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복 덕성여대 산업미술학과 교수

20~30대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읽어본 만화책이 있다. 만화책이지만 서점에서는 인문교양 코너에 꽂혀 있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를 유혹하는 교양만화, 누적 판매 1500만 권을 자랑하는 ‘먼나라 이웃나라’다.

저자는 교수와 만화가로 ‘투잡’하는 이원복(64) 씨다. ‘교수가 만화를 그린다?’라는 편견에도 48년 만화 인생을 걸어 온 이 교수를 만나 한국 교양만화 시장의 ‘콜럼 버스’가 된 사연을 들어봤다.
[나의 꿈 나의 인생] “대학생들아, 아날로그적 경험으로 감성을 키워라”
1966년 어느 아침, 재수생 이원복은 도시락을 들고 남산 도서관에 갔다. 당대 최고 명문 고등학교인 경기고를 나왔지만 3학년 때까지 만화만 그리다가 서울대에 낙방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동기 480명 중 360명이 서울대에 합격했지만 그는 떨어졌다. 차마 재수를 하면서까지 만화를 그릴 수는 없어서 도서관에서 매일 소설 책 한 권을 독파했다.

점심 때 도시락을 까먹고 남은 부분을 마저 읽었다. 저녁 무렵 도서관에서 나오면 그만의 아지트로 향했다. 남은 차비로 동시상영 영화를 2편씩 봤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삼류 극장에 홀로 앉아서 ‘로마의 휴일’과 같은 외화를 몇 번이고 재탕했다.

그는 “당시 로마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었겠느냐”며 “재수 시절 봤던 300편의 영화는 내 감성의 자양분이 됐다”고 말했다. 다음 해 그는 서울대 건축학과에 합격했다.

문과 성향이 강했던 그는 건축과에 적응하지 못했다. 건축과에 들어가면 건물 디자인과 같은 예술적인 감각을 발산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매일 배우는 것이 물리, 화학, 미분, 적분이었다. 그는 “첫 수업을 듣고 숟가락을 놨다”고 말했다.

서울대 기숙사에서 살았던 그는 다시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함께 명동에 나가 술을 마셨다. 술값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신문사에 만화를 보내고 받는 원고료로 냈다.

1년 어학 코스를 6개월 만에 패스한 비결

“70년대에 신분을 상승할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밖에 없었어요. 돈이 많든지 ‘빽’이 있든지 아니면 외국에 유학 가는 것이었어요. 나는 가난했어요. 그렇다고 후원해주는 사람도 없었죠. 유학을 가기로 결심했어요. 형제끼리 약속을 했죠. 먼저 간 사람이 편도 비행기 티켓을 보내주기로요.”

이 교수의 바로 위 형이 먼저 독일로 유학을 갔다. 약속대로 형은 그에게 편도 항공권을 보냈고 그는 가방 두 개만 들고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언어 장벽은 해외 유학생이라면 누구나 겪는 문제다. 그는 “살아 있는 독일어와 책에 있는 독일어는 전혀 다르다”며 “독일에 가서 ‘나는 학생입니다’라는 말을 누가 쓰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이 교수는 남들이 1~2년에 걸쳐 패스하는 어학 코스를 6개월 만에 통과했다. 그것도 우수한 성적으로. 비결은 ‘술집’에 있었다.

“한국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어요. 만나면 매일 똑같은 사람하고 이야기하니까요. 발전적인 이야기가 전혀 오가지 않았죠. 그래서 어학 수업이 끝나면 방에 가방 던져놓고 술집으로 갔어요. 독일 학생들이 술 먹고 있으면 다짜고짜 끼어들었죠. 처음에는 저리 가라고 손사래를 치더니 자꾸 귀찮게 하니까 합석하라더군요. 살아 있는 독일어를 거기서 배웠죠.”

유학 생활은 풍족했다. 한국에서 원고료를 받고 독일 현지에서도 아르바이트로 원고료를 받았다. 해외여행은 꿈도 못 꾸는 시절이었기에 이 교수는 가능한 많은 것을 눈에 담고 기록했다. 차를 빌려 유럽 각지를 돌아다녔다. 그는 “독일 유학 시절에 ‘먼나라 이웃나라’를 구상했다”고 말했다.

“70년대 독일로 유학을 가서 받은 문화적 충격은 컸어요. 독일에는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었어요. 어디를 가도 문화재가 잘 보존돼 있었죠. 신기하고 부러웠어요. 또 어디서든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토론할 수 있었어요.

당시 한국은 군부 독재 시대였어요. 나는 유럽 문화가 담고 있는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어요. 혼자 보기엔 아까웠으니까요. 그래서 ‘먼나라 이웃나라’를 그린 겁니다. 프랑스편에는 프랑스 혁명에 관한 내용이 반을 차지해요. 서구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소개하면서 한국의 위치를 함께 고민하고 싶었죠.”
[나의 꿈 나의 인생] “대학생들아, 아날로그적 경험으로 감성을 키워라”
“워커홀릭이요? 내가요?”

