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제 147호 (2017년 08월)

우리 시대 음악가들

현대음악의 여제, 작곡가 진은숙

[한경 머니=이현주 기자] 우리 시대의 클래식에 해당하는 현대음악은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을 반영한다. 수백 년 전 서양에서 향유된 고전·낭만주의가 아닌 동시대 작곡가들이 현대인들을 위해 만든 위로의 음악이자 창조적 언어다. 공기의 진동에 불과한 소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해 인간의 존재를 표현하는 음악의 특성을 고려할 때, 현대음악을 듣고 감상한다는 것은 현대라는 시공간 속에서 환희와 고통을 머금고 살아가는 우리와 나 자신을 이해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한국의 현대음악 작곡가로 맹활약하는 진은숙을 조명해보는 것은, 현대음악의 즐거움으로 향하는 여정이 되기를 바라는 기대에서다.
도움말 원유선 서울대 음악학 박사과정·<오페라 속의 미학: 몬테베르디부터 진은숙까지> 공동 저자 | 참고 도서 <진은숙, 미래의 악보를 그리다>·<현대음악의 즐거움, 서울시향 ‘아르스 노바’ 10년의 기록>


한국의 젊은 음악가들이 잇따라 낭보를 전해오고 있다. 쇼팽 콩쿠르의 스타로 부상한 조성진에 이어, 지난 6월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이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1위를 차지하며 한국 클래식 음악의 저력을 다시 한 번 보여줬다. 같은 무대에서 떠오르는 신예 김다솔은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세계 3대 콩쿠르를 비롯해 유수의 경연 무대를 휩쓰는 차세대 음악가들의 질주에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도 놀랐다.
클래식 종주국 유럽에서 이제 한국인 음악가들은 없어서는 안 될 파트너이자 주역으로 부상했다. 크고 작은 오페라 극장과 오케스트라 무대에서 맹활약하는 음악 인재들이 피아노, 성악, 바이올린, 첼로 등 분야별로 포진해 있다. 길지 않은 한국의 클래식 음악의 역사에서 이뤄낸 쾌거로 평가되는 한편, 실력 있는 예술가들이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는 국내 연주 환경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시즌마다 다른 레퍼토리로 관객을 만나는 연주가에 비해 유독 작곡가 중에서는 슈퍼스타를 만나보기 어려웠다. 특히 20세기 이후 클래식 음악 경향인 현대음악 작곡가는 운동으로 보면 비인기 종목에 해당한다. 유려한 선율과 잘 짜인 화성이 아닌 여러 가지 새로운 실험(무조음악, 12음기법 음악, 음렬음악, 음향음악, 전자음악, 우연음악 등)을 통해 독창적인 소리를 만드는 것에 대해 낯설거나 난해하다는 반응이 대세였다. 가장 유명한 현대음악, 존 케이지의 ‘4분 33초’만 하더라도 음악사적으로는 우연성 음악이나 대중에게는 ‘현대음악=추상적’이라는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러한 현대음악으로 세계 클래식 음악계의 중심에 우뚝 선 이가 진은숙이다.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인 음악가로 꼽혀 온 정명훈, 조수미를 비롯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연주자나 지휘자에 비해 유명세는 적지만, 실제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은 한국의 작곡가가 바로 진은숙이다. 그의 작품이 해외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역으로 한국 사회에 창작 진영에 서 있는 작곡가라는 존재를 각인시켰다.

