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제 148호 (2017년 09월)

숲속에 잠든 최고 권력, 조선 왕릉을 만나다

최종희 교수 & 이현주 기자의 최고의 뷰

[한경 머니=이현주 기자] 조선 왕릉은 조선왕조 519년 통치의 역사가 집약된 결정체다. 태조 이성계 이후 역대 27대 왕과 왕비의 왕릉 40기를 들여다보면 ‘왕가의 정치학’부터 당대의 사상과 철학, 미의식을 모두 엿볼 수 있다. 오랜 세월 위엄과 위용을 자랑하며 조선의 정신에 대해 얘기하는 우리 선조들의 걸작품, 그곳에 최고의 뷰가 있다. 사진 이승재 기자·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동쪽에 있는 아홉 능’ 동구릉에서 ‘목릉’ 전경. 왼쪽부터 선조, 의인왕후, 인목왕후 순으로 능이 조성돼 있다. 두 왕후의 묘 사이에는 수풀이 우거져 있어 사이가 좋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조선 왕릉이 세계문화유산이 되기까지 여러 요인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수백 년에 걸쳐 이어져 온 살아 있는 유산(living heritage)으로서의 가치를 평가받은 게 결정적이었습니다.”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을 둘러보던 중 최종희 배재대 교수가 말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 왕조의 모든 왕의 무덤이 보존돼 있는 조선 왕릉. 그중 ‘동쪽에 있는 아홉 능’인 동구릉은 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을 비롯해서 24대 헌종과 효현·효정왕후의 ‘경릉’까지 총 아홉 개의 능이 자리한 약 191만7355㎡ 규모의 왕릉군이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 왕릉 40기 가운데 가장 많은 능이 모여 있어 조선 왕릉의 다양한 능의 형식과 시대에 따른 변화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신들의 정원’
입구를 지나 능에 진입하기까지는 ‘속세 공간’에 해당한다. 한 인간을 떠나보내는 장례의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각 문화의식을 반영한 공간과 제도를 반영하고 있는데, 조선 왕릉은 죽은 자가 머무는 공간이면서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성역이라는 개념 아래 능이 조성됐다. 이에 따라 공간과 동선을 성(聖)과 속(俗)으로 엄격히 나누고 있다.
거대한 능역의 동쪽 입구에 위치하는 재실(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이 속세의 길의 시작점이다. 왕릉으로 들어가는 홍살문(紅箭門)까지 이어진다. 이곳 재실에서 전주이씨대동종약원 관계자들이 정종대왕비 정안왕후의 제사 준비에 한창이었다.
마침 능을 찾은 8월 11일은 이른 오전부터 폭염주의보가 내린 날이었다. 찜통더위에도 제관 복식을 갖추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예법에 따르는 모습이 사뭇 진지해 보인다. 왕의 사후 3년이 지나면 길례(吉禮)로 치러짐에 따라 분위기는 엄숙하지만 일종의 축제와 같다고 한다.
“조선왕조 27대 모든 왕과 왕비의 기일마다 제향 의식을 치러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전후를 제외하곤 수백 년 동안 매년 전통을 지켜 왔어요. 태조 이성계의 제향 때는 1박 2일 동안 지금보다 10배 규모의 사람들(약 1000여 명)이 모이는데 장관이에요.”
유교적 세계관이 확고한 조선시대에는 죽은 통치자의 무덤에 참배하고 제사를 지냄으로써 살아 있는 통치자인 왕의 정통성을 공고히 하는 유지 장치로 삼았다. 이 전통이 600여 년 가까이 이어져 오고 있다.
오늘날까지 제례 문화 가치를 고수하고 신성시하는 이들에 의해 평범한 무덤은 ‘신들의 정원’으로 격상된다. 제향의 전통은 조선 왕릉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가교이며, ‘온기’를 가진 살아 있는 유산으로서의 증거인 셈이다.
성역과 속세가 만나는 ‘제향 공간’은 왕릉 입구의 홍살문에서 시작해 정자각(丁字閣)까지 이어진다. 홍살문에 이르면 비로소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왕릉의 풍광을 느낄 수 있다.
정자각은 왕이 선대왕의 제사를 모시던 공간으로, 조선 왕릉의 독특한 건축물로 꼽힌다. 살아 있는 최고 통치자, 왕이라 하더라도 신의 길로 다닐 수는 없다. 제향 공간의 양 끝점인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는 넓은 모양의 박석으로 참도(參道)를 냈는데, 두 개의 길로 구분돼 있다.
신이 다니는 ‘신도’와 왕이 다니는 ‘어도’다. 신도가 어도보다 한 단 정도 더 높다. 왕은 어도를 딛기 전 고개를 숙여 네 번 절한다. 정자각에 오를 때에도 동입서출(東入庶出)에 따라 산 자는 동쪽으로 올라 정자각 정전에서 제례를 모신 뒤 서쪽 계단으로 내려온다. 이때 죽은 자는 정자각의 정전을 통과해 뒤로 연결되는 능침 공간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조성됐다.
“유가의 미의식인 ‘규범적 질서’가 명확히 드러나는 거죠. 여기 정자각 정전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왕릉의 봉분이 보이게 돼 있어요.”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가는 길은 신도(왼쪽)와 어도(오른쪽)로 구분돼 있다.


