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얀 대명엔터프라이즈 법무팀 매니저

[이 죽일 놈의 스토리] “일본 호텔 도전 스토리로 면접관 마음 사로잡았죠”
입사
2012년 7월 9일
소속 대명엔터프라이즈 법무팀 호텔개발팀
학력 남서울대학교 호텔경영학과 졸업, 오사카 YMCA 국제전문학교 국제호텔학과 졸업
학점 4.17
교내외 활동 남서울대학교 홍보대사, 교내 일본어 동아리 회장
경력 힐튼호텔·일본 하얏트리젠시 오사카 인턴십, 호텔 오쿠라 고베 정직원

소녀의 꿈은 이제나저제나 발레리나였다. 다섯 살 꼬맹이 시절부터 토슈즈를 신기 시작해 중학교 2학년까지 무용에만 빠져 살았다. 하지만 이후 급격히 기울어진 집안 형편, 자전거 사고로 인한 치명적 다리 부상, 이어진 방황까지…. 주말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비극적 스토리를 소녀는 온몸으로 겪어낸다.

이야기가 예서 끝난다면 두고두고 시청자의 원성을 사야 할 터다. 뒤늦게 철이 든 소녀는 어렵사리 대학에 진학한다. 대학 내내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던 소녀는 급기야 해외로 눈을 돌린다. 그리고 유학과 현지 취업의 기쁨까지 누린다. 일본 자국인도 들어가기 어렵다는 일류 호텔에서 호텔리어로 성공하기까지의 모진 고생은 해피엔드로 가기 위한 감초다.



“입사 후 들었던 팀장님 말씀이 기억나요. ‘초얀 씨 이력서를 보면 뭔가 하나를 관철하기 위해 굉장히 노력하는 사람이란 게 보인다’는 얘기였죠. 실제로 항상 그런 자세로 생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대명엔터프라이즈 법무팀에서 호텔개발 업무를 맡고 있는 김초얀 매니저. 앞서 소개한 드라마 같은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이다. 은행원 아버지와 피아노 교사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막내딸. 어려움이 뭔지 모르고 컸던 생활은 중학교 2학년 아버지의 무리한 투자로 끝을 봤다. 집 안

곳곳에 붙었던 압류 딱지는 지금도 마음속 상처로 남아 쉽게 지워지지 않는 경험이 됐다.

“무용을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에 자포자기하는 심정이었어요. 자전거 사고도 그렇게 났고요. 소위 논다는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무용도 학업도 완전히 손을 뗐어요.”

중학교 졸업 후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그때의 선택이 전화위복을 가져오리라는 건 당시로선 짐작도 못했다. 국내 실업계 고교에선 처음 문을 연 관광과는 호텔 관련 법, 호텔 영업 등 호텔리어를 집중적으로 양성하는 곳이었다.

“수능 준비를 따로 한 건 아니었기 때문에 내신 성적으로 수시 전형을 통해 남서울대 호텔경영학과에 입학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철이 든 것 같아요. 좋아하는 호텔 일을 배운다는 생각에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덕분에 1~3학년 동안 계속 장학금을 받았죠.”

2학년 때는 올 A+를 받으며 일본 교환학생을 신청했다. 일본서 학업을 이어가야 했기 때문에 일본어 구사 능력이 필수 자격 중 하나였다.

“원래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던 문제 학생이었는데 열심히 공부해 여기까지 왔다고 교수님들을 설득했어요. 1년만 지나면 일본어를 잘할 수 있을 거라고요. 절실함이 통했는지 일본학과 교수님이 추천해주셔서 교환학생에 뽑히게 됐죠.”

그토록 절실히 원하던 기회. 오사카 YMCA 국제전문학교 국제호텔학과 학생이 됐지만, 막상 일본 생활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경험이었다. 처음 6개월간은 아무와도 이야기조차 나눌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니 신기하게도 귀가 열리기 시작했다. 학교 수업과 하얏트리젠시호텔 인턴십을 병행하면서도 하루 3~4시간만 자며 일본어 공부에 매달린 덕분이었다.
[이 죽일 놈의 스토리] “일본 호텔 도전 스토리로 면접관 마음 사로잡았죠”
“일본은 대기업 위주의 취업설명회가 자주 열려요. 현장에서 이력서를 작성해 제출하는 경우도 많죠. 국제호텔학과 졸업과 동시에 인턴십한 호텔에 입사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저도 일본 학생들과 똑같이 취업 준비를 해야겠다 마음먹었어요.”

