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흥원 페루 찬차마요시장(市長)이 한국 청춘들에게
도시라고 해야 전체 인구는 20만 명에 불과하다. 서울 강남구 인구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규모. 하지만 땅의 크기는 강원도 전체 면적과 맞먹는다. 고만고만한 마을들이 차로 가도 2시간씩 걸리는 거리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넓은 땅에 적은 인구, 커피·오렌지·파인애플 같은 열대작물 생산이 주요 산업인 남미의 낙후된 도시 찬차마요(Chanchamayo). 대한민국과는 도무지 연결고리라곤 없는 먼 나라 얘기 같지만 이곳 민선시장의 이름을 들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곳 사람들이 ‘마리오 정(Mario Jung)’이라고 부르는 시장. 한국 이름 ‘정흥원’이다.‘찬 차마요’란 이름이 낯설다. 사람 이름인지, 지명인지도 아리송하다. 남아메리카의 페루. 수도인 리마에서 320km 떨어진 곳에 후닌(Junin)주(州)가 자리하고 있고, 이곳에 속한 몇몇 도시 중 하나가 바로 찬차마요시(市)다.
지난 2010년 찬차마요시장으로 당선된 정흥원 시장은 남미 이민 역사 106년 만에 처음 탄생한 한인 시장이다. 인구 20만에 불과한 도시는 물론이고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 비교적 교민이 많은 나라에서도 한국 출신 시장은 그가 유일무이하다.
학력·학벌이 화려하지도 않고, 페루 정가에 끈이 닿은 것도 아니었으며, 이전까지 정치에 발을 담근 적도 없는 이가 지역의 유력 정치인을 두 배 가까운 득표율로 물리친 건 페루에서도 큰 화제를 모은 뉴스였다.
“주민들이 ‘네가 나가야 한다’며 떠밀다시피 추천했어요. 전임 시장은 독신의 여성 선교사였죠. 너무 오래 했다는 인식도 많았고, 아무래도 가족이 없다 보니 시민들의 어려움과 아픔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어요. 가족에 대한 애착이나 어려운 사람의 고통은 겪어보지 않고는 알기 힘들죠.”
전임 시장과 그를 제외해도 시장직에 도전한 후보만 8명이었다. 하지만 ‘마리오 정’을 외치는 시민들은 유세 현장마다 인산인해를 이뤘다. 10명의 후보가 난립한 가운데 얻은 득표율 42%는 그는 물론 지역에서도 놀라운 결과였다. 찬차마요에 뿌리를 내린 지 10년 만에 어느새 그는 ‘아픈 이들의 대부’가 돼 있었다.
정 시장이 처음 남미 땅에 발을 디딘 건 1986년의 아르헨티나였다. 한국에서 보세 스웨터 수출 공장을 하던 그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사랑하는 큰딸을 병으로 잃은 것. 주체하기 힘든 슬픔으로 택한 건 이민이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교민 수만 3만 명에 이르렀고, 투자 이민도 활발하게 전개하던 기회의 땅이었다. 사업은 비교적 순탄했다. 하지만 아픔은 이국땅에서도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막내아들을 잃고 말았다.
“교회, 식당, 학교… 어딜 가도 아이 친구들이 있었어요. 더 이상 아르헨티나에서 살려야 살 수가 없더군요. 그렇게 1996년에 페루로 갔어요. 아는 사람도 없고, 아이의 흔적도 없는 곳에서 새로 시작하자 결심했죠. 하나 남은 딸아이는 페루에서 함께 살고 있어요. 자동차 수입 사업을 크게 벌이고 있죠. 아내는 콩팥 이식수술을 받아 미국에서 요양 중입니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마음만큼 참담한 일이 또 있을까. 하지만 정 시장은 “그동안 운명이니 생각하려 노력했고, 이젠 많이 홀가분해졌다”고 말했다. 심장을 찢는 듯한 아픔을 이겨낸 건 단단히 먹은 마음가짐 덕분만은 아니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 치료비는커녕 병원 갈 차비도 없을 만큼 어려운 이들이 언젠가부터 항상 그를 찾아왔다.