정자각 뒤로 봉분까지는 오롯이 성역, ‘능침 공간’이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봉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언덕과 같은 높은 산비탈이 있을 뿐이다. 평균 높이 해발 53m. 생각해보자. 조선 왕릉에서 최고의 뷰는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공간의 주인이 머무는 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일 것이다. 봉분이 유독 높게 조성된 것은, 최고 권력자의 신분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머무는 자를 위한 최고의 경치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탁 트인 정원이다. 앞서 신들의 정원이라 표현했던 것은 단 한 명의 죽은 왕을 위해 조선 최고의 풍경을 만들어냈다는 데 있다. 조선 왕릉 풍경의 진면목은 단 한 명의 왕을 위해 어떤 공간에 어떤 정신을 담아 어떤 기술과 예술을 담아냈는지, 바로 여기서 드러난다.
한양 도성 안에 위치한 궁궐의 경우 최고의 입지를 갖기 위해 삼각산, 남산, 관악산, 인왕산, 또한 명당수인 청계천, 한강을 주변에 두는 공간 구조를 갖는다. 왕이 정치를 다한 후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때의 공간 구조도 이와 흡사하다. <택리지>의 ‘복거총론’ 편에 등장하는 양택
(살아 있는 자를 위한 풍수)과 음택(죽은 자를 위한 풍수) 이론에서 알 수 있듯이, 무덤으로서의 길지는 곧 자손의 번식과 일가의 번성으로 연결된다. 왕릉을 조성할 때 최고의 입지를 찾은 배경은 선대왕을 위함이기도 했지만 조선 왕실과 국가의 번영, 후대 왕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서도 중요한 이슈였다.
봉분을 중심으로 보자. 뒤쪽으로는 주산(主山)이 있다. 대개 산의 기운이 응축돼 있다는 산의 중허리 산비탈에 위치해 있는데, 그 기운을 한데 모아 봉분으로 보내는 특별한 공간이 잉(孕)이다. 의도적으로 흙을 쌓아 기운을 응축한 곳으로, 최 교수는 “왕릉에서 가장 강한 에너지가 센 곳이다”라고 설명한다.
그 기운을 받은 봉분은 좌우로는 청룡과 백호의 산세를 이루고 앞쪽으로 물이 흐르며 맞은편으로 안산(案山)이, 멀리는 조산(朝山)이 보이는 음택에 입각해 조성됐다. 또한 봉분 주변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을 비롯해 각종 석물들이 배치돼 있는데 새겨진 문양을 통해 조선의 미의식을 분석할 수 있다.

에너지를 응축한 잉에서 내려다본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잔디 대신 억새풀이 자란다. 앞산 능선에 솟은 아파트만 아니면 수백 년 전 풍경과 거의 흡사하다.


