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스토리 = '한국판 러스트 벨트' 회생 프로젝트]
- 통영에서 군산까지 1700km 현장 르포
- “추가 구조조정 소식에 하루하루가 조마조마”
“예전엔 서울 부럽지 않았는데…” 잇단 파산에 지역경제 ‘축복’이 ‘악몽’으로
[한경비즈니스(거제·통영·울산·군산)=차완용 기자] 현재 한국의 가장 큰 경제 위협 중 하나는 바로 제조업의 위기다. 특히 국가 기간산업으로 한국 경제와 산업의 버팀목 역할을 해오던 조선·해양 산업의 침체가 심각하다.

단순히 한두 기업의 문제가 아니다. 제대로 돌아가는 조선사가 한 곳도 없다. 파산했거나 대규모 구조조정을 거쳤다. 이들 산업의 위기는 조선·해양 산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파생된 기계·철강 등 관련 산업과 기업이 들어서있던 지역 경제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무너진 지역이 벌써 10여 곳이다. 대표적인 곳이 울산·거제·통영이고 전북 군산도 쓰러졌다. 이 밖에 부산·창원·목포·영암·해남 등의 제조 산업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위기에 직면한 한국 제조업, ‘한국판 러스트 벨트’의 현장을 찾아 부도난 협력 업체 대표, 조선소 관계자, 지역 소상공인, 지역 주민 등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어봤다. 10월 11~13일까지 3일간 기자가 서울에서 출발해 경남 통영·거제 그리고 울산을 거쳐 전북 군산까지 내달린 거리만 1700km에 달했다.

◆ 통영 : 조선소 망하자 모든 것이 멈췄다
“예전엔 서울 부럽지 않았는데…” 잇단 파산에 지역경제 ‘축복’이 ‘악몽’으로
10월 11일 오전 9시, 서울에서 출발해 성동조선소·SPP조선·가야중공업이 있는 안정일반산업단지(안정산단)에 오후 3시쯤 도착했다.

한때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근무하고 생활하던 이 공단 주변에는 노동자들을 위한 작은 도시가 만들어졌다. 식당과 당구장 등 상업근린시설이 140여 개, 아파트·빌라·원룸 등 주거 시설이 수천 가구 들어서 있다.

예전 같았으면 이곳에 입주한 회사 직원과 상인 등으로 활기를 띠었을 테지만 이날 찾은 이 도시는 텅 빈 조선소 작업장을 배경으로 적막감만 감돌았다. 상점 입구 곳곳엔 ‘임대’ 문구가 붙어 있었다.

임대마저 포기한 듯 아예 문을 닫은 채 버려둔 것처럼 보이는 점포가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새로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상가 건물에는 ‘어려울 때가 기회’라는 문구와 함께 임대 안내판을 내건 곳도 있었다. 안정산단 내 유일한 병원 건물도 문을 닫았다.

거리를 다니는 노동자나 주민도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안정산단에 있던 조선소 3곳은 모두 파산했다. 3곳의 조선소 모두 본관 출입구는 쇠사슬에 묶인 채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공장 내부에 덩그러니 방치된 크레인 등 각종 설비를 통해 과거 활황 때의 모습을 언뜻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안정산단 내에서 주유소를 운영하며 지역상인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진태웅 대표는 “안정산단 인근의 상가는 140개였지만 지금 현재 100곳 넘게 문을 닫았다”며 “남아 있는 상가 주인들도 지금 다 떠나려고 준비 중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진 대표는 이어 “이곳 통영의 경제 기반은 조선 산업이 70%, 어업 25%, 관광·서비스가 5% 정도를 차지하는데 70%의 경제가 무너진 셈”이라고 말했다.

진 대표는 통영의 부동산 시장도 최악이라고 말했다. 진 대표는 “안정산단은 오피스텔·원름 등이 80여 동 있었지만 지금 공실률이 90%가 훌쩍 넘는 상황이고 구 시내도 그렇고 죽림 신도시도 집값 하락과 공실이 상당하다”고 설명했다.