부모님이 계신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죽기 살기로 배운 어학 실력을 그대로 놓아버리기 싫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열의를 다해 배운 언어를 본토에서 자유롭게 쓰고 싶다는 열정이 살아났다. 27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도 ‘인생의 전환점을 찾을 때’라는 확신을 굳히게 했다.

학업이 끝나는 1년 후에도 취업이 안 되면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상황. 절박한 마음으로 호텔 취업박람회장을 찾아다녔다. 고베시에 자리 잡은 오쿠라호텔도 그중 하나. 오쿠라 브랜드는 일본의 3대 호텔 체인 중 하나일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호텔리어, 호텔 개발자로 변신하다
“일본은 ‘내정’이라 해서 졸업 5~6개월 전 미리 신입사원을 채용하는 경우가 많아요. 1차 서류 심사, 2차 그룹(토론) 면접, 3차 부서장 면접·인적성 검사, 4차 임원 면접을 거쳐 취업에 성공했어요. 일본인과 똑같이 전형에 응한 게 특이하게 비쳤다고 해요. 마침 한국 고객을 유치하려던 참이라 한국어와 일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는 인재도 필요했고요. 기회가 좋았죠.”

일본인도 들어가기 어렵다는 최고급 호텔에 입사했지만, 진짜 고생은 그때부터였다. 호텔 필드는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고객의 요구에 즉각 반응하지 못하면 바로 명찰부터 확인하는 게 정해진 코스. 외국인임을 티내지 않으려는 노력에 노이로제에 걸렸을 정도였다. 자나 깨나 일본어로만 이야기하며 ‘난 일본인’이라고 자기 세뇌까지 시도했다. 심지어 냄새가 날까봐 김치도 먹지 않았다. 최초의 한국인 직원이었기에 행동 하나하나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도 컸다.

“일 자체에는 자부심이 굉장했어요. 하지만 3교대로 돌아가는 프런트 서비스 업무는 너무 힘들었죠. 결국 몸에 탈이 나더군요. 쉬지도 못했던 터라 입사 2년 만인 2012년 12월에 한 달 휴가를 받고 비로소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반갑게 맞아주시는 부모님의 손길도 그랬지만, 귀국은 그동안 잊고 지냈던 또 다른 모습을 일깨워준 시간이었다. 그제야 ‘지금 내가 가는 길만이 정답은 아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결국 호텔 동료들의 만류에도 사직서를 냈다.

“내가 하는 일이 최고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저 말고도 여러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한국에 들어와서야 보게 됐죠. 굳이 일본만 고집할 필요가 없어진 거예요.”

귀국 후 한 달 만에 대명엔터프라이즈 호텔개발사업팀에 입사했다. 대학 때부터 쉬지 않고 달려왔던 관성은 스스로 조금의 공백도 허용하지 못했다. 마침 서울 명동에 비즈니스호텔 설립을 계획하던 회사의 니즈와 그녀의 경력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네이티브 수준의 일본어 실력과 일본 고객 접객 경험이었다. 무엇보다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가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호텔리어로 인정받았다는 독특한 스토리가 실무진과 경영진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예전에는 고객에게 먼저 다가가는 능동적 서비스를 지향했어요. 요즘은 개별 고객보다는 호텔이라는 큰 이미지로 다가가려고 해요. 지금도 배우는 과정이죠. 덕분에 경제 공부부터 업계 동향, 인문학적 공부 등 시각 자체가 굉장히 넓어졌다는 걸 느껴요. 일본의 지인들도 한국에서 호텔 개발을,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서 하고 있다고 하면 놀라고 대견해하시죠.”

호텔리어로서 실무와 호텔 개발이라는 비즈니스까지 섭렵해가는 그녀의 꿈은 한국만의 호텔 체인 CEO다. 아마도 일본어와 호텔 서비스, 비즈니스가 함께하는 곳에 자신의 자리가 있을 거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글 장진원 기자│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