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계 전공자 취업 수난시대다. 항간에 떠도는 ‘슬픈 인문계’라는 말은 그래도 나은 편. 슬픔의 수준을 넘어 ‘절망’이라는 인문계 출신들의 아우성에도 기업들의 인문계 채용 기피 경향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국내 대기업들은 수출 위주의 제조업을 근간으로 성장해왔다.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기술 개발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만큼 이공계 채용에 무게 중심이 쏠리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 인문계 전공자들이 대부분이었던 영업 부문에서도 제품과 기술에 대한 전문지식을 지닌 이공계들이 약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응급처방이 필요하다.
An egg carton with six white eggs on metallic surf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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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열풍’과 ‘인문계 홀대’ 사이
몇 해 전부터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다. 기업은 물론 각 지자체, 문화센터 등에서는 인문학 강의 붐이 일며 유명 강사를 모시는 데 두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인문학 관련 서적은 불티나게 팔리고 TV에서는 인문학 강좌가 경쟁적으로 편성되고 있다.

이런 인문학 열풍과 대조적으로 인문계 전공자들은 냉랭한 취업 현실 앞에서 당황하고 있다. 대학 졸업자인 A(26) 양은 요즘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다. 취업 스터디에서 그녀는 단연 ‘스펙왕’이었다. 학점은 물론, 영어 성적, 인턴 경험, 자격증 등 다른 친구들보다 거의 모든 면에서 우월한 스펙을 자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작년 하반기 공채 시즌, 자신보다 스펙이 떨어지는 친구들은 국내 주요 대기업에 합격한 반면 자신은 번번이 불합격 통보를 받아야만 했다. 화학공학, 기계공학, 반도체공학 등을 전공한 친구들이 승승장구하는 사이 그녀는 자신의 졸업장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고. 졸업장에 적힌 그녀의 전공은 사학이었다.


화성에서 온 이공계, 금성에서 온 인문계?
기업에서 바라보는 인문계 전공자들의 모습은 어떨까. 이동우 L기업 HR 전문가는 “이공계는 사물을 정태(靜態)적으로 바라봐 일방적 결론에 도달하는 반면, 인문계는 동태(動態)적인 시각으로 업무를 해 다양한 결과가 나온다”며 이공계와 인문계의 차이점을 설명했다. 그리고 “전문성, 성취 능력, 문제 해결력 등을 나타내는 개별 역량 발휘에는 이공계가 강점을 보이는 반면 대인 이해력, 대인 영향력, 조직 인식력, 관계 구축력 등의 관계 역량에서는 인문계가 두각을 나타낸다”고 덧붙였다.

한 제철기업 인사팀 관계자도 “인문계 출신들은 매끄러운 인간관계와 조직 적응력이 좋고 전체를 바라보는 능력이 이공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뛰어나다”고 말한다. 하지만 “기업에서는 점점 기술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되는데, 인문계 출신은 기술에 대한 이해도가 현저히 떨어져 정책과 관리 부분에서 뒤처지는 경향이 있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또 “이공계가 인문학을 배우긴 쉬워도 인문계가 공학을 배우기는 어렵다는 인식이 기업에 있는 것도 최근 인문계 전공자 채용 기피 현상의 한 요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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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한계 깨뜨리기

이처럼 채용의 칼자루를 쥔 기업이 이공계와 인문계 지원자들을 다르게 인식한다면, 마땅히 그에 따른 취업 전략도 달라야 할 터. 김종필 건국대 인재개발센터장은 “취업에 본격적으로 임하기 전, 자신의 전공과 미래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결정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또 “인문계 전공자일수록 자신이 어떤 일을 할지, 어떤 기업에 입사해야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기보다는 막연한 스펙 쌓기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식의 취업 대비는 안 그래도 이공계에 비해 전문성이 약한 인문계 전공자들을 더 힘들게 한다”며 꿈과 목표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을 주문했다. 기업이 원하는 인재는 단순히 우수한 인재가 아니라 ‘특정 기업에 최적화된 직무 전문성을 갖춘 인재’라는 것이다.

