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제 165호 (2019년 02월)

용광로 속 인생, <불> 연작으로 승화

2019년 1월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열린 김수수 개인전 장면


LIFE • Artist 김윤섭 소장의 바로 이 작가 - 김수수

[한경 머니 =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미술사 박사]국내 미술계에 20대의 무서운 신예 회화작가가 등장했다. 최근에 <불>의 연작으로 큰 주목을 받는 김수수 작가가 주인공이다. 흥미로운 점은 구상과 비구상 작품을 넘나드는 광폭(廣幅)의 작품 세계를 선보인다는 점이다.

김수수 작가는 지난해에만 국내를 대표하는 공모전인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과 단원미술제 본상을 연달아 수상했다. 20대 후반이란 젊은 나이를 감안하면 쉽지 않은 성과다. 더욱이 비구상 작품으로 대상을 거머쥔 지난해 이전에도 이미 군복무 기간이던 2014년에 제4회 대한민국호국미술대전 대상을 수상(서울 중앙박물관)했으며, 2016년엔 홍군대장정 80주년전 3등상(중국 베이징 중국미술관) 등을 수상했다. 특히 2016년은 제대 후에 복학해 베이징의 중앙미술학원 유화과에 재학 중인 상태였다.

“지금의 작품을 시작한 것은 우연한 계기였습니다. 2017년 중순 한 일간지 신문의 기사를 읽다가 아주 흥미로운 장면을 발견했습니다. 화면을 꽉 채울 만큼 엄청난 불길을 마주하며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묘한 흥분감이 일었습니다. 무작정 사진 속 장소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런데 사진 속 용광로에 도착해 정신없이 사진을 찍다가 어느 순간 손을 멈추게 됐습니다. 눈앞에서 그 단단했던 쇳덩이들이 어느새 물처럼 녹아내려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장면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온갖 감정들로 때 묻고, 많은 관계 속에 상처받으며, 수많은 시행착오로 덕지덕지한 우리의 삶도 일순간에 덧없이 사라집니다. 용광로에서 우리의 인생을 마주한 것입니다.”

김수수 작가의 <불> 시리즈는 그렇게 ‘용광로의 숭고한 노동 현장’에서 태어났다. 단지 이전 작품들과 차이가 있다면, 노동하는 모습 자체가 아니라 그 ‘주인공의 삶에 대한 의지’에 주목했다는 점이다. 쇠가 녹아내려 새롭게 태어나는 용광로야말로 김 작가에겐 그 노동의 가치를 시각적으로 구현해낼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인 셈이다. 또한 사막의 신기루처럼 용광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의 기운’이 연출하는 오묘한 실루엣을 온전히 화면으로 옮긴 것이다. 특히 대형 화면에 검은색과 흰색의 마주하거나, 서로 다른 색조가 긴장과 이완으로 조우하는 구성이 아주 인상적이다. 인위적인 시각적 효과보다 최소한의 간섭과 절제된 화면 구성을 만들어내는 채색 기법이 김 작가 화법의 핵심을 이룬다.

그의 작품이 지닌 또 하나의 특징은 최소한의 회화적인 터치만을 살린 평면성이다. 그 완성 과정은 녹록지 않다. 먼저 캔버스 바탕에 유화물감으로 기본 밑칠을 하고, 붓에 물을 묻혀 얇게 쓸어내리며 펴주는 작업을 수십 회 반복한다. 이때 유성인 유화물감이 수성인 물을 만나 자연스럽고 극적인 반발작용을 활용한 결과다. 이 과정을 며칠간 완전히 건조시키며 여러 차례 반복해야 일정한 두께와 질감을 얻게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견고한 바탕칠 위에 최종적인 색감 층을 올릴 때 ‘한 번의 붓질’로 쓸어내려 완결해야 한다는 점이다. 대략 10호(53×45cm) 이하의 소품이든, 100호(162×130cm) 이상의 대작이든 예외는 없다. 일명 화면 전체를 한 번의 붓질로 덮는 ‘전면일필법(全面一筆法)’은 김 작가 작품을 지탱하는 근간이나 마찬가지다.

“화면의 크기에 따라 일필로 마무리하기 위해서 편편한 붓 여러 개를 나란히 붙인 특수한 붓을 자체 제작해서 사용합니다. 이는 비록 캔버스에 유화물감을 사용하는 서양화이지만, 마치 화선지에 일필의 흔적으로만 완성하는 동양 전통 회화의 ‘일필휘지(一筆揮之)’ 기법과 생략의 ‘여백정신(餘白精神)’을 염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림의 마지막 완성 단계에서 발휘되는 내리긋기의 간결하고 단순한 미학은 작품의 명상적 깊이를 더해주는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작품의 주제를 ‘몰아(沒我)’로 삼고 있습니다. 굳이 ‘자기를 잊고 있는 상태’ 혹은 ‘자신을 숨기거나 특성을 없애다’라는 사전적 의미를 들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색조로 절제된 미감을 전하려 노력합니다.”