현대음악으로 세상과 소통하다
진은숙은 독일을 주 무대로 지금 가장 주목받는 현대음악 작곡가 중 한 명이다. 대중적으로는 아직 무명일지 모르나, 이름만 대면 알 법한 사이먼 래틀, 구스타보 두다멜, 켄트 나가노 등 세계적인 지휘자들의 러브콜을 받는 현대음악계의 거장이다. 베를린필하모닉, 런던심포니, LA필하모닉, 시카고심포니, 로열오페라하우스 등 최정상 단체에서 그에게 창작곡을 위촉하고 연주한다. 향후 5년의 작업 일정이 꽉 차 있어 요청의 90%는 돌려보내야 할 정도로 현재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특히 2000년대 이후 음악 전문가들 사이에서 중요한 인물로 언급돼 왔다. 작곡가의 경우 일류 오케스트라 및 지휘자와의 협업, 저명 음악학자와 평론가들의 평가, 굵직한 수상 실적 등이 위상을 가늠케 하는 척도가 된다. 진은숙은 작곡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그라베마이어상(2004년)을 비롯해 쇤베르크상(2005년), 피에르 대공 작곡상(2010년) 등 저명한 상들을 휩쓸면서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은 후, 지속적으로 평론가들과 음악학자들의 글과 논문에서 언급되고 있다. 또 그의 작품들은 거장들의 곡을 출판하는 세계 최대의 음악출판사 부시 앤 혹크스(Boosey & Hawkes)에서 독점 출판된다.
동시대 예술가로서의 진은숙의 삶과 음악에 대해 다각도로 접근한 책도 독일에서 먼저 출간됐다. <진은숙, 미래의 악보를 그리다>는 진은숙과의 인터뷰, 그리고 세계적인 음악 평론가들의 평론을 모아 수록한 책이다. 독일 학자에 의해 출판돼 한국어로 번역됐다. 진은숙과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춰온 지휘자 켄트 나가노는 헌사를 통해 “진은숙의 작품들을 접하며 틀에 얽매이지 않는 사고, 독창적인 상상력, 강렬하고 복합적인 개성 등 그녀의 놀라운 재능을 단번에 알아보았다”며 “그의 작품의 음악적 텍스처는 놀랍도록 다채로운데 휘황찬란하게 이리저리 부유하며 반짝거리고 미끄러져 내리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그와 대조적인 어둡고 깊은 부분도 잘 알고 있으며 유쾌하지 않은 것에 천착해 파고들기도 한다”고 평가했다.
또 영국의 현대음악 작곡가 조지 벤저민은 “한국과 전 세계의 현대음악을 연결하는 중개자로서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며 “진은숙은 재기 넘치는 풍부한 상상력의 음향들을 현대적인 음악으로 만들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작곡가로 그의 작품들은 종종 유머가 넘쳐나며 때로는 초현실주의적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마음을 사로잡는 흥미로운 꿈의 세계를 연상시킨다”고 언급하고 있다.

윤이상, 그리고 진은숙
독일이라는 주 무대는 우리 시대, 우리 음악가의 계보에서도 남다른 의미를 갖는 장소다. 진은숙 이전에 한국의 현대음악 작곡가로 획을 그은 인물이 바로 윤이상이다. 한국에 서양 음악이 전해진 이후 국내 1세대 현대음악의 대표 주자이자, 세계적인 한국 작곡가로 이름을 알린 첫 번째 인물이다. 그는 한국의 전통적인 요소들을 현대음악 안에 녹여내면서 동서양의 가교 역할을 했으며 독일에서 기악곡 101곡, 성악곡 17곡을 남겼다. 생존 당시 평론가들은 그를 ‘현존 유럽 5대 작곡가’로 평가했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윤이상의 생애와 음악 세계를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거장임에도 생전에는 한국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했던 음악가,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현대음악에 대한 관심과 함께 현역인 진은숙도 거론되고 있다. 진은숙이 영국 로열오페라단을 위해 작곡한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초연된 장소는 2007년 독일 뮌헨의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이다. 진은숙 이전 기록은 윤이상이 썼다. 35년 전, 같은 장소에서 윤이상의 오페라 <심청>이 볼프강 자발리쉬 지휘로 초연된 것이다. 독일에서도 보수적인 지역으로 꼽히는 뮌헨에서 한국인 출신의 두 작곡가가 35년의 시간을 두고 오페라 공연을 성공시켰다.