“6·25 이후 너무 가난하게 살았어요. 어릴 땐 사흘씩 굶기도 했죠. 자식을 잃은 슬픔까지 더하니, 주변의 어렵고 소외된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겠더군요. 그렇게 한두 명씩 돕기 시작하다 보니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시민들 사이에선 어느새 ‘마리오 정을 찾으면 도움받을 수 있다’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산사태로 모든 것을 잃은 150명의 이웃에게 먹거리를 대주고, 큰 교통사고로 머리의 반이 사라진 사람에게는 치료비를 내줬다. 졸업생이 나오게 마련인 연말이면 학급 전체의 대부(代父)가 돼 수학여행 경비며 졸업기념품 등을 지원했다. 찾아오는 이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 없어 여의치 않을 때는 병원 검사비, 하다못해 병원 갈 차비라도 손에 쥐어 보냈다.
우리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경우지만, 선행이 소문나면서부턴 지역 라디오 방송국 기자들도 도움이 필요할 때 방송을 통해 마리오 정을 찾았다.
“한번은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트럭에 부딪혀 머리를 크게 다친 환자와 가족이 찾아왔어요. 머리의 반이 이미 날아간 상태였죠. 3시간 거리에 뇌 수술하는 병원이 있어 바로 돈을 입금한 후 앰뷸런스를 불렀어요. 지금은 수술과 치료가 잘 끝나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죠. 시청에 취직도 시켜줬어요. 제2의 인생을 살게 된 경우죠.”
시장이 된 지금도 청사에 있는 그의 집무실 앞에는 도움의 손길을 간절히 바라는 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아이가 아픈 사람, 큰 사고를 당한 사람부터 시작해 별의별 사람들이 매일 정 시장을 찾아온다.
“비서가 사정을 듣고 전해주면 그냥 가라고 할 수도 없어요. 도울 수 있는 한도 안에서 여러 사람을 돕자는 생각입니다. 밑에 직원들 찾아가봐야 별 도움도 안 되고, 제게 오면 다만 10원이라도 받아가는 걸 아니 다 제게만 오는 거예요. 사실 피곤하죠. 그렇다고 싫은데 억지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그저 평생에 몸에 밴 일이려니 생각하며 돕고 있어요.”
2013년은 ‘빈민의 대부’ 정흥원이 아닌, 찬차마요시장 정흥원으로서 임기 중반을 넘는 분수령이다. 시는 물론 국가 전체의 인프라가 열악한 사정이다 보니 “이렇다 할 치적이 아직 없다”는 그의 얘기에도 수긍이 간다. 정 시장이 취임 후 가장 역점을 두는 사업 역시 기본 인프라 정비. 도로를 닦고 상하수도 시설을 개선하고, 병원과 체육관 등을 짓는 일이다.
“아마존강의 오염이 심각한 수준이에요. 집이나 농장에서 나온 하수가 그대로 강물로 흘러들기 때문이죠. 상수보다 하수 시설이 더 급한 이유입니다. 찬차마요뿐 아니라 페루 전체가 하수 시설이 없다고 보시면 돼요.”
정 시장의 국적은 여전히 대한민국이다. 한국 출신이 아닌 한국인 시장으로서 그가 지키는 시정의 제일 원칙은 ‘약속을 지키는 시장’이다. 선거 유세 때도 “나는 한국인이다. 다른 마음, 다른 눈을 가지고 있다. 한국 사람은 한 번 한다면 하고, 한 번 뱉은 말은 책임질 줄 안다”고 설득했다. “코리아노는 역시 다르다”는 말은 정 시장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이다.
