시의 보건복지부 장관과 기금운용본부장이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과정에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이유로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사건이다.

이와 같이 정부가 국민연금기금을 여전히 통제하고 관리하는 한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는 그 진정성을 인정받기 매우 어렵다.

문제의 핵심은 국민연금의 기금 운용이 정부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지 않는 한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는 기업 활동을 위축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국민연금기금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국민이지 정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느 정부나 명심해야 한다.

그러면 국민연금기금의 정치적 독립성은 어떻게 담보할 수 있을까. 사실 정부가 그러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정부로부터 자유로운 독립적인 기금 운용 기구를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자산 운용 전문가들을 기금 운용 이사들로 선임해 기금 운용 기구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이나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의 선임 방법을 참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연금 기금의 지배구조를 갖추고 있는 캐나다연금기금투자본부(CPPIB)를 참고해 정부로부터 독립적이지만 자산 운용에 관한 고도의 전문성을 갖춘 기금 운용 이사들을 선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기금 운용 기구가 정부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지배구조를 갖추게 된다면 국민연금기금도 3~4개의 펀드로 나눠 주고 서로 경쟁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체제로 개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각 펀드에는 주식·채권·대체투자에 대한 비율, 국내주식·국외주식의 투자 비율 혹은 자체운용·외부위탁 운용의 비율 등에 대해서는 일정한 지침을 주되 종목 선택과 타이밍 등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선택하며 경쟁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주주권도 각 펀드별로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도록 한다. 기금 운용의 효율성이 극대화될 뿐만 아니라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상장 기업에 대한 지나친 국민연금기금의 영향력, 나아가 연금사회주의라는 비판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한경비즈니스=박상수 경희대 경영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