이 교수는 1981년 소년한국일보에 ‘먼나라 이웃나라-유럽편’을 처음 연재했다. 1987년에는 단행본이 나왔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반응이 뜨거웠다. 심심풀이용 만화가 아니라 궁금증을 풀어주는 교양만화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먼나라 이웃나라’는 한국 교양만화 시장을 맨 먼저 연 작품이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하지만 그를 비난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사람이 개를 물어버린 것과 똑같았죠. 만화는 최하급 서브 컬처에 속하던 시대였어요. 그런데 KS출신(경기대, 서울대)에 유학파, 그리고 대학 교수가 만화를 그려댔으니 비판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죠. 오페라 가수가 뽕짝을 부른 경우라고 할까요? 당시엔 그랬어요.”

그는 자신을 향한 비난에 ‘펙트’로 맞섰다. 그는 “일하는 시간 중 10~15% 정도만 그림을 그린다”며 “중요한 에너지는 자료의 수집과 분류 그리고 정리에 쏟는다”고 말했다. 예컨대 그는 한 편의 만화를 연재하기 위해서 시중에 나와 있는 관련 책을 싹쓸이한다.

한 권씩 꼼꼼하게 읽고서 서로 다른 시각을 비교한다. 가급적 중립적인 입장에서 내용을 구성하기 위함이다. 그는 “나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펙트”라고 말했다.

“그래서 남들이 무지무지하게 일을 많이 하는 사람으로 봐요. 워커홀릭이요? 내가요? 아니에요. 사실 실컷 놀고 남는 시간에 일해요. 고등학교 동창회에도 안 나가고 골프도 안 치죠. 고스톱도 할 줄 몰라요.

24시간을 오로지 나를 위해서만 사용하죠. 한국 사회는 노하우보다는 노훔(Know-Whom)을 더 중시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나는 안 그래요. 그러면 자기 시간이 없어지니까요. 잠자고 빈둥거리다 남는 시간만 일해도 충분하죠.”

이 교수는 “만화가로서의 삶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평생 만화가 아니면 끝장이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리기가 좋았고 그래서 그렸을 뿐이다. 특히 교양만화를 그리는 일은 즐거웠다. 그는 “조금 잘하면 ‘어 만화인데도?’라는 호응, 조금 틀리면 ‘그래? 만화니까’라는 관대함도 기대할 수 있다”며 “만화는 그만큼 수용력이 강하고 여러 주제를 다룰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라고 강조했다.

“T자형 인재가 돼라”

이 교수는 “요즘 대학생들에게 할 말이 많다”고 했다. 그는 학점에 연연하고 취업에 목을 매는 대학생들에게 “시야를 넓히고 멀리 내다볼 것”을 당부했다.

“요즘 60대는 평균 80세까지 산대요. 우리는 장가가기 전까지 애 취급 받았어요. 군대 다녀와서 취직하면 나이 서른이었죠. 55세면 정년퇴직. 그러니까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시간은 길어봐야 25년이에요.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20세면 어른이고 80세까지는 건강하게 사회생활을 할 수 있어요. 자신만의 인생을 살 수 있는 시간이 60년이라는 말이죠. 안타까워요. 절대적인 인생은 우리보다 40년이 길어졌는데 그들이 바라보는 시야는 점점 좁아지는 것 같아요. 옆의 짝꿍이 경쟁 상대가 아니라 미국이나 프랑스, 영국에 있는 젊은이들이 진짜 경쟁 상대죠.”

10년 후의 일을 상상해보자. 지금 같은 추세로 FTA가 체결되면 머지않아 인력시장도 개방될 것이다. 광화문 한복판에서 미국인 의사가 개업을 하고 한국인이 파리에 가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날도 머지않았다.

취업의 개념도 바뀌고 있다. 그는 “앞으로는 삼성과 LG같이 수천 명이 일하는 기업의 수는 줄어들고 소호 시대가 열린다”며 “지금 대학생들은 앞으로 직업을 네 번 이상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선공이라는 직업 아세요? 옛날 신문사에서 일일이 활자로 판을 짜던 사람들을 말해요. 하지만 워드프로세서가 나오면서 그들은 일자리를 잃었죠. 70년대에는 버스 차장이 있었는데 자동문이 생기면서 사라졌죠.

90년대만 해도 미국에서 컴퓨터 디자인을 연구해서 전시해 놓으면 ‘새롭다, 멋지다’며 감탄했어요. 그런데 2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런 작품은 초등학생이 컴퓨터로 장난친 수준이라고 여기게 됐어요. 앞으로 직업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거예요.”