오페라로 연결되는 윤이상과 진은숙의 인연은, 강석희라는 한국 최초의 전자음악 작곡가이자 음악제 기획자를 중심으로 3세대 계보로 이어진다. 강석희는 베를린에서 윤이상이 특별히 가까이 두고 사사한 애제자였다. 진은숙이 서울대 작곡과 재학 중 사사한 이가 강석희다. 진은숙은 “강석희 선생님이 없었으면 지금의 내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의 첫 번째 제자이자 수제자였다. 1984년 토론토와 몬트리올에서 열린 세계음악제에서는 윤이상, 강석희, 진은숙의 한국 작곡가 3세대의 곡이 함께 발표되면서 언론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은 바 있다.
진은숙이 독일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1980년대는 현대음악이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20세기 초 독일에서 움튼 현대음악의 시작은 해방과 탈피였다. 서양 음악의 역사에서 조성음악의 전통이 바로크 이후 후기 낭만에 이르기까지 진화를 거듭해 왔다면, 19세기 리하르트 바그너에 이르러 조성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실험을 통해 조성음악의 확장을 경험한 후 조성으로부터의 해방이 진행됐다. 현대음악의 선구자, 아놀드 쇤베르크의 12음기법은 장음계와 단음계를 기본으로 한 3화음 중심의 화성적 조성 체계에서 벗어나 12개 음을 자유롭게 사용하며 다양한 불협화음 역시 다양하게 다룬다. 독일에서 새로운 현대음악의 조류인 신음악(Neue Musik)이 시작된 이후 음악 경향이 다양한 흐름으로 전개돼 왔다면, 1980년대 작곡가들은 스스로 어느 길을 찾아 나서야 할지 선택해야 했다.
진은숙의 음악은 그의 스승 뢰르지 리게티의 영향을 받고 있다. 리게티는 특히 1960년대 나타난 음량음악의 대가다. 리게티, 윤이상, 펜데레츠키 등이 주도한 새로운 경향이다. 현대음악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지나며 12음기법의 영향을 받은 고도의 수학적 조직의 의한 총렬음악, 음악의 매체를 개발하고자 시도한 전자음악, 존 케이지 등의 우연성 음악 등으로 활성화됐다면, 음량음악은 음을 개별적 요소로 보기보다는 음향 층의 흐름을 중시하며, 아주 작음 음량부터 큰 음량에 이르기까지 독창적인 음향을 강조했다.
리게티는 개별 선율을 촘촘하게 겹치면서 거대한 음향 층, 하나의 음향 덩어리를 형성하는 게 특징이다. 음향음악은 음색음악이라고도 불리는데, 음색 면에서 밝음과 어두음, 집중과 풀림의 과정이 흐르듯 나타난다. 대표작 ‘아트모스페르’는 대기라는 뜻처럼 마치 우주 공간에 무수한 별들의 무리가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진은숙의 음악도 이와 같은 리게티의 음향음악에 영향을 받아 몇 가지 특징을 보인다. 무엇보다 음향이 매혹적인 음색으로 세련되게 구현된다. 개별 악기를 섬세하게 배합해 수공예적으로 촘촘히 쌓아 올려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음색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평가를 얻는다.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경우 특히 수십 개에 이르는 다양한 타악기의 향연이 귀를 즐겁게 한다. 오케스트라 안에 고전 악기를 다양하게 섞기도 하지만, 작곡가가 일상에서 가져온 사물인 알람시계, 쓰레기통과 같은 것들도 쓰인다.