진 대표의 이야기를 들은 후 안정산단 인근을 둘러봤다. 오후 6시 퇴근 시간대였지만 가야중공업·SPP조선·성동조선으로 들어가는 왕복 6차로의 도로를 오가는 차량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 지역을 운행을 있는 버스 내부 역시 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안정공단에는 3곳의 편의점이 들어서 있다. 3곳 모두 영업을 이어 가고 있어 상황이 어떤지 물었다. 공단 주 출입구 앞쪽에 있는 편의점은 2~3년 전만 해도 사람이 몰리는 점심·저녁시간에는 점원 3명이 정신없이 물건을 계산했지만 지금은 그때에 비해 매출이 10분의 1도 넘게 줄어 점원을 모두 내보냈다고 했다.

공단 원룸촌 주변에 자리 잡은 편의점 사장은 기자를 보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이 편의점 사장은 “여기 편의점이 10년 됐는데 2년 전까지만 해도 통영시 전체에서 매출 1위를 하던 매장이었는데 지금은 전국 꼴찌 매장이 됐다”며 “하루 종일 담배 몇 갑 팔리는 것이 전부여서 곧 폐업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안정산단을 벗어나 21세기조선·삼호조선·신아SB가 있던 미륵도로 향했다. 퇴근 시간과 저녁 식사 시간이었지만 도로는 한산했고 시내 가게들 대부분 손님이 없었다. 터미널 주변의 시장 역시 활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통영 굴과 꿀빵, 충무김밥 등으로 유명한 통영이었지만 최소한 이날만큼은 관광지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신아SB 부지가 있던 미륵도에 도착했다. 현재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조선 산업 현장을 기반으로 한 관광지로의 도시 재생 사업을 발표하고 부지 정리 작업에 한창이다. 하지만 이곳 역시 도로변을 주변으로 형성된 가게들이 대부분 문을 닫은 상태였다.

저녁 식사와 신도시 취재를 위해 죽림으로 자리를 옮겼다. 신도시답게 높은 아파트가 즐비했고 상업시설 역시 잘 꾸며져 있었다. 하지만 아파트마다 불이 꺼진 가구가 상당했고 식당 역시 문을 닫은 곳이 세 집 건너 한 곳이었다.

식당에서 일하고 있던 조선족 직원과 이야기를 나눠 봤다. 그는 2년 전까지만 해도 성동조선소에서 남편과 함께 근무했지만 회사 일거리가 줄어들면서 이곳 식당으로 직장을 옮겼다고 했다.

남편은 일자리를 찾아 부산 건설 현장에 갔고 같이 일하던 외국인 노동자들 역시 대부분 통영을 떠났다고 했다. 그나마 자신은 2년 전 성동을 나와 일찍 직장을 구한 것이고 많은 노동자들이 통영 가게 등에서 일자리를 찾으려고 하지만 문을 닫는 가게가 많아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예전엔 서울 부럽지 않았는데…” 잇단 파산에 지역경제 ‘축복’이 ‘악몽’으로
이날 잠시나마 둘러본 통영의 경기는 최악이었다. 기업·고용·가계·부동산 등 무엇 하나 좋은 것이 없다. 실제로 통영은 지역 내에 있는 모든 조선사가 무너지면서 협력 업체와 소규모 기계·공정 공업단지도 줄줄이 폐업했다.

이순신공원 주변에 있는 소규모 기계·공정 공업단지에는 두 집 건너 한 집이 문을 닫은 상황이다. 일자리가 없어지자 통영시 인구도 줄어드는 추세다. 작년 말을 기준으로 최근 3년간 통영시로 7만1112명 전입해 온 반면 7만5142명이 떠났다.

◆ 거제 : 조선은 버티지만 지역 경제는 무너졌다
“예전엔 서울 부럽지 않았는데…” 잇단 파산에 지역경제 ‘축복’이 ‘악몽’으로
10월 12일 오전 7시. 해가 막 고개를 내민 시간, 대우조선해양 거제 옥포조선소 서문은 출근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모두가 거제에서 가장 멋진 정장인 대우조선해양의 회색 작업복을 입고 있다.

