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제 173호 (2019년 10월)

중년의 순간을 꽃의 풍경에 담다

Artist 김윤섭 소장의 바로 이 작가 - 김남표

김남표, Instant Landscape–Fingertip flower#1, 캔버스에 파스텔, 90.9×72.7cm, 2019


[한경 머니 기고 =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미술사 박사] 꽃은 인생이다. 움튼 새싹은 유아기, 꽃봉오리는 유소년기, 이제 막 개화한 청년기, 만개한 초중년을 지나 시들어 가는 중년 이후엔 화려한 향기 대신 결실을 얻고, 노년엔 줄기와 뿌리로도 꽃을 피우게 된다. 김남표 작가는 손끝으로 그 인생의 꽃을 피운다. 화려함의 유혹과 젊음의 욕망이 아닌, 점차 시들어 가는 중년의 삶을 담았다.

“제가 생각하고 경험하고 있는 중년은 중성화돼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년에서 남성호르몬이 분비돼 목소리가 굵어지고 근육이 발달하는 남성화 과정이 있다면, 중년은 그러한 남성이 쇠퇴해 남성과 여성의 중간 위치에 놓이게 되죠. 이런 시기에 보는 사물은 그전과 달라요. 몽롱하고 우울하며 때로는 슬픈 감정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러한 시기를 흥미롭게 보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예술적 기대감이 큽니다. 예술은 그래 왔듯이 사물의 속성을 표현하는 데 있어 보는 이의 성(性)이 우월한 입장에서는 사물의 성을 사유하는 데 있어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청년 시기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 지금 보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슬프니까 청춘이라 했던가? 김 작가의 고백을 빌리자면 중년이 더 슬픈 듯하다. 하지만 슬픔의 결이 다르다. 청춘은 남성화와 여성화의 절정기다. 치기 어린 열정의 섣부름도 어느 정도는 용서가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밖으로부터의 슬픔을 이겨내기 위한 인내와 단련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중년은 안으로부터의 슬픔을 맞는다. 혼자 감내해야 하는 슬픔이다. 숙명처럼 몰려오는 삶의 무게감은, 지는 꽃잎처럼 고개를 떨구게 한다. 김 작가는 중성화되는 중간자의 시선으로 삶을 관조하게 되는 ‘중년의 시기로서의 꽃’을 그림에 담아내고 있다.

그의 꽃이 손끝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가슴 한편이 애잔하게 아려온다. 꽃잎의 세밀한 결들을 오로지 손끝의 촉각에만 의존해 하나하나 그려 나갈 때, 분명 지나온 삶을 필름처럼 반추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반백년을 지나는 동안의 온갖 감정을 손끝의 마티에르에 담아, 온전히 또 다른 반백년의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 그림에서 더없이 진한 삶의 향취가 묻어난다. 솔직한 어느 중년의 고백을 마주한 듯 숭고함마저 전해진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서는 한 중년의 목소리가 들린다.

“꽃은 한시적입니다. 그래서 더 아름다운 가치를 드러내죠. 또한 만개한 시기를 지나 시들어 가는 꽃은 슬픔의 시기를 맞이합니다. ‘인스턴트(Instant)’라는 주제를 ‘꽃의 한시적인 것’에 적용하고 중성화되는 중년의 슬픔을 꽃의 속성에서 발견하고자 했어요. 꽃의 이러한 속성은 손끝의 마티에르를 통해 추상적 세계를 엿보게 합니다.”

찰나의 순간에 채집된 생명의 조각처럼, 김 작가의 꽃이나 풍경은 날것 그대로다. 해바라기 시리즈처럼 겉보기엔 얼핏 푹 삭힌 것같이 보일 때도 있지만, 한동안 보고 있으면 수없이 문질렀을 손끝의 쓰라림까지 느껴질 정도 생생하다. 그가 강조한 ‘인스턴트’ 개념의 깊이 때문일 것이다. 사전적 의미는 대략 ‘과거와 미래 사이에 있는 지금이라는 지극히 짧은 시간적 규정’을 갖는 ‘순간’으로 해석되겠다. 또한 눈의 깜박임만큼 지극히 짧은 순간의 개념이나 시점(始點)으로 포착한 풍경들을 화면에 옮긴다. 이 ‘인스턴트’란 단어는 김남표 회화를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결정적 키워드인 셈이다.