보통 아무리 큰 붓이라도 10호 이상의 화면을 단번에 마무리할 수 있는 기성품 붓을 시중에서 구하긴 어렵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제작 기법을 완성하기 위해선, 어느 작가이건 그만큼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김 작가의 <불> 연작은 오랜 기간 동안의 시행착오를 거쳐 자신만의 숙련되고 노련한 마무리 덧칠 기술을 완성한 결과다. 특히 흑과 백, 물과 불, 음과 양 등 상반된 ‘극과 극의 하모니’를 시각화시키는 데 용이한 수단이 됐다. 이러한 극점의 조화로움으로 김 작가가 추구해 온 화두(話頭)는 ‘몰아(沒我)’다. 이는 삶의 희로애락에 스민 다양한 감성을 관조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 단단한 쇳조각이 불을 만나 물처럼 본연의 형체를 벗어버리듯, 동시에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수행의 과정’을 녹여내고 있다.

1 불, 캔버스에 유채, 130×162cm, 2018년,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 수상 작품 2 불, 캔버스에 유채, 227×181cm, 2018년


삶의 무게는 자신에게 얽매이면서 비롯된다. 그래서 누구나 그 자아(自我)를 내려놓기 위해 여념이 없을 것이다. 또한 인간 무의식 속 존재와 현실감이 어떻게 부딪쳐 상응하는가를 예리하게 감지할 수 있어야만 새로운 창조도 가능하다. 분명 무아(無我)와 몰아(沒我)의 경지는 삶의 자유로움을 얻는 유용한 관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몰아의 경지가 현실 원리를 무시하고, 무의식적 충동이나 욕망 혹은 환상에만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아나 몰아의 개념은 ‘순환적인 삶을 관통하고 이해하는 키워드’로 작용한다. 김 작가는 작품에서 서로 다른 색조가 조응해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병합되는 순간으로 ‘몰아의 경지’를 재해석해낸 것이다.

“제 그림에선 화면에 무엇인가 구체적인 상황이나 형상을 표현한다기보다, 시각적으로 구현하고 싶은 것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절제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평소 화면을 마주하고 잠시 눈을 감거나, 심호흡을 자주 하는 편입니다. 감정을 절제하고 다스리기 위한 습관인 셈입니다. 그리고 주변을 최대한 청결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마지막에 덧칠하는 색에 작은 먼지나 티끌마저도 작품의 완성도에 크게 지장을 주는 것처럼, 감정의 티끌을 정제하는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조용히 음악을 듣거나,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상의 명상법’을 즐기는 것 역시 그 노력의 일환입니다. 제게 그림은 여러 생각들을 동시에 품고 있는 정중동(靜中動)의 고요한 심연(深淵)을 옮기는 과정과 같습니다.”

 결국 그에게 구상이나 비구상, 형상 혹은 심상(心象)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만의 단필 기법으로 ‘몰아(沒我)’의 주제의식을 좇는 여정에 집중할 따름이다. 굳이 김수수의 그림을 읽는 키워드를 정리하자면 ‘전면일필(全面一筆), 검박한 단색조, 최소한의 간섭, 극과 극의 하모니, 타이밍’ 정도가 되지 않을까. 작품의 크기와 상관없이 단번에 한 붓으로 최종 마무리하는 견고한 채색 기법, 백색과 흑색을 주조로 한 단색조의 검박함, 인위적인 시각적 효과보다 단색조 회화가 지닌 최소한의 절제미, 흑백이나 물불 혹은 음양처럼 상반된 극점의 조화를 지향하며, 수없이 반복되는 붓질의 멈춰야 할 극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감각 등이다. 같은 단색조 회화의 반복이라도 매순간 ‘잠재된 의식’이 투영되며 서로 다른 의미가 조화를 이룬다. 김수수의 작품 가격은 100호(130×162cm)가 800만~1000만 원, 50호(65.1×90.9cm)기 400만~500만 원 선이다. 김 작가의 초대전은 오는 3월에 대구의 갤러리 미르에서 진행된다.


김윤섭 소장은…

미술평론가로서 명지대 대학원 미술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월간 미술세계 편집팀장, 월간 아트프라이스 편집이사를 역임했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 및 서울시립미술관 작품가격 평가위원,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전문위원, 대한적십자사 문화나눔프로젝트 아트디렉터, 교보문고 교보아트스페이스 기획위원, 숙명여대 겸임교수, 계간 조각 편집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심의추천위원,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5호(2019년 02월) 기사입니다.]


당사의 허락 없이 본 글과 사진의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입력일시 : 2019-01-30 16:52

가장 기대되는 인터넷전문은행의 서비스는 무엇입니까.
투표하기 결과보기

2019.10
통권173
Business 통권173호 이미지
멋진 어른의 초상 GREAT GREY
지난호 보기정기구독신청
콘텐츠 제작문의
L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