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횡단보도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빽빽한 인파가 끊임없이 길을 건넜고 통근 버스가 줄줄이 통과했다.

작년부터 조선업 구조조정이 본격화했고 올해도 그에 못지않은 인력 구조조정이 예상된 때문일까. 출근길 웃는 표정을 좀처럼 볼 수 없었다. 동료를 만나도 반갑게 인사하거나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전 7시 30분이 넘자 출근 인파가 부쩍 줄었다. 서울의 오피스 직장인들은 이제 막 러시아워 출근 전쟁을 치를 시간인데 거제 조선소는 이미 상황 종료였다.

아침 식사를 위해 찾은 서문 앞 국밥집. 24시간 운영하는 이 가게는 대우조선해양 직원의 사랑방이다. 야근 노동자들의 퇴근(아침) 식사, 정시 출근자들의 퇴근(저녁) 식사를 제공한다.

야근 노동자들의 식사를 한바탕 치러낸 식당 테이블에는 이미 소주병이 너저분하게 놓여 있다. 자리를 잡고 국밥 한 그릇을 시켰다. 식사를 하며 아주머니에게 거제의 분위기를 물어봤다.

10년 넘게 일했다는 아주머니는 “경기가 말도 못한다”며 “예전의 거제가 아니다”고 짧게 말했다.

겉보기에는 평상시와 다름없고 최근 대우조선해양의 실적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그래도 거제는 통영이나 울산에 비해 상황이 좋지 않느냐”고 재차 물어봤다.

이내 아주머니는 “직원이 절반 가까이 나갔다”며 “월급도 깎이고 예전에 한 명당 국밥 한 그릇씩 놓고 수육까지 먹으며 술 한잔씩 했는데 지금은 3명이서 국밥 2개 시켜 소주 안주로 먹는다”고 말했다.

이때 주인아주머니가 옆에서 거들었다. “기자 양반, 여기가 예전엔 서울 부럽지 않았어. 그런데 지금 여기는 다 죽을 맛이야. 조선소만 잘되면 뭐해, 직원 다 자르고 월급 깎고 결국 회사만 살고 여기 지역 사람들은 입에 풀칠하고 있는 셈이야.”

두 아주머니의 말처럼 거제의 경기 침체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두 조선소에 종사하는 노동자만 3년 사이 3만9000여 명이 줄고 사외 협력 업체 노동자까지 더하면 모두 4만2000여 명이 실직자가 된 거제다.

식사를 마친 후 거제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여러 이야기를 주워들었다. 그중 귀를 솔깃하게 한 것은 거제도 조선소에 올 연말 추가 구조조정이 있을지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삼성중공업 소속 김 모 씨는 “요즘 하루하루가 조마조마하다”며 “몇 번의 구조조정 속에서도 살아남았는데 행여나 올 연말에 구조조정 명단에 들어가면 앞날이 막막하다”고 걱정했다.

대우조선해양에 다니는 최 모 씨는 “구조조정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제 의욕도 떨어지고 지쳤다”며 “잘리면 어쩌겠어 장사나 해보지”라고 웃어넘겼다.

추가 구조조정 이야기가 흉흉하게 돌고 있지만 거제에서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에 다니는 직원들은 그나마 상황이 좋은 편이다. 사외 협력 업체들이 모여 있는 공단 지역은 초토화다.

사등면에 자리한 성내조선기자재협동화공단은 약 11만2000㎡ 규모로 현장에서 조선 블록을 만들던 노동자가 1000명도 넘었지만 현재 단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공단에 있던 업체들이 재작년부터 문을 닫기 시작해 올해까지 모두 4곳이 문을 닫고 공단 관리 업무를 보는 업체 1곳만 직원 4명이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문을 닫은 업체들은 언젠가 다시 공장을 재가동할 수 있는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근 다른 공단이나 업체들을 둘러봐도 근근이 버티고 있지만 사정이 어려운 것은 매한가지였다.

