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한국판 러스트벨트' 회생프로젝트,부활하는 디트로이트 현장을 가다]
-제조업 강점 살려 실리콘밸리와 차별화

-‘빅3’도 자율주행차 투자로 혁신 ‘박차’, 구글·소프트뱅크 등 첨단기술 기업 가세

[디트로이트(미국)=이정흔 한경비즈니스 기자] 디트로이트의 역사는 미국 제조업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한동안 화려했고 오랫동안 비참했던 미국 제조업의 부흥과 몰락을 상징하는 공간이고 동시에 미국 제조업의 미래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디트로이트에 다시 한 번 ‘혁신’의 기운이 살아나고 있다. 그 중심에는 물론 자동차 산업이 있다. 자율주행차와 전기차 등 최첨단 기술의 전초기지로 변신 중이다. 이와 함께 스타트업 문화도 꽃피고 있다. 자동차와 관련한 보안, 차량 간 통신 서비스 등은 물론 최근에는 헬스케어·리테일·푸드 이노베이션과 같은 자동차 외의 산업에도 다양한 스타트업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 ‘근육’에서 ‘머리’로, 진화하는 자동차 혁신

미국 디트로이트 인근 디어본에 자리한 글로벌 자동차 업체 포드의 ‘루지 팩토리’는 미국 자동차 역사는 물론 전 세계에서도 가장 유명한 공장 중 하나일 것이다. 디트로이트를 지금의 ‘자동차 도시’로 만든 헨리 포드의 자동차 대량생산 시스템이 탄생한 곳이기 때문이다. 올해로 100주년을 맞은 이 공장은 지난 세기 동안 멈추지 않고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자동차를 생산하고 있다.

포드는 이 공장을 ‘공장 투어’라는 이름으로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다만 어떤 경우에도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다. 지난 10월 13일 헨리 포드의 ‘루지 팩토리’ 투어에 참여해 공장 내부의 풍경을 관찰할 수 있었다. 투어 참여자들은 2층 발코니에서 공장을 바라보도록 돼 있는데 공장에 들어서니 예상하지 못한 풍경이 펼쳐진다. 미완성된 차량의 몸체를 쉬지 않고 실어 나르는 벨트 컨베이어가 바닥에 깔려 있다. 그 위로 2층 3층 겹겹이 벨트 컨베이어의 흐름이 연결된다. 마치 씨실날실처럼 얽히고설킨 벨트 컨베이어 위로 자동차 차체들이 유유히 ‘흘러가는’ 듯하다.

1층에는 이 벨트 컨베이어의 흐름을 따라 중간중간 공장 직원들이 서 있다. 누구는 자동차 차량의 문을 조립하고 또 다른 누구는 차량 내부의 의자를 조립하는 등 일사천리다. 로봇도 꽤 자주 눈에 띈다. 사람의 손처럼 쭉 뻗은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여 차체에 색깔을 입히고 차량 문의 나사를 조이며 차량의 안전 점검을 하기도 한다. 그 유명한 ‘포드 시스템’의 전형이지만 기계가 사람만큼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스마트 공장의 미래를 엿볼 수 있다.
디트로이트, ‘자동차 도시’에서 ‘스타트업 요람’으로
공장 투어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과거 디트로이트가 ‘미국 자동차의 자존심’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곳의 혁신 DNA가 밑바탕이 됐다. 짧은 시간 안에 자동차의 생산성을 높이는 ‘생산 방식의 혁신’은 단기간에 자동차 제조 공장은 물론 전 세계 제조 공장의 풍경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지금도 이 혁신은 스마트 공장을 통해 업그레이드되는 중이다.

문제는 더 이상 이와 같은 ‘생산성의 혁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디트로이트는 명실상부한 미국 자동차의 자존심이다. 포드뿐만 아니라 크라이슬러·제너럴모터스(GM) 등 미국 자동차 빅3들이 모두 이곳을 근거지로 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이들의 경쟁자는 실리콘밸리를 기반으로 한 전기차 업체 테슬라와 자율주행차 기술을 연구 중인 구글과 같은 기업들이다.