김 작가는 실제로 작업실을 뛰쳐나가길 즐긴다. 화구(畵具) 일체를 가지고 야외에 나가 현장에서 작품을 완성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과거 인상파와 같진 않다. 대개의 인상파 화가들은 자연의 관찰자로서 현장감을 살리려고 애썼다면, 그는 저 깊은 속에 잠든 감각의 촉수를 대기의 숨결로 깨워내려 애쓴다. 즉흥적인 감각과 새로운 영감들이 충돌해서 연출된 것이 ‘인스턴트 풍경’이다. 그만의 탁월한 독창적인 화법은 ‘작가들이 부러워하는 뛰어난 감각의 소유자’라는 평을 얻게 한다. 너무나 정교한 극사실적 기법과 추상적인 표현의 경계를 넘나들며,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감성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구상과 추상의 경계 역시 요즘 작업에서 관심이 높습니다. 그 이유는 대상의 속성을 화폭에 표현하는 데 있어, 사물의 속성 그 자체는 추상적 요소가 강하기 때문이죠. 사물을 그림에 옮기는 구상에는 사물의 형태와 색, 그리고 사물만이 가지고 있는 질감으로 가능합니다. 이 중 추상적인 요소와 근접해 있는 것이 질감이에요. 이 질감은 사물의 사물다움을 강하게 드러내며 보는 이의 주관성을 돋보이게 합니다. 이러한 사물의 질감은 그림의 평면적 표면에 전달이 되는데 그것을 우리는 마티에르라고 합니다. 저는 구상과 추상의 연결다리를 마티에르에서 찾아내고 있어요. 손으로 직접 그리는 방식을 선호했던 제 작업은 이러한 마티에르를 더욱 드러내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김 작가에게 질감은 여느 그림의 표면 질감 표현과는 다른 맥락을 지니고 있다. 보통은 그 대상을 되도록 닮게 하기 위한 질감 표현이라면, 그의 질감은 대상이 지닌 ‘이면의 속살’을 드러내기 위한 통찰의 수단이다. 마치 동양회화의 초상화법(肖像畵法)에서 인물의 정신세계까지 전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전신사조(傳神寫照)’ 개념을 옮기는 과정과 같다. 이름 모를 꽃의 낙화(落花)나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일상적 풍경을 포착한 그의 그림에서 우리 인생의 참다운 진정성과 생명력을 발견하는 이유도 그 연유일 것이다.

김남표, Instant Landscape–Sunflower#5, 캔버스에 파스텔&유채, 116.8×91cm, 2019


김 작가는 개인의 작품뿐만 아니라, 대외 활동에서도 경계를 넘나든다. 주변 장르의 작가들과도 2인전이나 공동 작품도 즐긴다든가, 작품의 제작 과정을 일반 관람객에게 오픈하는 전시도 서슴지 않는다. 웬만한 자신감이 아니고선 라이브 전시를 감행하긴 쉽지 않다. 이미 2000년에 공동 작업을 추구했던 ‘집단 막’ 활동으로 충분히 단련됐기 때문이다. 직관과 통찰을 꿰뚫는 지금의 작가적 감각은 그렇게 20여 년 동안 반복적으로 수련한 결과다. 기존의 ‘화려한 아름다움의 대명사’라는 꽃들에 대한 상식이나 선입견이 통하지 않고, 같은 꽃이라도 ‘김남표 작가의 손끝’이 닿으면 전혀 달라진다는 평가는 결코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중년에 접어드는 작가의 덕목 중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감성과 목소리는 빼놓을 수 없다. 자신을 남과 구분 짓는 색다른 감성은 작가로서의 2기를 지켜줄 변별력이자 경쟁력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김남표는 순수회화의 기본에서 답을 찾았다. 온몸의 촉각이 집약된 손끝으로 한 치의 어긋남도 허락하지 않으며 온전히 ‘영원을 담은 순간’의 통찰력을 화면에 옮기고 있다. 마치 인생의 거울을 들여다보듯, 중년을 닮은 김 작가의 꽃과 풍경에서 우리를 발견한다. 작품의 전시 가격은 10호(53×45.5cm) 300만 원, 30호(90.9×72.7cm) 900만 원, 50호(116.8×91cm) 1500만 원, 100호(130.3×162.2cm) 2100만 원 선이다.

아티스트 김남표는…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서울대 미술대학 학부와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그동안 17회의 국내외 개인전을 비롯해 2인전과 공동작품전, 70여 회의 기획단체전에 초대됐다. 또한 KIAF(서울 코엑스), TEFAF(네덜란드), 아부다비 아트(아랍에미리트), 타이페이 아트페어(대만), ARCO 아트페어(마드리드), 아시아 컨템퍼러리 아트페어(뉴욕) 등 40회 이상의 국내외 아트페어에도 참가했다. 한편으론 ‘집단 막’(2000~2005년) 활동을 통해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안양 스톤&워터 갤러리 등에서 미술을 근간으로 한 다양한 표현 영역의 확장을 시도했는데, 이는 고정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는 지금의 작업 형태를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전시기획부문 선정작가, 전국대학미전 대상, 창작예술협회 공모전 금상 등을 수상했다. 작품은 서울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성남문화재단, 수원아이파크미술관 등 여러 곳에 소장돼 있다. 현재 세종대 예술대학 회화과 겸임교수로도 활동 중이다.  

김윤섭 소장은…
미술평론가로서 명지대 대학원에서 미술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월간 미술세계 편집팀장, 월간 아트프라이스 편집이사를 역임했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 및 정부미술은행 작품가격 평가위원, 인천국제공항 문화예술자문위원,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전문위원, 대한적십자사 문화나눔프로젝트 아트디렉터, 숙명여자대학교 겸임교수, 계간조각 편집장, 2019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 예술감독, 2019 경주국제레지던시아트페스타 전시감독,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이사 등으로 활동 중이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3호(2019년 10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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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19-10-08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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