이는 연초면 오비공단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량을 받지 못해 지난해 문을 닫은 한 협력 업체는 현재 관리직 직원 3명만 회사에 출근하며 혹시나 떨어질지 모른 수주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 업체의 한 관계자는 “작년에 손실을 봤고 올해도 상황이 좋지 않다. 물량이 워낙 없어 어느 업체라고 사정이 나은 곳도 없다”고 말했다.

거제의 지역 경제 역시 최악의 상황이었다. 조선소 노동자들이 떠나간 지역 경제는 직격탄을 맞은 분위기다. 거제는 인구 25만여 명 중 70% 이상이 조선업으로 먹고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제 중서부권에 자리한 삼성중공업 인근 고현동·장평동·사등면과 동부권의 대우조선 인근 아주동·옥포동·장승포동 등 조선소 주변 상권부터 외곽까지 불황의 그늘이 짙다.

지역 중심 상권인 고현동만 하더라도 식당과 술집·노래방·옷가게 등이 즐비하지만 손님이 한 명도 없는 업소가 절반도 넘어 보였다. 문을 닫은 가게에는 ‘상가 임대’, ‘권리금 없음’, ‘기술 전수’ 등 문구가 붙어 있다.

식당이나 술집에는 ‘맥주·소주 2000원’, 횟집은 ‘회 대자 8만원’, 모텔 ‘방값 3만원’, 유흥주점 ‘양주 풀 세팅 10만원’ 등 가게마다 가격 인하를 알리는 현수막을 내걸고 있었다.

고현동에서 식당을 하는 송 모 씨는 “하루 5만~ 10만원어치를 팔기도 힘들다”며 “중심가는 20~30대들이 그나마 몰려 사정이 나은데 조선소 사람들을 상대하는 가게는 대부분 전멸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아주동에서 중국집을 하는 김 모 씨는 “하루에 짜장면 10그릇 팔기도 어렵다”며 “상가 주인에게 가게를 빼겠다고 이야기해 놓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 울산 : 서울 강남 부럽지 않았는데 일자리가 없다
“예전엔 서울 부럽지 않았는데…” 잇단 파산에 지역경제 ‘축복’이 ‘악몽’으로
10월 12일 저녁, 울산 동구로 자리를 옮겼다. 거제에서 약 2시간 거리. 울산 동구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난 9월 울산 지역 경제의 한 축을 차지하는 현대중공업이 유휴 인력 문제 해소를 위해 창사 이후 네 번째 희망퇴직을 단행한 영향인 듯했다.

올해만 벌써 두 번째다. 현대중공업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된 울산 동구는 일감 수주 절벽에 따른 회사의 잇단 구조조정으로 인구 유출이 가속화되면서 상권 침체가 심각했다.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찾은 식당의 주인은 “지난해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 없다는 생각에 ‘이번 고비만 넘자는 심정으로 버텼는데 이제는 몸도 마음도 지쳤다”며 “그나마 나는 오래 버틴 것”이라고 말했다.

식사를 마치고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숙소가 밀집해 있는 원룸촌을 돌아다니다 보니 ‘임대’, ‘방 있음’, ‘즉시 입주 가능’이라는 안내 전단을 여기저기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이 지역 원룸의 공실률은 60%에 달한다. 인근 공인중개업소 관계자는 “원룸 건물의 경매가도 한때 7억원을 호가했지만 현재는 4억500만원 선으로 뚝 떨어졌다”고 말했다.

원룸가도 인구 유출의 직격탄을 맞았다. 조선업 호황기 당시 방어동을 비롯한 동구 지역 원룸은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50만원 정도였다. 하지만 지난해에는 월세가 30만원 정도로 떨어졌고 올해부터는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는 20만원 정도로 내려갔다. 부동산업계는 동구 지역 원룸 공실률이 현재 40% 가까운 것으로 추정했다.

