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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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
김윤섭 소장의 바로 이 작가 - 권경엽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미술사 박사]

마치 꿈 속 풍경(dreamscape)을 한참 거닐다 나온 것처럼 여리고 긴 여운이 있다. 그래서 권경엽의 그림에 대한 느낌을 판타지(fantasy), 멜랑콜리(melancholy), 사색적이고 심리적인 초상 등으로 표현하곤 한다. 분명한 것은 인간의 내밀한 감정선(感情線)을 건드린다는 점이다.

권경엽 작가의 그림은 몽환적인 분위기가 매력이다. 특정하게 정의 내릴 수 없는 다층적이고 미묘한 감정의 골을 빠짐없이 부드럽게 어루만진 ‘심리적 초상화’다. 기억의 이면까지 비춘 거울처럼 한참을 바라본 후엔 잃어버린 자아를 만나게 될 것 같은 설렘도 함께한다.

권 작가의 작품 제작 과정은 남다르다. 맑고 고요한 수면(水面)을 닮은 그림에서도 연상되듯, 그림 그리기에 앞서 나름의 의식이 있다. 바로 명상이다. 최대한 느린 호흡으로 평정심을 찾은 상태에서 붓을 든다. 그림의 표면은 수채화처럼 얇고 투명하지만, 실은 전형적인 유화다. 자칫 두텁게 얹힌 유화물감이 텁텁함을 자아낼 수 있을 텐데도, 오히려 붓 자국조차 알아챌 수 없을 만큼 평면적이고 섬세하다. 간색(間色)의 층을 아주 얇고 반복적으로 쌓았기 때문이다.

“예술은 자기의 성찰이자 치유입니다. 저의 그림을 보는 사람은 제 그림을 통해서 자기 자신 또는 자신의 과거 모습을 발견했으면 합니다. 자신의 내면을 그림에 투사한 후 다시 꺼내서 주관적으로 읽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술을 통해서 파편화된 삶을 복원하고 위로 받을 기회를 얻습니다. 자신을 구원하고 자신의 삶을 이어가게 하는 원천이 되는 것이 예술행위입니다. 대부분의 예술작품이 자신을 향하거나 고백적이듯, 저 역시 삶에서 발견된 저 자신을 작품에 투영해 외부와의 공감을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권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자기 고백적인 그림에서 더 크고 깊은 공감을 경험한다. 가장 큰 설득력의 힘은 솔직함에서 나온다고 했듯, 그의 그림이 많은 이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도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결과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마도 미국과 유럽의 유명 미술 월간지 하이 프록토스(Hi-Fructose)나 매거진 주스타포즈(Juxtapoz), 영국의 우먼 인 아트(Woman in Art) 등에도 비중 있게 작품 세계에 대한 인터뷰 기사가 소개된 점 역시 그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이들의 교감을 동시에 이끌어내는 요인은 무엇일까?

작품에서 드러나는 정신성은 개인적인 감성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그 안에 내포된 다양한 요소들(미소년 혹은 미소녀를 연상시키는 여성성, 섹슈얼적인 성적충동 이미지, 생과 죽음의 경계에서 얼음 빛을 비춘 듯 냉철한 자아 의지 등)로 인해 개별적이고 제각각인 감성을 충족시켜주고 있다.

기억 속에 고이 잠든 ‘감성의 앙금’을 조용히 불러일으켜 깨우듯, 화폭에 옮기는 과정에선 유독 색감의 운용에 치중한다. 방금 울음을 그쳐 충혈기가 가시지 않은 눈시울, 매끈하면서도 반투명한 피부의 색조, 숨결이 새어 나올 만큼 살짝 벌어진 여린 입술의 표현 등도 권 작가가 치밀하게 짜놓은 유인책일 수도 있다.

“그림을 그릴 때 현실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이 결합된 듯 몽환적인 인물의 감정 묘사에 중점을 둡니다. 다른 세계에 존재할 것 같은 판타지적인 인물을 ‘슬픔이 스며 있는 사색적인 공간’에 배치시키죠. 차가운 스카이블루 컬러와 따뜻한 핑크 계열의 컬러를 교차시켜 따뜻하면서 동시에 차가운 느낌을 전하려 합니다. 또한 파스텔 톤으로 은은하고 미묘하게 색의 변화를 통해 정적인 공간을 묘사합니다. 고요함 속에 침잠된 인물 표현으로 시간과 공간을 알 수 없으나, 표정의 사실적인 묘사로 보는 이에게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고자 했어요.”

