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story 제 167호 (2019년 04월)

[big story] 보드게임 홀릭,뇌를 자극하다

[한경 머니=정채희 기자 I 사진 서범세 기자] 아버지의 몇 안 되는 웃음은 명절날 녹색 모포 위 빨간 화투판에서 피었다. 흘겨보는 나를 의식하듯 아버지는 멋쩍게 말하곤 했다. “이건 치매 예방 차원이야.”

생각의 전환, 게임으로 잠자는 중년의 뇌를 자극하라. 아~주 즐겁게!



금요일 저녁 7시. 경기도 안양 동안구의 한 사무실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저녁이 있는 삶, 정시 퇴근이 지난 시간이건만 사무실에 모인 이들은 연신 싱글벙글이다. 모인 사람은 총 다섯 명. 나이도, 성별도, 직업도 제각각이다.

“저는 청바지고요. 제 옆으로 팔라딘, 완소아빠, 허밋, 림림이에요.” 정체불명의 닉네임이 오가는 곳, 이곳은 보드게임 동호회 ‘호계던전’의 정모 공간이다.

사무실 한편에 놓인 테이블 위에는 보드게임을 말해주는 사각의 판과 말들이 놓여 있다. 게임명은 마해(Mahe). 주사위를 던져 나온 눈만큼 거북이 말을 이동해 최고점을 얻으면 이기는 게임이다. 호계던전 회원들은 보드게임 초보자인 기자를 위해 난이도 ‘하’를 준비했다고 했다. 

“이제 기자님 차례예요. 주사위 3개를 1개씩 3번 던져야 하는데, 던진 주사위 총합이 7을 넘으면 안 돼요. 주사위 2개를 던지면 나온 눈에 2를 곱해야…. (드르륵) 기자님 생각하고 던지신 거 맞죠?”
“아! 또 업혔어. 림림 주인님 말 이동해도 될까요?”    
“아, 완소아빠님 빨리 던지세요. 매번 형 때문에 게임 진행이 안 돼.”


(사진) 보드게임 동호회 '호계던전' 회원들이 게임을 즐기고 있다. 4050을 주축으로 보드게임 정모가 열린다.

그야말로 왁자지껄. 공간을 빌려준 사무실 사장님에 취재를 빌미로 놀러온 기자까지. 총 7명이 모였을 뿐인데 1분, 1초도 쉴 틈 없이 웃음꽃이 핀다. 정신없이 주사위를 굴리고, 말을 이동하지만 머리싸움도 쉴 틈 없다. 게임은 언뜻 간단해 보였지만 간단한 계산을 빠르게 해내지 못하면 이길 수 없다. 상대편 말도 보고, 주사위를 굴려 수 싸움을 해야 한다.  

웃고 떠드는 사이 또 다른 회원들이 도착했다. 서울, 인천, 경기 도처에서 퇴근 후 이곳으로 오느라 모임 시간은 저녁 7시를 넘기기 예사라고 했다. 이날도 오후 8시가 돼서야 오늘의 멤버 전원이 자리에 앉았다. 초보자인 기자가 빠지자 늘 하던 카드게임 ‘티츄(tichu)’를 꺼낸다. 한쪽 벽면에는 호계던전 동호인들의 게임 성적을 기록한 표가 붙어 있다.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아니 이 사무실에 발을 들인 저녁 7시 이후 단 한 번도 무거운 주제가 오가거나 심각한 주제는 오가지 않았다. 이들은 보드게임 사각판 위에서 나이를 잊고, 사회적 신분도 지웠다. 호계던전 세계에서는 30대 팔라딘이 50대 완소아빠에게 짓궂은 농담을 던졌고, 대리님 림림이 부장님 재로옹에게 반말을 던졌다. 그러나 그 어느 하나도 어색한 게 없었다.

신분을 벗고 사각판 위로


보드게임은 판 위에서 말이나 카드를 놓고 일정한 규칙에 따라 진행하는 게임을 말한다. PC 온라인, 모바일 게임과 달리 직접 대면해 게임을 해야 한다. 쉽게 말하면 명절마다 보는 화투나 체스, 바둑, 포커 같은 카드게임도 보드게임에 속한다. 게임의 대상이나 주제에 따라 어린이·가족·파티·테마·전략·전쟁·추상 게임 등으로 구분된다.