한 공인중개사는 “요즘은 보증금을 받지 않고 월세만 받는 원룸 주인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폐업하는 점포들이 계속 늘어나지만 수요가 없어 매매나 임차 계약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동구의 주택 매매도 줄었다. 2014년 총 4345건이었던 주택 매매 건수는 지난해 2506건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동구의 부동산 시장이 한파를 겪는 것은 조선 업체 구조조정에 따른 인구 감소가 결정적 원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실제로 2015년 이후 퇴직하거나 일자리를 잃은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 협력 업체 노동자는 2만7000여 명에 달한다.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떠나면서 동구의 인구가 함께 줄어들었다. 울산시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동구의 인구는 17만3096명으로 1990년대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2016년 6월부터 19개월 연속 감소 추세다.

가장 인구가 많았던 1995년 19만2007명과 비교해서는 1만8911명(9.8%)이 감소한 것이다. 내국인 인구도 16만9605명으로 1990년대 이후 처음으로 17만 명 미만으로 떨어졌다.

인구 유출이 가속화되면서 퇴근 시간 이후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들로 넘쳐나던 식당가는 이제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자주 찾던 방어동 외국인 특화거리에는 ‘점포임대’ 또는 ‘임대문의’라고 쓰인 안내 문구가 붙어 있는 가게가 수두룩했다.

장기적인 지역 경기 침체의 늪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던 지역 소상공인들은 또다시 들려오는 구조조정 소식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내년 상반기에는 조선업 경기가 회복될 것이라는 전망에 기댔던 희망은 더욱 깊은 상실감으로 되돌아왔다.

울산 동구 상인연합회 이영필 회장은 “대부분 가게의 매출이 바닥인 상황에서 또다시 회사가 구조조정을 한다니 막막하다”며 “상인들이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다”고 토로했다. 이 회장은 “정부 관계자들에게 어려움을 호소해도 실질적 도움을 주지 않으니 답답할 뿐”이라고 말했다.

◆ 군산 : 사라진 70%의 일자리, 도망치는 노동자들
“예전엔 서울 부럽지 않았는데…” 잇단 파산에 지역경제 ‘축복’이 ‘악몽’으로
10월 13일,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마지막 ‘러스트 벨트’ 전라북도 군산을 방문했다. 이곳은 지금까지 들른 지역보다 상황이 훨씬 심각한 곳이다. 지역 경제의 75% 이상을 차지하는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와 한국GM 군산공장이 지난해와 올해 차례로 문을 닫았다.

군산조선소의 폐업조차 감당하지 못한 상황에 한국GM까지 철수하자 군산의 경제 자체가 무너져 내렸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월 결제를 하는 식대, 원룸 임대료 등을 내지 않기 위해 야반도주했고 소규모 공장들은 잇따라 파산 신청을 하며 인건비와 인력사무소 소개비 등을 지불하지 않았다.

결국 군산 지역 경제 사슬에서 최하위층에 있는 노동자와 자영업자들 역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먼저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를 찾아갔다. 180만㎡(약 55만 평)에 달하는 넓은 부지의 이곳의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북문과 서문도 마찬가지였다.

경비원 한 명이 외롭게 동문을 지키며 혹시 모를 외부 출입을 차단하고 있었다. 오가는 차량은 찾아보기 어렵고 출퇴근 차량으로 가득했던 주차장은 텅 비었다. 야드를 누볐던 장비들은 녹이 슬었고 조선소 주변은 유령도시처럼 변했다.

군산조선소는 지난해 7월 가동이 중단됐다. 이곳은 조선 업황이 한창 좋았던 2008년 건립됐다. 사업비 1조2000억원이 투입된 초대형 조선소로 25만 톤급 선박 4척을 한꺼번에 건조할 수 있는 규모였지만 채 10년을 버티지 못했다. 가동이 중단되면서 약 5000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협력 업체 중 100곳이 넘는 공장이 문을 닫았다.