다채로운 음색과 함께 치밀한 구조는 그의 작품을 이끄는 또 하나의 힘이다. 음악 감상에서 많은 청중들이 유려한 선율을 좇아가며 감동을 느끼는데 비해 진은숙의 음악은 아름다운 선율과 화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귀를 잡아끄는 매력이 있는 이유는 음악 어법이 뛰어나기 때문이라는 게 진은숙을 호평하는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악보만 보더라도 캐릭터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음향 구조로 표현된다. 예를 들어 앨리스는 공작부인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개구리 하인에서 어떻게 하면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느냐고 세 번 묻는다. 앨리스는 점점 인내심을 잃어 가는데, 이때 다양한 글리산도(glissando: 흘러가듯 미끄러지는 전개)로 표현된다. 각각의 에피소드를 특징적인 음향의 토대 위에 배치하고 있다.
진은숙은 다작을 하는 작곡가는 아니다. 그는 여러 인터뷰를 통해 창작의 과정을 “작곡할 때마다 지옥을 경험한다”고 표현할 정도다. 작곡을 할 때마다 벌레가 된 듯한 초라함을 느끼고 지옥에 다녀오는 것 같은 고통이 점점 더해가 영광으로도 보상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린 시절 개척교회 목사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피아노 반주를 시작한 이후 줄곧 삶이 곧 음악이고 음악이 곧 삶인 인생을 살았다.
진은숙을 연구하는 음악학자 이희경은 “진은숙은 질적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작품을 많이 쓰지 않는 원칙을 고수하기 때문에 1985년 창작 활동을 시작한 이래 쓴 작품이 30여 곡에 불과하다”며 “심지어 예전에 쓴 곡 중 마음에 들지 않는 곡은 작품 목록에서 빼 버리기까지 하는 치열한 작가 정신이야말로 오늘날의 진은숙을 있게 한 원동력이며 세계 음악계에서 차지하는 그의 존재 의미이자 가치다”라고 언급했다.
그렇게 살아남은 30여 곡 중 피아노 에튀드 시리즈, 생황협주곡 ‘슈’,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이 명작으로 꼽히는데, 특히 오페라의 경우 언어유희를 통해 음악적 재미를 배가했다는 점도 독특하다. 아크로스틱(acrostic: 각 행의 첫 글자를 아래로 연결하면 특정한 어구가 되게 쓴 시) 기법으로 쓰인 대사에 과장된 음향을 입혀 고전음악에서 유머를 자아낸다. 또한 쇤베르크가 <달에 홀린 피에로>에서 처음 쓴 스프레히 스티메(sprache stimme) 기법, 즉 말도 아닌 노래도 아닌, 말하듯 노래하는 연극적 기법도 극의 재미를 더한다. 이와 같이 여러 음악적 장치로 즐거움을 만들어낸 건 현대음악으로 대중과 소통하려는 작곡가의 의지로 엿보인다.
진은숙이 서울시향과 함께 10년 넘게 현대음악 시리즈 ‘아르스 노바’를 선보인 것도 그들의 음악이 아닌 우리 시대, 우리 음악에 대한 씨앗을 확산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진은숙은 ‘아르스 노바’ 10년을 기념하는 기록에서 “한국 청중들에게 국내에서는 접하기 힘든 현대음악, 자주 연주되지 않아 청중의 외면을 받았던 작품들을 소개하려는 취지였다”라고 설명했다.
음악사의 대작으로 남아 있는 작품들과 작곡가들도 작곡 당시에는 청중과 비평가들에 의해 비판받기도 했다. 진은숙은 바로 이러한 점에 주목하고 있다. 현재 거부당하고 있는 불편한 현대음악 중에서도 분명 미래에 대중의 사랑을 받을 작품들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말한다. “음악이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져볼 때, 물리적 측면에서 음악은 그저 공기의 진동에 불과하다. 인류는 그 공기의 진동이 소리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알아낸 후 그 소리를 조합해 자신들의 존재를 표현하는 음악을 발견해냈고, 긴 역사 속에서 수많은 형태의 음악을 만들어 왔다. 음악이란 지구상의 인간들만이 누릴 수 있는 엄청난 특혜이자 인류의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이러한 창의적인 음악적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는 시공간에 우리가 동참한다는 것,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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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17-08-09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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