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제 143호 (2017년 04월)

프라하, 스메타나의 영혼이 베토벤과 모차르트를 껴안다

[한경 머니 = 이석원 여행전문기자] 체코 프라하(Praha) 여행의 낭만을 원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정작 프라하에 가보니 생각보다 볼 게 없다고 볼멘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아마, 프라하의 겉모습만 봤기 때문일 터. 프라하의 진가는 그 속에 담긴 문화예술에서 드러난다. 그 중심에 음악이 있다.

보헤미아 산맥에서 발원해 교교히 흐르던 블타바(Vltava) 강이 천년의 고도, 백탑(百塔)의 도시 프라하에 이르러서 숨 가쁘게 달려오던 발걸음을 고른다. 카를교(Karlův Most) 밑을 통과하는 물줄기는 지난 수천 년간의 시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5월의 카를교는 전 세계에서 모여든 수많은 여행자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 비대한 군중들 사이에서 강 건너 비셰흐라드(Vysehrad)를 바라보는 75세 쿠벨리크의 눈가가 촉촉이 젖는다. 그는 지금 자신의 음악 스승이자 정신인 스메타나의 무덤을 멀리서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1990년 5월 12일 저녁 8시 프라하 시민회관 오베츠니 둠(Obecni dům). 거기서도 가장 큰 공연장인 스메타나 홀 무대 위에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인 라파엘 쿠벨리크가 서 있다. 그의 지휘봉이 서서히 허공을 가르면 체코 필에서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의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 중 1번 ‘비셰흐라드’가 흐르기 시작한다. 2번 ‘블타바’에 이르러 쿠벨리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린다. 그리고 그는 순식간에 44년 전인 1946년 바로 이 자리로 돌아간다. 32세의 혈기왕성하고 천재성까지 인정받은 체코 필의 젊은 지휘자로.


세계 최고의 클래식 음악 축제로 불리는 ‘프라하의 봄 페스티벌’은 1946년 젊은 지휘자인 쿠벨리크 등이 주창해서 시작했다. 나치 독일의 압제로 신음하던 보헤미안들의 민족적 자긍심을 되살리자는 취지였다.

그래서 ‘프라하의 봄’은 체코 국민음악파의 거장인 스메타나의 정신을 그 밑바탕에 깔고 있다. 페스티벌 첫해 체코 필의 상임 지휘자인 쿠벨리크는 축제의 시작 곡으로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을 선택했고, 지금까지도 그 전통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쿠벨리크는 축제를 2회밖에 하지 못하고 조국을 떠나야 했다. 독일의 압제에서 겨우 벗어나는가 싶었던 체코는 제2차 세계대전 후 구소련의 지배에 들어간다. 구소련에 의해 공산화가 이뤄진 조국에서 쿠벨리크는 자신의 음악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영국 망명길에 오른다. 마치 스메타나의 삶처럼. 쿠벨리크보다 꼭 90년 전에 태어난 스메타나는 맥주 양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아무도 권하지 않았지만 음악에 빠져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다.

1848년 30년 전쟁의 종전과 파리 2월 혁명의 여파로 전 유럽의 젊은이들이 민족주의에 눈을 뜰 무렵 스메타나는 오스트리아에 저항하며 거리로 나섰다. 헝가리 출신 당대 최고의 음악가였던 프란츠 리스트로부터 극찬을 받던 때였다. 스메타나는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혔고, 결국 조국을 등지고 스웨덴 예테보리로 도망을 쳐야 했다.

그러다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힘이 쇠약해진 1861년 조국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보헤미안의 민족적 자긍심을 북돋는 음악들을 작곡했다. 오페라 <팔려간 신부>로 이른바 체코의 ‘국민 작곡가’가 된 스메타나지만 1874년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 작곡을 시작했을 때부터 청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1번 ‘비셰흐라드’로 시작해 2번 ‘불타바’, 3번 ‘샤르카’, 4번 ‘보헤미아의 숲과 초원에서’, 5번 ‘타보르’와 6번 ‘블라니크’를 완성한 스메타나는 1884년 5월 12일 청력도 잃고 정신착란증까지 앓으면서 프라하의 한 정신병원에서 숨을 거둔다.

그런 그를 62년 만에 깨워낸 인물이 쿠벨리크다. 쿠벨리크는 스메타나의 기일인 5월 12일 ‘프라하의 봄’을 시작했다. 하지만 쿠벨리크는 1948년 구소련의 압제에 견디다 못해 영국 망명길에 오른다. 그리고 그는 42년간 자신의 조국에 돌아가지 못한다.

그러다가 구소련이 붕괴하기 한 해 전인 1990년 조국에 돌아온 쿠벨리크는 44년 전 자신이 섰던 그 자리에서 다시 ‘프라하의 봄’을 여는 지휘봉을 잡은 것이다. 그러니 그의 가슴이 얼마나 벅찼을지 짐작할 수 있다.



‘프라하의 봄’이 시작되는 오베츠니 둠은 우아한 아르누보 양식이다. 1912년 프라하 시민들의 성금과 알폰소 무하, 카렐 슈필라, 얀 프라이슬러 등 당시 체코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의 동참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이 연주되는 스메타나 홀은 1918년 10월 28일 체코슬로바키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공식 선포한 장소이기도 하다.



결국 쿠베리크는 이 모든 것을 다 계산해 ‘프라하의 봄’의 문을 열었고, 이 전통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프라하의 봄’을 시작하는 연주가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이라면, ‘프라하의 봄’을 끝내는 마지막 연주곡은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이다.