이후 약 15분 거리에 있는 한국GM 군산공장을 둘러봤다. 이곳도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처럼 정문 출입문에 철제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다. 경비 직원 2명은 기자를 경계하듯 계속 바라보고 있었고 분위기를 묻는 질문에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말할 수도 없다”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예전엔 서울 부럽지 않았는데…” 잇단 파산에 지역경제 ‘축복’이 ‘악몽’으로
군산공장을 벗어나 3km쯤 떨어진 오식도동을 찾았다. 2010년 군산조선소가 본격 가동되고 GM 군산공장이 호황일 때 노동자들의 숙소이자 상권으로 활기찼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거리를 다니는 노동자 몇몇만 보이고 적막한 도시로 변했다.

이곳에서 만난 지역민 최순미 씨는 “군산은 지금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면서 “주변 협력 업체, 이곳만을 바라보고 지은 빌라 건물주들, 음식점 다 망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인근에 있는 공인중개업소를 찾아가 보니 상황이 심각했다. 상가와 원룸, 상업 시설 곳곳에 임대·매매 문구가 붙어 있지만 거래가 거의 전무한 상황이다.

공인중개소 대표는 “이곳에 들어선 전체 510여 채 원룸 가운데 75% 정도가 비었고 공실이 계속 늘고 있다”며 “3년 전 30만∼40만원이던 임대료가 이제는 15만원까지 떨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급매 원룸 건물이 엄청 나왔는데 예전에 5억원이던 가격이 지난 3월 3억원으로 떨어지더니 지금은 2억 5000만원까지 내려갔다”고 설명했다.

인파 왕래가 가장 잦은 길거리 한 건물은 가게 7곳 가운데 4곳이 비었고 이 중 2곳은 1년 넘게 주인을 찾지 못한 상태다. 한국GM 부품업체 직원과 외국인 노동자가 많이 이용했다는 길 건너편 식당은 손님이 줄고 밥 배달마저 끊기자 자진 폐업했고 옆의 작은 술집도 엊그제 임대 계약이 만료된 뒤 스스로 문을 닫았다.

이날 낮 12시께 좌석 30여 석 가운데 네 좌석만 손님이 자리한 오식도동 한 식당 주인은 “장사가 안 돼 어려운데 나쁜 장면이 나가면 더 안 된다”며 사진 촬영을 못하게 했다.

경매에 나온 공장들도 늘고 있다. 풍력 터빈 블레이드를 제조하던 A사 군산공장(3000평)은 100억원이 넘는 감정가를 받았지만 1년이 지나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입찰액도 30억원대로 떨어졌다.

군산 시내도 경기는 바닥이다. 군산 내에서 가장 번화가인 수송동의 먹자골목은 80% 이상이 임대 물건으로 나왔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곳은 한때 바닥 권리금이 3000만원 정도로 형성됐지만 지금은 권리금이 사라졌다. 한 고깃집 사장은 “길에 사람이 없어 더 이상 영업하기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상가의 손바뀜도 심하게 일어나고 있다. 권리금이 없고 퇴직자가 많다 보니 퇴직금을 가지고 장사에 도전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다. 하지만 경험이 없다 보니 결국 프랜차이즈 찾게 되고 경기가 좋지 않아 금세 폐업하는 악순환의 반복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현재 군산은 경기가 최악이지만 프랜차이즈업 만큼은 호황을 누리고 있다.

취재 중 만난 음식점 상인은 “군산이 가지고 있던 가장 큰 혜택이 가장 큰 문제가 됐다”며 “현대중공업과 한국GM이라는 절대적 경제가 무너지자 군산 지역의 자생력 한계가 드러난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떠난 배는 어쩔 수 없고 이제라도 윗분들이 전략을 잘 세워 옆 동네 전주처럼 특색 있는 관광지도 만들고 정부 기관 이전도 추진해 지역이 자생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통영에서 만난 사람 성동조선을 평생직장으로 여긴 노동자의 후회- “푼돈 벌고 목돈 날렸다”
성동조선소에서 퇴직한 이택진(가명) 씨는 지금 사는 집이 너무 싫다. 하지만 떠나지 못한다. 집이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팔아도 50% 손해인데도….