“한국 정부와 코이카에서 300만 달러를 들여 빈민가에 병원을 지어주기로 했어요. 시 예산으로 200만 달러 규모의 체육관도 짓고 있죠. 그동안 변변한 경기장 하나 없었거든요. 서울시의 도움으로 상하수도 기술 지원도 협의 중입니다. 찬차마요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시 전체가 경제적·문화적 혜택을 받게끔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 한국인이 아니었다면 기대하기 어려운 일들이죠. 시장이라는 지위에 올랐지만, 어려운 이들을 돕고 싶은 마음에는 변함이 없어요. 오히려 더 많은 시민들을 위해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쁠 따름이죠.”
낙후된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일도 시장이 감당해야 할 큰 임무 중 하나다. 찬차마요는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대표 작물이 바로 커피. 하지만 정부 차원에서도 농업과 수출 활성화에 대한 대책이 전무하다시피 해 질 좋은 상품으로도 여전히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렌지 같은 작물은 바닥에 떨어져 썩을 만큼 남아돌아도 수출이 안 돼요. 도로가 닦여 있지 않아 운송비가 더 들기 때문이죠. 주산물은 역시 커피인데, 이마저도 별다른 지원이 없어요. 찬차마요는 커피 재배에 있어서만큼은 천혜의 환경이에요. 2004년에는 프랑스에서 열린 세계 커피품질 경연대회에서 금상을 받기도 했죠.”
연평균 26℃, 우기와 건기로 구분되는 날씨, 해발 1500~2000m의 고지대 재배, 알맞은 습도와 일조량 등 찬차마요 커피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품질을 자랑한다. 문제는 이를 생산해내는 농가의 수익이 형편없는 수준이라는 것. 정 시장은 다시 한 번 고국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지난 5월에 페루 대통령과 함께 25년 만에 고국을 찾았어요. 상하수도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박원순 시장을 만나는 게 가장 큰 방한 목적이었죠. 그 무렵 한 방송사에서 제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내보냈는데, 이걸 보고 이영덕 한솥도시락 사장께서 직접 전화를 주셨어요. ‘도움을 드리고 싶다’는 말씀이셨죠.”
한국을 떠난 지 한 달 후 다시 한 번 연락이 닿았다. ‘도와주실 게 경제적인 것밖에 더 있겠느냐’는 생각에 커피 이야기를 꺼냈다. 마침 커피와 이를 통한 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이 사장도 흔쾌히 응했다. 품질 확인을 위해 직원 두 명이 직접 찬차마요를 찾기도 했다. 지난 11월 21일에는 드디어 서울 강남역 인근에 ‘찬차마요 커피’ 전문점이 문을 열었다.
“커피 재배 농민들과 한솥 사이의 거래를 중계해주는 게 시와 저의 임무예요. 100% 유기농으로 재배된 커피의 품질을 시가 관리감독하며 보증하면, 한솥이 시중 판매가보다 훨씬 높은 가격으로 사들이는 ‘공정무역’인 셈이죠. 가격을 조금만 올려 받을 수 있어도 워낙 재배량이 많아 농민들에겐 큰 이익이 될 수 있어요.”
현재 한솥이 수입하는 찬차마요 커피 원두는 현지 거래가에 50%를 더한 가격이다. 수익금의 일부가 찬차마요시의 발전 기금으로 쓰이는 건 물론이다.
“전 지킬 수 있는 약속만 해요. 농민들, 시민들에게 헛된 공약은 내세우지 않죠. 겉으로 보이는 거창한 계획보다는 시민들의 복지 향상, 상하수도·도로 등 사회 기본 인프라 정비가 제일 다급한 과제입니다. 변함없는 한 가지는 찬차마요에서 제 생을 마치겠다는 생각이에요. 가족이라고는 미국에 요양 가 있는 아내와 페루에서 함께 사는 딸아이 하나뿐이에요. 이곳을 떠나 어디 갈 곳도 없죠. 페루, 특히 찬차마요는 제게 제2의 고향이에요. 순박하고 착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옛날 한국 사람들의 모습을 보곤 합니다.”
글 장진원 기자│사진 서범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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