루드비히 반 베토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 그가 ‘프라하의 봄’을 끝내는 연주곡의 주인공이 된 건 교향곡 9번 ‘합창’의 위대함도 있지만 체코 시민들의 베토벤에 대한 특별한 애정 때문이다. 독일 태생으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주로 활동했던 베토벤이 왜 프라하를 사랑했고, 또 프라하의 자랑거리가 됐을까?

합스부르크 치하의 유럽에서 음악가는 대개 왕족이나 귀족들의 후원을 받아 음악 활동을 했다. 그런데 유독 그런 환경을 싫어했던 이가 베토벤이다. 그러다 보니 궁핍함을 면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 베토벤에게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귀족이 아닌 체코 프라하의 귀족인 로브코비츠 가문이 접근을 했다.

그리고 이 가문은 베토벤을 전폭적으로 후원하면서도 자신들을 위한 음악이 아닌 베토벤 본인을 위한 음악을 하라고 권했다. 이에 베토벤은 그의 위대한 교향곡들을 작곡했고, 기꺼이 3번 ‘영웅’, 4번 ‘전원’, 그리고 9번 ‘합창’을 로브코비츠 가문에 헌정했다. 프라하 성 내에 있는 로브코비츠 궁전(Lovkowicz Palace)에는 그 교향곡들의 원본 악보가 전시돼 있다.

또 프라하 인근의 카를로비 바리(Karlovy Vary)라는 온천 도시는 중세 이후로 유럽 귀족들의 휴양지로 유명했다. 끊임없는 창작 활동으로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늘 노출됐던 고전음악 시대의 작곡가들도 지친 심신을 달래는 장소로 체코를 자주 찾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음악 역사상 최고의 천재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모차르트는 빈의 귀족들과 합스부르크 왕족들에게 최고의 인기 스타였지만 말년이나 다름없는 31세 때인 1787년 건강 악화로 프라하에서 요양을 했다. 모차르트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프라하 시민들은 그를 극진히 대접했다.



프라하 시민들의 그런 열화와 같은 성원에 모차르트는 보답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로렌초 다 폰테의 대본을 가지고 오페라 <돈 조반니>를 작곡했고, 1787년 10월 29일 프라하 에스타테스 극장(Estates Theatre, 스타보브스케 극장이라고도 불림)에서 역사적인 초연을 했다.
 
그날 이후 프라하에는 새로운 수식어가 생겼다. ‘돈 조반니의 도시’. 그래서 프라하 시민들은 모차르트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선물을 한다. 노스티츠 백작과 프라하 시민들은 돈을 모아 모차르트를 기념하는 ‘얼굴 없는 유령’이라는 청동상을 제작해 그에게 선물했다. 모차르트는 청동상을 고향인 잘츠부르크로 가져가려고 했지만 너무 무거워 당시의 운반 수단으로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래서 모차르트는 청동상을 다시 에스타테스 극장에 기증했다.

잘츠부르크에서는 훗날 이 청동상의 모작이 만들어졌다. 1783년 노스티츠 백작이 세운 에스타테스 극장은 1984년 아카데미 8개 부문을 수상했던 영화 <아마데우스>의 촬영 장소로도 유명하다.
프라하 사람들이 모차르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자긍심은 또 있다. 1791년 12월 5일 모차르트는 빈에서 사망한다. 하지만 그의 장례식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에게 열광하던 빈의 귀족들과 시민들은 그의 죽음에 무관심했다. 모차르트의 장례식은 그의 결혼식이 열렸던 빈의 성 슈테판 성당 안이 아닌 그 밖 마차꾼들이 쉬는 공터에서 열렸다. 대주교의 집전도, 조문하는 귀족도 없이 부인인 콘스탄체와 두 아들만이 그의 장례식을 지켰고, 장례식을 마친 모차르트의 유해는 빈 외곽 성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다른 신원 불명의 주검들과 함께 한꺼번에 매장됐다.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를 선물 받은 프라하 시민들은 공분했다. 위대한 예술가의 형편없이 초라한 죽음을 방조한 빈 시민들을 비난했다. 그리고 비록 모차르트의 시신은 없지만 프라하 시민들은 성 비타 대성당(Katedrála sv. Vita)에서 모차르트의 장례식을 다시 하고, 그의 빈 관을 화려한 마차에 태워 카를교를 건너 구시가 광장을 돌고 에스타테스 극장에서 노제까지 지냈다.



에스타테스 극장이 1년 내내 오페라 <돈 조반니>를 공연하는 것과 별도로 체코 전통 마리오네트 인형극 <돈 조반니>는 프라하를 대표하는 문화 상품이 돼 있다. 오로지 인형극 <돈 조반니>만을 위한 국립극장도 있다. 물론 일부 클래식 애호가, 특히 오페라 마니아들은 인형극 <돈 조반니>를 맹비난한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와 달리 프라하를 찾는 여행자들은 카를교, 프라하 성과 함께 인형극 <돈 조반니>를 필수 관광 코스로 인식한다.

이처럼 프라하는 발길 닿는 곳이 모두 문화재고, 눈길이 머무는 곳 모두가 예술이다. 그래서 유네스코는 1989년 프라하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키기도 했다. 스메타나, 드보르작, 야나체크 등 체코의 음악가가 잠들고, 베토벤, 모차르트의 숨결이 길을 따라 흐르는 곳. 여기가 유럽의 음악 도시 프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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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17-04-14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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