임민욱 취업포털 사람인 홍보팀장은 “본인 스스로가 인문계라는 한계를 정하지 않았으면 한다. 기업들이 아무리 이공계를 선호한다고 해도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생산하고, 고객 친화적인 서비스 정신이 상대적으로 뛰어난 인문계 출신을 채용하지 않을 순 없을 것”이라며 취업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것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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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직무 전문성’ 어필하기

인문계 전공자의 이력서에는 어떤 점을 효과적으로 담아야 할까. 우선, 직무와 관련 없는 무의미한 경력의 나열은 없느니만 못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대부분의 채용 담당자들은 지원자의 이력서를 꼼꼼히 읽어본다. 지원한 직무나 회사와 상관없는 경력은 채용 담당자들을 피곤하게만 할 뿐이다. 임민욱 팀장은 “인문계 전공자들은 왜 해당 직무에 지원했고, 어떤 면에서 자신이 적합한 인재인지를 구체적인 사례와 근거를 통해 보여주어야 한다”며 철저히 직무와 관련된 활동과 경험만을 나타낼 것을 주문했다. 아울러 인문학도로서의 특징이자 장점인 인문학적 사고와 통찰력을 강조했다. 채용 부문과는 별개로 최근 직장 생활에 있어 인문학의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는 만큼, 인간에 대한 이해와 감성이 해당 직무에서 어떤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지를 어필하라는 것이다.

기업 채용에 있어 갈수록 그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자기소개서다. 인문계와 이공계 지원자의 자소서는 어떤 차이점을 보일까. 박혜영 레쥬메스쿨 취업컨설턴트는 “인문계는 어학이나 봉사 등 활동 중심의 서술이 주를 이루고, 이공계는 기술 관련 역량이나 자격증 취득 여부 등에 포커스를 맞추는 경향이 있다”는 말로 그 차이를 설명했다. 기업에서 가장 알고 싶은 것은 지원자의 직무 전문성인데 바로 이 자소서에서부터 인문계 지원자들은 경쟁력과 변별력을 갖기 힘들다는 얘기다. 그리고 “인문계 지원자들은 자소서를 한정식이 아니라 김밥처럼 쓴다. 지원자가 갖고 있는 다양한 역량을 각 항목에 준해 적절히 녹여낸 자소서를 한정식에 비유한다면, 기업의 인재상만을 강조하는 자소서는 김밥에 비유할 수 있다. 본인이 채용 담당자라면 한정식과 김밥 중 어떤 것을 먹고 싶겠는가”라며 인문계 지원자들의 자소서 작성 편중 현상을 경계했다. 자소서에는 각 항목마다 정답이 있는데 인문계 전공자들은 ‘자신이 쓰고 싶은 이야기’를 담는 것에 집중하기 때문에 오류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인문계 전공자 서바이벌 전략] 전공에 대한 자신감 탑재 통섭(通涉)형 인재로 진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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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通涉)형 인재로 면접 대비하기

채용 전형에서 지원자들의 역량을 집중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단계는 역시 다양한 면접. 기업들이 이번 상반기 공채부터 예전보다 한층 강화된 면접을 실시하는 이유다. 특히 프레젠테이션 면접은 지원자의 전공지식뿐 아니라 문제 해결력, 논리력, 발표력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 많은 기업들이 실시하고 있다. 인문계 전공 수업은 이공계에 비해 발표·토론 등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 인문계 지원자들이 이 경험을 면접에 잘 적용한다면 발표 자세나 태도, 논리적 표현 등에서 유리할 수 있다.