2009년 당시 나이 29세, 부산 건설사에서 일했던 그는 결혼을 앞두고 직종 변경을 결심했다. 책임져야 할 가족이 생긴다는 생각에 안정되고 처우가 좋은 조선 산업으로 옮기기로 했다.

그러던 차에 성동조선으로부터 제의가 들어왔다.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연봉도 높았고 부산보다 통영의 집값도 저렴해 내 집 마련이 가능해 보였다. 여기에 당시 부동산 경기는 바닥이었고 조선업은 호황이었다.

이윽고 성동조선에 출근한 지 1년째, 회사 근처에 새로 지은 통영현대성우오스타 114A㎡ 아파트를 분양 받았다. 2억원이 넘는 분양가가 조금 부담되긴 했지만 부인과 함께 태어날 아이를 깨끗한 아파트에서 키우고 싶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2014년 조선 산업의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인근의 소형 조선사들이 문을 닫고 세계 최고의 조선소들이 적자 수주에 시달렸다. 중형 조선 수주 1위 기업으로 튼튼해 걱정 없다던 회사는 2년 뒤인 2016년 휘청거렸고 결국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이때라도 이직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사했으면 그나마 집값을 조금만 손해봤을 텐데 선배가 곧 안정될 것이라고 조금 더 지켜보라고 해 버틴 것이 지금 이 지경이 됐다. 현재 이 씨가 살고 있는 아파트 시세는 1억원이다. 그런데 팔리지 않는다.

집을 내놓은 지 벌써 1년이 넘었지만 매수자가 전혀 없다. 그는 현재 거제에 있는 조그만 건축회사까지 자동차를 이용해 출퇴근하고 있다. 이 씨는 퇴근 후 아파트 단지에 들어설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한다. “푼돈 벌고 목돈을 날렸구나.”
◆ 군산에서 만난 사람 식당 주인의 눈물- 5000만원어치 밥값 떼어먹고 세운 공장은 잘만 돌아간다
군산 오식도동에서 식당을 하는 이들 중에는 공단의 공장으로부터 밥값을 떼어먹힌 이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B식당을 운영하는 윤성심(가명) 씨의 사연이 압권이다.

윤 씨는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2월까지 CJ제일제당 군산 양어 사료 공장 증축 공사 현장의 하청업체인 유암ENC 공사 현장 인부(50여 명)들의 아침 식사와 점심·간식을 제공했다.

식당에서 일하는 언니와 함께 새벽 4시에 출근해 열심히 반찬을 만들고 국을 끓였다. 혹시나 찬이 부실하다는 이야기가 나올까봐 나름 신경도 썼다. 식재료비만 5000만원 들었다. 직접 김밥·샌드위치 등을 만들어 공사 현장에 간식도 배달했다.

그런데 공사를 맡았던 이 업체가 공사 완료 1주일을 남기고 돌연 파산 신청을 했다. 식대를 받기 위해 찾아간 사무실은 이미 인력사무소에서 한바탕 휩쓸고 갔다. 식대를 받기 위해 소송을 걸었다.

법원으로부터 지급명령서도 받았다. 그런데 도무지 돈을 받을 방법이 없다. 부인과는 이혼했고 모든 재산은 부인 명의로 돼있고 이 대표는 빈털터리였다. 결국 공사를 맡긴 CJ제일제당 군산공장을 찾아갔다.

CJ 측은 우암건설에 시공을 맡겼다고 했다. 우암건설은 또 은성이라는 업체에 하청을 줬다고 했고 은성은 유암ENC에 하청을 준 것은 맞지만 유암ENC가 공사를 제대로 안 해 손해가 막심하다고 오히려 화를 냈다.

윤 씨는 기자를 붙잡고 하소연했다. “세상에 이런 나쁜 사람이 있습디다. 어떻게 우리 같은 밑바닥 서민의 뒤통수를 칠까요. 사기를 치고 돈을 떼어먹으려면 가진 사람한테 해야지, 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우리들을 괴롭힐까요.”

cw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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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195호(2018.10.22 ~ 2018.10.28)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