자연미 극대화한 최고의 뷰 
“와, 좋네요! 무덤이라기보다는 그냥 자연 같아요. 마치 숲속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느낌이에요.” 조선 왕릉 최고의 뷰를 감상한 이들이 내뱉는 소감은 이와 같았다. “맞습니다. 조선 왕릉은 ‘하늘에서 살포시 내려앉은’ 듯한 모습이에요. 봉분만 빼면 모두 자연이에요. 인간이 개입한 것은 몇 개의 건축물이고, 나머지는 다 산이고 숲이에요. 모든 왕릉마다 이런 풍경을 만들기까지 어떤 이론이나 정보, 원칙에 근거했을지, 또 어떻게 그곳에 이상관이나 자연관, 또 왕의 권위와 미의식 등을 다 담았을지를 보면 놀라워요. 지형을 거스르지 않는 자연친화적인 풍광을 만들면서 힘이나 미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다한 거예요. 그러면서도 세부적으로는 정교함을 살리고 있습니다.”
인공미보다 더 어렵고 고차원적이라 평가받는 게 바로 자연미다. 조선 왕릉은 바로 이러한 자연미를 극대화하는 최고의 뷰를 자랑하고 있었다. 주변으로는 ‘용의 비늘’을 닮은 적송을 비롯한 소나무와 전나무, 잣나무 등이 둘러쳐 있다. 특히 봉분에서 내려다볼 때 손에 잡힐 듯한 하늘과 가슴에 닿을 것 같은 경관이 전통적으로 최고로 꼽혔다.
재밌는 점은 왕릉의 입지와 공간을 분석하면, 왕가의 정치학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총 40기의 왕릉 중 최고의 풍경을 꼽으라면 많은 전문가들이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세조와 정희왕후의 ‘광릉’을 꼽는다. 조선 왕릉은 기본적으로 도성과 가까운 곳에 입지하고 있다. 경복궁과 창덕궁에서 100리, 약 40km 안에 위치해 있어 왕이 하루 사이 다녀올 수 있도록 했다. 광릉의 경우 현재 국립수목원이 있는 울창한 숲속에 단독으로 조성돼 있다.
“왕릉이 어떤 건 9개, 5개, 3개 등으로 뭉쳐 있는데, 태종이나 세종처럼 왕의 힘이 세면 새롭게 만들었어요. 왕릉이 결정되는 순간, 주변 330만㎡(100만 평)의 사대부는 묘를 다 파서 다른 곳으로 이장을 가야 했어요. 권문세족의 힘이 세면 기존의 왕릉에 들어가야 했고, 세조는 살아생전에 임상 좋은 곳에 터를 잡았죠. 정원에 정치가 개입돼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세조의 능에서 바라본 풍경은  그야말로 깊은 산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다. 봉분에서 바라보는 앞산은 근경과 원경의 능선이 굽이치듯 겹쳐 보이는 게 경치로 으뜸이다. 또 살아생전 정치를 못하면 죽어서까지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 흥미롭다. 광화군과 연산군의 무덤은 능의 지위를 받지 못한 왕가의 무덤인 ‘능, 원, 묘’ 중 묘로 조성돼 세계문화유산에서도 제외돼 있다. “세계문화유산 관계자들이 탐방을 왔을 때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를 못하면 무덤에도 불이익을 받는 스토리텔링이 재밌다면서 왜 유산 등재를 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정도였어요.”

광릉숲 임상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세조와 정희왕후의 ‘광릉’ 항공 뷰. 하트 모양이다. 이와 같은 왕릉의 숲은 도심 속‘허파’다.