국내에서는 1982년 출시된 국내 최초의 보드게임인 ‘블루마블’이 큰 인기를 끌면서 보드게임의 역사가 시작됐다. 블루마블은 해외 유명 게임인 ‘모노폴리’의 아류작이지만 당시 초등학생 사이에서는 블루마블을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큰 인기였다. 이후 2000년대 들어 보드게임 카페가 생기면서 대학가를 중심으로 산업의 전성기가 열렸다.

‘보드홀릭’, ‘잔머리동호회’, ‘이수짹짹이’ 등. 회원 수가 1000명이 넘는 대규모 보드게임 동호회들이 그 무렵 생겼다. 호계던전도 그때 탄생한 보드게임 동호회다. 온라인에서 모인 회원들이 오프라인에서 만나 보드게임을 즐겼다. 청바지와 완소아빠, 허밋이 당시의 초창기 회원. 그때 그들의 나이가 20대, 30대였다. 

거품은 오래가지 못했다. 보드게임 유행에 자영업자가 몰리면서 경쟁이 심화됐고,  보드게임 카페는 회전율을 높이기 위해 난이도가 쉬운 보드게임만 추천하면서 자연스레 그 인기도 시들해졌다.

1000명이 드나들었던 보드게임 동호회도 회원 수가 팍 줄었다. 호계던전의 회원 수는 현재 50여 명. 이 중 매주 화·금요일에 열리는 오프라인 정모에 참석하는 이들은 10명 남짓이다. 진짜 보드게임 마니아들만 남은 것이다.

동호회 설립일로부터 어느덧 19년이 흘렀다. 초창기 멤버들의 나이도 불혹을 넘고, 지천명을 깨우쳤다. 세월에 ‘완소오빠’는 ‘완소아빠’로 닉네임을 바꿨다. 최고령은 56세. 30대 멤버가 몇 있지만, 4050이 주축이다. 게임에 대한 편견을 깨듯 회사원, 사장, 교수까지 직업도 다양하다.  

혹자는 중년에 무슨 보드게임이냐며 코웃음을 치지만, 보드게임 예찬론은 나이를 불문한다. 이들은 오히려 중년에게 더 매력적인 게 보드게임이라고 입을 모은다.   

“보드게임 좋아하는 이유야 엄청 많은데 그중 제일은 사람 만나는 거예요. 직접 사람을 만나서 게임을 하니까 수다도 떨고 즐겁게 놀다 보면 외로움도 잊을 수 있어요.”-허밋

“자녀가 있으면 더 좋아요. 우리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보드게임을 같이 했는데, 지금은 고3이에요. 사실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가장 가깝지 않은 시기거든요. 공통된 취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유대관계를 가질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청바지

“두뇌 개발에도 어떠한 것보다 효과적이에요. 지금 대학에서는 보드게임학 과목을 열고 실버 사업을 주목하고 있어요. 보드게임이 치매 예방에 효과적이라는 것은 이미 유명하잖아요.”-완소아빠

(사진) 행복한바오밥 직원들이 보드게임을 즐기고 있다.

사회관계망에 두뇌 개발까지

화투(고스톱)가 치매 예방에 좋다는 말은 어른들의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의학적으로 입증된 연구 결과다.

2012년 분당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기웅 교수팀이 초기 치매 환자 19명에게 8주 동안 보드게임과 함께 ‘시간차 회상 훈련(단어를 보여준 뒤 시간차 간격을 두고 단어를 기억하는지 확인하는 훈련)’을 시킨 결과, 평균 한 단어를 6분 동안 기억하던 환자들이 세 단어를 24분까지 기억하게 됐다. 이는 기억력이 3~4배 좋아진 수준이다.

연구진은 “보드게임은 규칙을 이해하고 기억하면서 주사위를 던지거나 말을 움직일 때 손을 많이 써야 하기 때문에 전두엽을 자극해 집중력과 기억력을 강화시키고 치매를 억제한다”고 설명했다.

실제 퍼즐 맞추기처럼 머리를 쓰는 오락이나 게임 활동은 뇌 인지 기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많은 뇌 연구소나 치매학회에서는 위치 기억하기, 끝말잇기, 숫자 짝 넣기 등 다양한 과제로 뇌의 각 영역을 골고루 자극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에 사회적 활동까지 더해진다면 금상첨화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치매는 유전적 위험인자 외에도 미혼이나 독거, 사회적으로 고립된 노인들이 그렇지 않은 노인들에 비해 발병위험성이 높고, 우울증이 있을 경우 치매 발병위험성이 2배 이상 증가했다. 사교 활동이 가능한 보드게임이 최상의 치매 예방책으로 추천받는 이유다. 