임민욱 팀장은 “면접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전공지식, 사회적 이슈, 회사 전략 등과 관련한 전문 지식이 없다면 좋은 점수를 얻기 어렵다”며 “면접 전 기업 관련 이슈, 지원 직무에 맞춘 회사 사업 발전 방향 등에 대해 정리해 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마케팅 직군의 경우 최신 마케팅 트렌드와 해당 기업 제품(서비스)의 마케팅 전략, 실행 방안 등에 대한 답변을 준비해 보는 식이다.

토론 면접의 경우 직군과 상관없이 특정 주제에 대해 토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평소 신문, 뉴스 등을 자주 접하면서 시사적인 주제에 대해 자신만의 논리를 세워보는 연습을 해두는 것이 좋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인문계 전공자들은 자신의 주장에 대한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증거를 제시하기보단 왜 그 주장이 당위성과 정당성을 가지는지에 대한 부분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채용 담당자이자 입사 후 같이 일할 직장 동료이기도 한 면접관에게 인문계 지원자의 그런 모습은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기보단, 자신의 의견만 내세우려는 사람’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또한 기술이나 공학 등 자신이 평소 잘 모르던 분야에 대한 기본 상식도 틈틈이 익혀, 프레젠테이션 면접과 토론 면접에서 인문계 전공자이지만 기업의 어느 분야에서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통섭형 인재’라는 인식을 심어줄 필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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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제대로’ 공부하기

기업들이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원하면서 전공 구분 없이 대다수의 학생들이 인문학 서적을 찾고 있다. ‘취업 대비용 인문학’이라는 새로운 출판 장르가 생겼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하지만 기업이 원하는 것은 인문학 관련 지식이 아니라 인문학이 바탕이 된 업무능력이다. 한 유통기업 인사팀 관계자는 “머리에 주입된 인문학 말고, 가슴에 물든 인문학을 원한다”며 평소 인문학적 사고를 꾸준히 할 것을 당부했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답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려주지 않는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인문학, 어떻게 공부해야 할까?

<통찰력을 길러주는 인문학 공부법> 저자 안상헌 씨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질문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책에서 인문학은 “인간의 존재가 이렇다는 것을 알려줄 수는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면 된다든지, 어떻게 적용하면 좋다든지 하는 것들에는 무심하다. 답을 알려주지 않으니 스스로 찾아야 한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질문에 익숙해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라고 설명한다. 기업이 원하는 인문학적 소양이란 결국 이런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자신과 회사를 위한 더 나은 방법과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인문학을 ‘수혈’받는 방법은 다양하다. 요즘은 인문학 관련 온라인 강의, 모바일 앱 등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편리하게 공부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좋은 인문학 접근법은 역시 책이다. 인문학이 암기의 대상이 아닌 사고(思考) 그 자체임을 환기한다면, 독서를 통한 인문학적 소양 쌓기가 그 본연에 가장 충실한 방법이라 볼 수 있다. 세계적인 독서가이자 작가인 알베르토 망구엘은 그의 책 <책 읽는 사람들>에서 “이상적인 독자는 텍스트를 절개해서 껍질을 들어내고 골수까지 파 들어가, 동맥과 정맥을 일일이 추적해서 완전히 다른 생명체를 만들 수 있는 번역가”라며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독서를 강조했다. 이종건 우리은행 인사부 과장은 “천편일률적인 독서 소감보다는 남들과 조금 다르더라도 자신만의 시각으로 솔직한 평을 하는 지원자들이 돋보인다”고 말했다. 정답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인문학을 접근할 게 아니라 본인만의 답을 만들어가는 인문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인문학 스터디를 활용하는 방법도 추천할 만하다. 인문학 관련 서적을 한 달에 한 권 내지는 두 권 읽고 이에 대한 소감과 의견을 나누며 사회적 이슈와 연관된 질문을 서로에게 던지는 식이다. 중요한 것은 스터디 구성원을 각기 다른 전공을 가진 이들로 꾸려야 한다는 점이다. 지난해 하반기 공채 시즌부터 인문학 스터디에 참여하고 있다는 한 인문계 학생은 “이공계 친구들에게서 내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부분이나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발견한다. ‘모태 문과’라고 느꼈던 내 자신이 조금씩 ‘통섭형 인문계’로 발전하는 것 같아 만족스럽다”라고 말했다.