지난 10여 년간 권 작가의 작품은 크게 ‘화이트→레드→보태니컬’ 세 가지 성향의 작품을 병행해 오고 있다. 우선 2006년부터 시작된 화이트 시리즈는 창백한 얼굴과 머릿결의 소녀(혹은 소년)가 얼굴에 붕대를 감고 있거나 안대를 쓰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명 이 ‘붕대 시리즈’는 화단에 ‘주목할 만한 유망 작가 권경엽’이란 이름을 올려줬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인물을 바라보며 동병상련 애환의 깊은 공감을 체감했다. 그 침묵의 흰색 이면에는 ‘제 빛을 잃고 퇴색된 기억의 메타포’나 ‘성장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심리적 불안정성’ 등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론 2013년부터 선보인 붉은색 배경과 옷을 주조로 한 ‘레드 시리즈’다. 이 시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외면의 상흔을 감싸며 애환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초기에 비해, 인물 내면의 감정 변화와 갈등을 붉은색이란 특정 모티브로 상징화시킨 모습이다. 인간은 누구나 성장 과정에서 현실과 이상을 오가며 자아성찰로 인한 갈등을 빚기 마련이다. 비록 뜨거운 열정과 열망에 사로잡히게 되더라도, 그 치명적인 유혹을 떨쳐내야만 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외부 세계와 단절할 수만은 없다. 권 작가의 붉은색은 어쩌면 ‘소녀에서 여성으로의 여정에서 만나는 성장통’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은 사유하는 관조적 자세다. 현실 너머의 이상계를 동경하면서도 현실의 끈을 놓치지 않는 명징한 명상이다.
Bleached Memory
Bleached Memory
끝으로 가장 최근인 2015년에 시작한 ‘보태니컬(botanical) 초상 시리즈’다. 보태니컬 아트는 말 그대로 식물도감처럼 식물의 특정 부분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권 작가는 이런 보태니컬 아트의 특징과 자신이 추구해 온 인물 초상의 조화를 꾀하고 있다. 그리고 특유의 달콤한 색조로 사랑스러운 분위기도 연출해냈다.

마치 순정만화의 여주인공처럼 행복을 만끽하는 순간을 포착한 것처럼 볼수록 정감이 돋는다. 마음의 상처로 지쳤던 힘겨움을 이겨내고, 성장통의 새로운 열정으로 충전한 소녀는 어느새 희망 어린 환희의 꿈을 꾸고 있는 모습이다. 초기엔 인물이 직접 꽃을 들고 있었다면, 지금은 내면 심리를 대변하듯 배경에만 등장시켰다. 가슴을 짓눌렀던 돌을 내려놓은 듯 주인공의 표정도 한결 밝아졌다.

“인물화를 통해 관능성과 이중성, 감정이 구속된 세계를 형상화합니다. 비인간적이고 결점이 없는 존재로 표현된 그림 속 인물은, 인간의 내면이 기억의 저장고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작품 속에서 인물의 눈은 상실감을 담고 대상을 응시하고 있는데, 여기서 눈물은 감정을 전달하는 적극적 도구라 할 수 있겠지요. 저는 인간의 몸을 ‘치유와 애도의 기억을 담는 매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희미하면서도 섬세하게 그려, 초현실성 속에서 사색적인 묘사는 트라우마와 회복, 망각과 기억이라는 상반된 주제를 화면에 동시에 녹여내고자 한 것입니다. 이는 작업을 통해 보는 이의 내면에 깊은 감흥을 일으키고 싶은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권경엽만큼 인간 내면의 감정을 잘 표현하는 작가도 드물다. 그는 ‘강한 부드러움’의 묘미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 세계를 선보이고 있다. 또한 자연주의 영역과 초현실적인 경계를 넘나들며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특정한 개념이나 민족성 혹은 역사성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극사실적인 회화 기법임에도 내수시장을 넘어 국제무대에서도 러브콜을 받는 것으로 여겨진다. 어느 미술 애호가는 “아트페어에서 수많은 그림을 보고난 다음 날 그의 그림만 생각났다”고 고백했다. 그 인물 속에 이미 한 몸처럼 스며든 그의 감성까지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권 작가의 인물화는 ‘판타지 리얼리즘’의 진수를 보여준다. 마치 신화 속 인물을 살며시 엿보고 있는 듯 신묘한 설렘도 선사해준다. 작품 가격은 20호 변형(62×62cm)이 400만 원 정도이며, 50호(116.8×91cm)와 100호(162.2×130.3cm) 기준으로 4년 전에 비해 각각 200만 원씩 상승했다. 유럽과 미국의 전시들과 아트페어에서 품절 기록도 가지고 있다. 최근엔 일본과 유럽의 갤러리 대표와 컬렉터들까지 작품을 소장하기 시작하면서, 앞으로 더 큰 변화와 활약을 기대하게 한다.

아티스트 권경엽
신화를 엿본 아티스트의 판타지 리얼리즘 인물화
권경엽(1978년~) 작가는 세종대 미술대학과 동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그동안 7회의 개인전(LA, 로마, 도쿄, 서울 등)을 가졌다. 또한 2011 홍콩 소더비 미술품 경매를 비롯해 LA 아트 쇼 2015(미국 LA 컨벤션센터), LAX/LHR(영국 런던 스톨른 스페이스 갤러리), 인비저블 칼리지(미국 인디애나 포트웨인 미술관), 파우 와우 하와이 2015(미국 하와이 호놀룰루미술관), 라 파밀리아 싱크 스페이스 10주년 기념전(미국 LA 싱크 스페이스 갤러리), AHAF HK 2015(홍콩 마르코폴로 호텔), 푸마 컨템퍼러리 도쿄/ 분쿄 아트갤러리(일본 도쿄), LAX/TXL(독일 베를린 어반 국립미술관) 등 많은 기획 단체전에 참여했다. 독일 베를린 어반 국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등에 소장돼 있으며, 2008년 이후 줄곧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진행되는 가나아트 장흥아뜰리에에 입주 중이다.

김윤섭은…
김윤섭은 미술평론가로서 명지대 대학원에서 미술사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및 서울시립미술관 작품가격 평가위원,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전문위원, 대한적십자사 문화나눔프로젝트 아트디렉터, 교보문고 교보아트스페이스 기획위원, 숙명여대ㆍ세종대 미술대학 겸임교수 및 수원대 미술대학 대학원 객원교수,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