그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앞으로 청년 취업은 더 어려워진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건비는 높아가고 인력은 고급화되고 모든 것이 자동화되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고임금, 소인력’ 시대가 21세기의 트렌드”라며 영문자의 생김새로 21세기형 인재 모습을 비유했다.

“예전에는 I자형 지식인이 대세였죠. 철자 ‘I’처럼 한 분야를 깊게 아는 사람이 성공했어요. 하지만 요즘 그렇게 하면 뒤떨어집니다. 오늘날은 T자형 인재가 필요합니다. 철자 ‘T'처럼 한 분야를 깊게 알면서도 다른 분야를 얇게나마 넓게 아는 사람이 살아남을 거예요. 안목을 넓히다 보면 시야는 길어지고 전문성은 깊어지겠죠.”

이 교수는 또 “대학 생활을 하면서 되도록 풍부한 아날로그적 경험을 해보라”고 말했다. 그는 “디지털 세계에 갇혀 있지 말고 친구들하고 여행하고 낭만을 누리며 정서적으로 풍부한 감성을 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원복 교수가 와인만화를 그린 사연


“그냥 마시고 ‘맛 괜찮네’ 하면 그만이죠”
[나의 꿈 나의 인생] “대학생들아, 아날로그적 경험으로 감성을 키워라”
대학생 이원복은 자칭 ‘명동 똘마니’였다. 당시 명동에는 배우 최불암 씨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은성’이란 술집이 유명했다. 원고료를 받으면 친구들과 함께 ‘은성’으로 몰려가 유명한 배우들을 보며 술을 마셨다.

술 문화를 사랑하는 이 교수는 여행지에서 반드시 술집을 찾는다. 현지인들의 진솔한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내공’을 바탕으로 2008년에 술 만화를 펴냈다. ‘와인의 세계, 세계의 와인(2권)’이다.

일본의 ‘신의 물방울’을 떠오르게 하는 이 책에는 숨겨진 사연이 있다. 이 교수는 “‘신의 물방울’을 통해 퍼지고 있는 서구 사대주의가 와인문화를 왜곡하고 있다”며 “일본에서 건너온 와인문화에 맞서 책을 펴냈다”고 말했다.

“서양에서 와인은 콜라, 사이다 같은 음료의 개념이에요. 반면 한국으로 들어온 와인은 숭배의 대상 같았어요. 레스토랑에 가서 와인 하나 시켜놓고 와인의 원산지, 만든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의 이모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왜 알아야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죠. 그냥 마시고 ‘맛 괜찮네’ 하면 그만이죠.”

이 교수는 “일본은 명치유신 때부터 자기 자신을 버리고 서양 흉내를 내는 것이 국가 목표였다”며 “한국의 와인문화 속에도 일본에서 들어온 서구 사대주의가 녹아 있다”고 강조했다. ‘와인의 세계, 세계의 와인’ 속에는 문화적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이 교수의 의지가 담겨 있다. 그는 “한국 사람이 갖고 있는 문화적 자존심은 나라의 성장 동력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한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교양만화는?

‘먼나라 이웃나라’ vs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
[나의 꿈 나의 인생] “대학생들아, 아날로그적 경험으로 감성을 키워라”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만화책은 무엇일까. 2004년까지만 해도 1020만 부가 팔린 홍은영의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였다.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는 860만 부로 2위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변이 일어났다. 2004년 홍 씨는 ‘만화로 보는…’의 출판사인 가나출판사를 저작권 침해, 인세 횡령 혐의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홍 씨의 소송으로 가나출판사와의 출판 계약이 2004년 4월 해지되면서 그가 그린 ‘만화로 보는…(1~18권)’은 출판이 금지됐다. 2005년 그는 ‘홍은영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다시 썼다. 결과적으로 그의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는 2004년 1020만 부를 기록하고 한국 교양만화계에서 자취를 감췄다. 따라서 2010년 누적 판매부수 1500만 부를 달리고 있는 ‘먼나라 이웃나라’ 시리즈가 한국 교양만화 누적판매 기록 1위를 달리고 있다.

‘먼나라 이웃나라’는 1987년 유럽편을 시작으로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에 발간된 일본, 대한민국, 미국편을 거쳐 2010년 중국편(1, 근대) 등 총 13권으로 이뤄진 교양만화 시리즈다. 2011년에는 나머지 중국편(2, 현대편)이 나올 예정이다.

[나의 꿈 나의 인생] “대학생들아, 아날로그적 경험으로 감성을 키워라”
이원복

1946년 대전 출생
1975년 서울대 건축학과 졸업
1981~1986년 독일 뮌스터대 디자인·서양미술사 전공 (총장상 수상)
1998~2000년 한국만화 애니메이션 학회 회장
1999~2001년 미국 캘리포니아 얼바인대 객원 교수
2010년 덕성여대 산업미술학과 교수(현)


이재훈 인턴기자 hymogood@naver.com│사진 이승재 기자 fotolee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