인문계 + α 취업 경쟁력
별점 평가와 한 줄 (별★ 다섯 개 만점)


① 인문계 전공 + 복수전공 ★★★☆☆
확고한 주관이 있는 복전이라면 긍정적 효과 기대


② 인문계 전공 + 직무 관련 경험 ★★★★★
기업은 뭐니 뭐니 해도 일 잘 하는 사람을 원한다.


③ 인문계 전공 + 자격증 ★★☆☆☆
과유불급(過猶不及)이요, 안분지족(安分知足)이라.


④ 인문계 전공 + 어학능력 ★★★★☆
Not 토익, But 실제구사능력. Thanks! 제2외국어


⑤ Only 인문계 전공 ★★★★★ or ☆☆☆☆☆
사람은 미워해도 전공은 미워하지 말라.


‘인문학’ 강조하는 기업들
● 신세계그룹 : 인문학에 조예가 깊은 정용진 부회장을 필두로 승효상 건축가, 송동훈 문명탐험가, 정지영 아나운서 등이 대학생 인문학 인재 양성을 위한 인문학 콘서트 ‘지식향연(www.ssghero.com)’을 개최한다. 신세계는 올해를 인문학 전파의 원년으로 삼고,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젊은 층에게 인문학의 중요성을 알리는 동시에 인문학 지식과 지혜를 공유하고 학습 기회도 제공할 계획이다. 4월 8일 연세대에서 열리는 첫 강연을 시작으로 5월엔 전국 10개 대학에서 지식 향연을 연다. 6월에는 인문학 인재 ‘청년 영웅’을 선발할 예정이며, 7월에는 로마제국에 대해 탐구하고, 8월에는 최종 선발된 20명에게 ‘로마제국 그랜드 투어’ 기회를 준다. 선발된 이들에게는 신세계그룹 입사 시 가산점을 준다.


● 현대차그룹 : 글로벌 비즈니스 역량 강화를 위해 올해 총 10차례에 걸쳐 임직원들을 상대로 인문학 콘서트를 연다. 현대차는 지난해 전 직원을 대상으로 전문가와 함께 하는 역사 콘서트를 개최한 바 있다. 역사 콘서트는 지난해 9월부터 12월까지 한국사 5회, 세계사 5회 등 총 10회로 진행됐다. 이번 인문학 콘서트는 지난해 역사 콘서트의 확장 버전이며 문학, 심리학, 미술 등 인문학 전반을 주제로 다루게 된다. 지난달 24일 진행된 첫 콘서트에서는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창조경제와 융합형 통섭’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


● 롯데백화점 : 1100만 원 상당의 상금을 걸고 ‘영어 사내 어학 콘테스트’를 실시한다. 간부사원 1000여 명에게는 해외 근무 희망 국가를 신청하도록 했다. 지난달 28일에는 청량리점 문화홀에서 한국외대, 연세대, 고려대 등 국내 9개 대학 통·번역대학원과 통·번역학과, 국제학부 재학생 150여 명을 대상으로 채용설명회를 진행했다.


● 국민은행 : 서류 전형과 필기시험을 통과한 지원자를 대상으로 ‘통섭 역량 면접’을 실시한다. 인문학 관련 서적을 주제로 토론을 진행해 지원자의 자질을 평가하는 방식이다. 또 ‘세일즈 프레젠테이션’을 도입, 지원자가 무작위로 고른 상품을 소개하도록 해 판매 역량과 순발력을 검증한다.


● 우리은행 : 자기소개서에 인문학 서적 3권을 읽고 소감과 견해를 쓰도록 했다.
서평이나 줄거리 요약한 것을 적어 낸 지원자들은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다고. 투박하더라도 자신만의 생각과 느낌을 담는 것이 중요하다.


글 박상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