단순 교육적 효과로도 보드게임은 훌륭한 교구가 된다. 예컨대 블루마블 형식의 ‘엔트리봇 보드게임’은 작은 판에 자신이 원하는 코드를 심고 실제 말을 움직이면서 프로그래밍 기초를 배울 수 있는 보드게임으로 실제 교육 현장에서 인기다. 순차, 반복, 판단과 같은 프로그래밍의 핵심 원리를 습득하고 알고리즘적 사고를 통한 논리력과 문제 해결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또 경매를 소재로 한 협상 게임 ‘모던아트’는 게임을 즐기는 것만으로 공개경매, 비공개경매, 고정가경매, 일주경매 등 실제 현장에서 사용하는 경매 방식을 배울 수 있다.

해외에서는 일찌감치 보드게임의 교육적 효과에 주목해 뇌 개발을 위한 도구로 보드게임을 사용 중이다.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브레인 향상을 위한 보드게임 종류를 추천해주는 매장이 있을 정도다.

보드게임을 연구 및 개발하는 이은경 행복한바오밥 교육사업부 이사는 “전 사회적으로 게임 메커니즘을 게임이 아닌 분야에 접목하는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이 열풍처럼 번지고 있다”며 “보드게임은 교육적·사회적·정서적으로 유의미한 가치를 지닌다”고 말했다.

특히 이 이사는 뇌 가소성 측면에서 보드게임을 주목했다. 그는 “뇌는 쓸수록 좋아진다는 뇌 가소성의 원리에 따라 유아부터 노인까지 보드게임을 통해 인지 능력이 크게 향상될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최근 들어 보드게임지도사를 찾는 이들이 크게 늘고 있다. 보드게임지도사란 보드게임을 통해 놀이와 교육을 접목시킴으로써 체계적인 사고 능력을 키우고 창의력과 사회성 증진에 도움을 주는 전문 인력을 말한다.

보드게임지도사 9년 차 김은주 씨는 “보드게임을 처음 접한 어르신들은 10분도 하지 못하고 ‘어렵다’, ‘재미없다’며 게임을 던지신다”며 “그런데 2~3개월 반복적으로 보드게임을 접하다 보면 1시간을 꼬박 앉아 게임을 즐긴다”고 말했다. 김 씨는 “치매를 앓는 어르신이 1시간 이상 집중력을 보이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며 “실제 치매 등급이 좋아져서 센터를 나간 분들도 있다”고 말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보드게임의 무게추가 교육 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져선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이사는 “교육적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재미가 줄어들어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중년을 위한 보드게임 역시 두뇌 개발보다 재미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뇌 자극은 재미를 추구하다 보면 따라오는 곁가지 같은 효과다.

보드게임 30년 차, 호계던전의  50대 보드게임 마니아 ‘청바지’는 이렇게 말한다. “친구들한테 보드게임 하자고 말하면 ‘야, 무슨 게임이야. 술이나 먹자’라고 말해요. 하지만 조금이라도 흥미를 느낀다면 무조건 보드게임을 추천하고 싶어요. 무엇보다 즐겁잖아요.”


(사진_왼쪽부터) 보드게임 지도사 박시후 씨, 이은경 행복한바오밥 교육사업부 이사, 보드게임 지도사 김은주 씨, 진언희 씨.

◆4050의 보드게임 효과 말·말·말

보드게임지도사들은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보드게임의 효능을 접한 사람들이다. 최근에는 4050, 특히 중년 남성들이 보드게임에 관심을 보이는 빈도수가 늘고 있다고 한다. 무료하고 따분한 삶에 한줄기 빛이 된다나. 보드게임지도사 김은주·박서후·진언희 씨가 전하는 보드게임 그 효과에 대하여.  


 
◆중년을 위한 보드게임 추천

보드게임 마니아들과 보드게임지도사가 중년의 보드게임 초보자를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수천여 개의 게임 중 입문용으로 선택된 보드게임 5.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7호(2019년 04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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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19-03-27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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