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생’이 뜨겁습니다. 서울스퀘어에 마련된 세트장도 화제입니다.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세트장까지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다름 아닌 ‘현실성’에 있습니다. 촬영용 비품에는 ‘원인터내셔날’의 비표까지 붙어 있습니다. 웹툰 연재 당시에도 직장인들이 회사에서 겪는 일상과 그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감정의 묘사가 거의 하이퍼리얼리즘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았죠.

한동안 출판계를 휩쓴 기획 도서들은 일상을 박차고 나간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잘 뜯어보면 일종의 패턴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개 잘 다니던 직장을, 혹은 잘나가던 자신의 일을 때려치우고 긴 여행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죠. 문득 자신이 직장이라는 공간에서, 일이라는 현장에서 소진되고 있다고 느낍니다. 가족과 직장 상사, 지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멋지게 사표를 던집니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오지나 화려한 대도시로 떠납니다. 여행을 하면서 새롭게 자아를 발견합니다. 이런 과정을 블로그나 SNS 등의 매체에 올리기도 하고요. 그러다 출판기획자나 에디터의 눈에 띄는 순간 책으로 출간됩니다.

여기서 여행을 ‘취미로 시작한 새로운 일’, 또는 ‘귀농’이나 ‘귀촌’으로 바꾸어도 됩니다. 이런 책들의 변주가 출판계에 가득합니다. 멘토의 인기와 강연 열풍 역시 이와 같은 출판계의 흐름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렇게 남들과 다른 길을 걸은 사람들이 멘토가 되고 강연장의 연사가 되곤 하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일상을 탈출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따르게 된 것이지요.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대리만족’을 콘텐츠화 해서 사고파는 것이 출판계의 흐름 중 하나였던 셈입니다.

‘미생’의 현실성과 그 인기가 반가운 이유가 있습니다. 직장을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 삶의 현장으로 애써 편입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한동안 출판계에서는 주목 받지 못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탈출한 사람들을 폄하하려거나 그들의 시도가 가치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직장이라는 현실 속에 남아서, 버티며 분투하는 사람들의 삶 역시 가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사실 잠재적 직장인들인 대학생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나오는 책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입시지옥에서 벗어나 남다른 루트로 해외에 있는 대학에서 학위를 받습니다. 남다른 경험을 통해서 비교 우위의 스펙을 쌓고 남다른 일을 하게 되지요. 대학생 독자들 사이에서도 이런 책들이 인기를 얻어왔습니다.

자신만의 일을 찾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누구나 그렇게 살 수는 없죠.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며 살게 됩니다. 그 속에서 열심히 살고자 노력하는 중이라면 굳이 ‘남다른’ 길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도 부끄럽거나 주눅들 이유가 없습니다. ‘미생’이 고마운 이유는 열심히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다루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삶을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모든 미생들을 응원합니다. 바로 당신!


미생
[허영진의 빵 굽는 인문학] ‘미생’이 고마운 이유
윤태호 | 위즈덤 하우스

동시대 직장 모습에 가장 근접한 설정과 묘사로 화제가 되었던 웹툰. 열한 살에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들어가 프로기사를 목표로 살아온 ‘장그래’라는 청년이 주인공이다. 입단에 실패한 장그래가 단 한 번도 고려하지 않았던 ‘회사’라는 세상에 편입되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을 그렸다. 경쟁과 상생이 공존하는 직장 생활의 면면을 마치 바둑 묘수풀이 하듯 실감나게 보여 준다.



눈에 띄는 신간

[허영진의 빵 굽는 인문학] ‘미생’이 고마운 이유
어떡하지, 나?

호소가와 텐텐 | 엔트리

대책 없이 학교를 졸업한 텐텐은 부모님의 눈치에 못 이겨 취직한다. 취직 후에도 텐텐은 여전히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라는 고민을 한다. 책은 요령 없이 서툴게 살고 있는 텐텐을 보여준다. 읽다 보면 고민의 끈을 놓지 않고 자신과 진지하게 마주하고 있는 텐텐을 만나게 된다. 방황하는 청춘에게 ‘끊임없는 고민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며 살가운 응원을 보내는 책.



[허영진의 빵 굽는 인문학] ‘미생’이 고마운 이유
시대의 말 욕망의 문장

천정환 | 마음산책

책의 부제대로 ‘123편 잡지 창간사로 읽는 한국 현대 문화사’다. 1945년부터 21세기까지 반세기를 훌쩍 뛰어넘는 시간 동안 발행된 126종의 잡지와 123편의 창간사를 살핀다. 10년 단위로 시대를 구분하고 눈여겨봐야 할 문제적 잡지들을 가려냈다. 창간사에 투영된 당시 사회의 진면목을 끄집어내고, 읽고 쓴다는 것의 참의미를 찾기 위해 애쓴 대목이 돋보인다.



[허영진의 빵 굽는 인문학] ‘미생’이 고마운 이유
세계사를 바꾼 헤드라인 100

제임스 말로니 | 행성:B잎새

170여 년간 근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100개의 헤드라인을 소개한 책. 언론인 출신의 저자는 헤드라인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지닌다고 이야기한다. 단순하게 헤드라인과 기사를 훑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언론이나 대중들의 평가를 함께 소개한다. 이를 통해 세계사의 큰 흐름뿐 아니라 미시적 부분까지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허영진의 빵 굽는 인문학] ‘미생’이 고마운 이유
허영진(교보문고 리딩트리)

책이 피가 되고 살이 된다는 걸 아직도 믿는 서점 직원. 인문학이 우리를 구원의 언저리쯤엔 데려다 주리란 희망을 품고 있다.




제공 : 교보문고 리딩트리 (http://www.facebook.com/kyobobook.ReadingTr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