디트로이트시경제개발기구(DEGC) 관계자는 “누가 뭐래도 디트로이트는 ‘자동차 도시’고 탄탄한 제조업 기반의 혁신 DNA야말로 디트로이트의 가장 강력한 무기”라면서도 “하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더 높은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포드·GM·크라이슬러 등 자동차 빅3도 최근 변화를 시도 중이며 실제로 그 역할이 상당 부분 달라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미국과 글로벌 시장에 나타나고 있는 산업의 변화를 들여다보면 이 변화의 방향성은 뚜렷하다. 제조업은 무너졌고 기술을 중심으로 한 기업들은 새로운 흐름을 만들며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그 사이 디트로이트는 자동차와 관련한 연구·개발(R&D)의 중심지가 됐다. 포드·크라이슬러·GM과 같은 자동차 빅3의 본사가 이곳 디트로이트와 미시간에 자리해 있어 가능했던 변화다. 이들이 보유하고 있는 우수한 인력과 산업에 대한 깊은 이해도, 넓은 인맥, 방대한 자료 등이 큰 역할을 했다.

DEGC 관계자는 “기존에는 디트로이트가 자동차 산업의 근육이나 뼈와 같은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그 역할이 ‘머리’로 변화해 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포드다. 포드는 지난 6월 디트로이트 코크타운의 미시간중앙역을 리모델링해 포드의 새로운 사무실로 사용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포드는 이 건물을 ‘자율주행차 허브’로 개조할 것이라고 밝혔다. 포드는 2021년 자율주행차를 시장에 내놓을 계획이다. 자율주행차와 전기차 기술 개발뿐만이 아니다. 보안·안전·스타일 등은 물론 최첨단 기술 등 자동차 산업의 모든 부분을 바꿔 놓고 있고 그 역할이 커져 가고 있다.

◆자율주행차 기술 최전방, 디트로이트

포드뿐만이 아니다. 구글과 소프트뱅크 등 최첨단 기술 기업들이 디트로이트로 몰려오고 있다. 자율주행차 기술 등에 베팅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디트로이트 자동차 빅3의 경쟁자이자 동시에 협력자 역할을 자처하며 자동차 산업의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구글은 올봄 자율주행차 기술 개발 사무실을 디트로이트로 이전해 왔다. 구글의 자율주행차 파트너는 크라이슬러다. 2009년부터 자율주행차 기술을 연구하기 시작한 구글은 이 분야의 선두 주자다. 하지만 자율주행차를 직접 제조하는 업체는 아니다. 그만큼 자율주행차 기술과 관련해 ‘브레인’으로서의 역할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한 전략적 기지로 디트로이트를 선택한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향후 자동차 산업과 관련한 우수한 엔지니어와 리서치 인력을 영입하기 유리한 지역이라는 판단이 작용한 것이다.

구글의 자율주행차 부문 웨이모는 2016년 크라이슬러와 자율주행차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이후 크라이슬러는 그동안 구글에 ‘자율주행차 테스트’ 차량으로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퍼시피카 미니밴 600대를 공급해 왔다. 이후 지난 6월 구글이 크라이슬러로부터 미니밴 6만2000대를 추가로 구입하기로 계약했다. 여기에 들어간 자금만 총 20억 달러(약 2조1500억원)가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시장에서는 구글과 크라이슬러의 ‘자율주행차 상용화’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기대감이 흘러나오고 있다.
디트로이트, ‘자동차 도시’에서 ‘스타트업 요람’으로
디트로이트에 본사를 둔 또 하나의 글로벌 자동차 업체 GM도 구글을 바짝 뒤쫓고 있다. GM은 2016년 10억 달러를 들여 미국의 자율주행차 전문 기업인 크루즈 오토메이션을 인수했다. GM은 2019년부터 미국 주요 도시에서 자율주행 택시의 상용화 서비스를 시작할 계획이다. GM은 디트로이트에 보유한 쉐보레 볼트 생산 라인에서 자율주행차를 양산할 수도 있다. 구글 등과 비교해 자율주행차 제조원가를 낮추는 데 유리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현재 GM은 연간 10억 달러(약 1조800억원)를 자율주행 연구에 투입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일본의 소프트뱅크와 혼다 등 글로벌 파트너사들을 확보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한국계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일본 소프트뱅크는 지난 6월 GM의 크루즈에 약 22억5000만 달러를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글로벌 자동차 시장의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혼다도 지난 10월 3일 GM의 크루즈에 27억5000만 달러(약 3조원)를 투자하고 차세대 자동차 기술을 함께 개발하기로 했다. 소프트뱅크와 혼다 등으로부터 든든한 자금 지원을 등에 업은 GM이 본거지인 디트로이트를 기반으로 구글을 위협하는 강력한 라이벌이 될 가능성이 한층 높아진 셈이다.