왕들의 사후 공간, 조선의 정신을 잇다
1392년 왕조 개창 이후 910년까지 519년 역사 속에 총 27명의 최고 통치자들이 존재했다. 왕들의 이야기는 이제 기록 속에 스며 있다. 만약 그 흔적을 가까이서 느껴보고 싶다면 어느 곳으로 가야 할까.
서울의 5대 궁궐은 왕들의 ‘생활 공간’이었다. 왕이 죽으면 풍수적 명당에 묻혔다. 왕들의 ‘사후 공간’이다.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가 모두 모인 종묘는 ‘제례 공간’에 해당한다. 이 세 개의 연속된 공간 가운데 왕과 왕비의 개개인의 취향과 특성을 살려 ‘자기만의 방’을 갖는 곳은 왕릉뿐이다. 그래서 “조선의 정신성은 엄밀히 보면 궁궐이 아닌 종묘에 있으며, 왕릉으로 분실돼 있다”고 한다.
왕릉은 왕의 사후 5개월 동안 조성됐다. 왕이 세상을 떠나면 곧바로 도감이 설치되고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왕릉을 조성한 후에는 종묘로 이동했다. 진시왕릉과 같은 중국 왕릉의 경우 황제가 살아 있을 당시에 조성이 되지만 조선 왕릉은 왕이 세상을 떠난 뒤 시작된다는 점이 다른 부분이다. 5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완성도 높은 왕릉을 조성할 수 있었던 배경은 조선의 뛰어난 기술과 예술이 자리하는 동시에 조선 시대를 떠받혀 온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오늘날 눈으로 확인되는 왕릉은 수백 년 전 사람들의 면모를 재발견하게 한다. 수백 년 동안 그 모습 그대로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으로 볼 때 5개월의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부실 공사는 없었다. 오늘날까지 견고하게 남아 있다는 것은 최고의 기술, 그리고 최고의 마음이 모인 결과라는 방증이다. 6000~9000명의 백성들이 왕의 마지막 가는 길을 꽃길로 한 땀 한 땀 수놓은 것이다. 조선 대다수의 왕이 성군이 아니었음에도 백성들의 삶이 고단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조선을 이끈 원동력은 리더의 힘일까, 백성의 힘일까. ‘충의 왕릉’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이와 함께 체계화된 기록도 왕릉의 위용과 함께 언급되는 조선의 힘이다. 모든 세세한 과정은 조선의 전례서인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기초해 일관성 있는 모습으로 조성됐는데, 능에 진입하는 방식, 배치 방식, 석물의 형태 등에서 고려 시대를 계승하면서도 조선만의 차별성을 지닌다.
조선의 제례 문화는 실록과 의궤, 능지 등에서 아주 자세하게 소개돼 있다. 왕릉 조성에 관한 과정과 세부 기술과 물자, 투입된 인원 등이 글과 그림으로 남아 있어 당시의 기술과 사상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능참봉(왕릉을 지키던 이)에게 하루 녹봉을 얼마나 줬는지까지 일지로 다 남겼어요.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우리의 기록 문화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문화재 소실이 많은 한국에서, 조선 왕릉이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채 현존하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 대목이다. 궁궐은 소실되고 침탈됐을지언정, 왕릉은 임진왜란 때 선릉과 정릉을 제외하곤 일제강점기에도 도굴의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7~8톤 무게의 화강암인 혼유석과 석회로 채운 석실 등 도굴을 막기 위한 빗장들도 있었지만, 그만큼 “목숨 걸고 지켰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이어진다. 조성 당시부터 현재까지 명확한 관리 주체, 국가에 의해 통합적으로 관리돼 왔다. “세계인들이 크게 놀랐던 점이 모든 게 진짜라는 거죠. 봉분부터 석물, 문양 하나까지 가짜가 하나 없고 재현한 것도 아니에요. 진정성 있는 문화유산이라는 측면에서 가치를 인정 받았습니다.”
조선 왕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조선의 정신을 또 하나 꼽으라면 ‘효’일 것이다. 왕릉을 조성하는 당사자는 왕 본인이 아닌 그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정조가 그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위해 만든 경기도 화성시의 ‘융릉’은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마음을 절절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왕이 취임해서 처음으로 하는 일이 아버지를 위해 왕릉을 조성하는 것이었어요. 정조는 그의 꿈인 화성 땅에 자신의 능보다 추존왕을 위한 능을 더 웅장하게 조성했고,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를 위해 다른 왕릉과는 달리 편안하고 아늑한 땅을 찾았어요. 또 사도세자의 애민 사상을 반영해 백성들이 곤궁할 때 먹을 수 있도록 도토리나무를 심었습니다.”
사랑이든 애증이든, 이별의 순간이 오면 어제 못다 나눈 정이 회한처럼 몰려오곤 한다. 그렇게까지 정성을 다한 정조의 마음에 공감하다 보면 생각의 귀결점은 나 자신으로 모아진다. ‘효의 왕릉’에 서서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총 4곳의 조선 왕릉을 방문한 뒤, 가장 기억에 남는 풍경은 사실 사람들이다. 왕릉의 ‘문지기’ 역할을 하는 현장 인력은 매 순간 먼발치에서 ‘매의 눈’으로 취재진의 동선을 따르고 있었다. 최고의 숲을 유지하기 위해 마사토(흙)로 성토하고, 어제의 신의 정원을 오늘의 시민의 정원으로 만들기 위해 숲에 길을 내고, 길이 상할까 전기차로만 운행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찌 보면 이기적인 동기로 만들어진 왕릉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융건릉의 빼어난 숲길은 ‘생각하는 길’로 추천할 만하다.

고종이 있는 ‘홍릉’의 정자각 전경. 석물들이 봉분 옆이 아닌 정자각 앞에 줄지어 있다는 점이 특징.

추존왕인 사도세자를 위한 융릉. 정조의 능에는 없는 병풍석이 있으며 더 화려하다.

정조와 효의왕후의 ‘건릉’을 둘러싼 무석인과 문석인. 섬세한 문양으로 호평받는다.

정조와 효의왕후의 ‘건릉’을 둘러싼 무석인과 문석인. 섬세한 문양으로 호평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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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17-09-11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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