◆디트로이트 스타트업 “우리는 실리콘밸리와 다르다”

‘자율주행차 기술’을 중심으로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혁신이 다시 한 번 주목받으면서 최근에는 스타트업들도 디트로이트로 점차 몰려오고 있다. 차량 간 커뮤니케이션, 자동차 보안, 배터리 기술 등과 관련한 기술 기업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디트로이트 스타트업 변신은 그저 ‘자동차’라는 한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실제로 ‘산업의 다양화’는 디트로이트 경제개발 부흥을 위한 중요한 열쇠 중 하나다. ‘자동차 도시’ 디트로이트는 과거 자동차 산업의 몰락과 함께 도시의 경제적 기반 또한 무너진 경험이 있다. DEGC 관계자는 “자동차 외의 산업을 육성하는 것이 건강한 경제적 토대를 만드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며 “디트로이트에는 지금 헬스케어와 푸드 이노베이션 등 다양한 산업 분야가 활성화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최근에는 금융업도 각광받고 있다.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라는 특성으로 인해 자동차 할부금융이나 보험금융 등의 성장이 눈에 띈다.

그중에서도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분야는 헬스케어다. ‘우수한 인재 풀’이라는 강력한 경쟁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디트로이트 인근에 자리한 명문 사립대 미시간대는 규모 면에서 미국 내 가장 큰 의과대를 갖추고 있는 곳이다. 이들을 통해 우수한 의료 인력이 지속적으로 배출되고 있다. 특히 리서치 분야에 강점을 나타내고 있다.

자동차 외에 다양한 산업을 성장시키기 위한 전제 조건이 ‘스타트업 문화’다. 디트로이트의 스타트업 문화가 꽃필 수 있도록 그 허브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 ‘테크타운 디트로이트’다. 2000년 디트로이트의 웨인주립대와 GM·포드 헬스케어 시스템의 후원으로 설립됐고 그 이후 비영리기관으로 독립해 운영 중이다.
디트로이트, ‘자동차 도시’에서 ‘스타트업 요람’으로
지난 10월 12일 테크타운 디트로이트를 찾았다. 과거 GM의 공장으로 쓰이던 건물을 개조해 사용하고 있는데 넓고 탁 트인 코워킹 스페이스를 중심으로 2층과 3층에는 스타트업들이 개별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무실과 회의실 등이 배치돼 있다. 현재 570여 명에 달하는 기업가들이 이곳에서 꿈을 찾고 있다. 기업 수만 해도 100여 개가 넘는다.

재미있는 것은 디트로이트 내의 스타트업뿐만 아니라 이들을 지원하고 육성하는 벤처캐피털(VC)과 액셀러레이터 등이 모두 한 공간에 모여 있다는 점이다. 라리사 리처슨 테크타운디트로이트 협력·공유 공간 매니저는 “물론 우리가 직접 새로운 사업을 꿈꾸는 기업가들에게 인턴십 프로그램이나 인큐베이팅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며 “하지만 대부분은 우리가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이 공간에서 수많은 구성원들이 알아서 소통하고 협력하며 자신들에게 필요한 네트워크를 넓혀 나간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테크타운 디트로이트는 수시로 코워킹 공간에 공짜 베이글을 준비하거나 이벤트를 열어 이곳에 입주한 스타트업들이 네트워크를 넓혀 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고 있다.

리처슨 매니저는 “혁신 DNA가 강한 디트로이트의 스타트업 문화를 실리콘밸리와 비교하려는 사람들이 많지만 우리는 그 색깔이 전혀 다르다”고 말한다.

실리콘밸리는 기본적으로 컴퓨터와 디지털 세계를 기반으로 한 스타트업들이 주류다. 이를 바탕으로 실패를 자산으로 삼는 독특한 문화가 지금의 실리콘밸리를 꽃피웠다. 이에 비해 디트로이트의 창의력은 ‘실제로 무언가를 만드는’ 데 강점이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뚝딱 시제품을 제조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자 강점이다. 스타트업의 창의력이 새로운 모델을 창조하고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디트로이트 스타트업의 창의력은 우리가 일상생활에 부딪히는 문제들 가운데 불편함을 발견하고 이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에 방점이 찍혀있다.

리처슨 매니저는 “전통적으로 제조업을 기반으로 한 디트로이트의 특성이 스타트업에도 그대로 반영돼 있는 것 같다”며 “최근에는 디트로이트의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외부에서도 이곳을 찾아오는 스타트업 기업들이 점차 늘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viva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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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195호(2018.10.22 ~ 2018.10.28)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