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기고 = 문현선 세종대 공연·영상·애니메이션대학원 초빙교수]1020세대들이 뉴트로에 열광하고 있다. 반면 1980~1990년대에 젊음을 누렸던 4050세대들은 이 상황이 다소 어리둥절하다. 그 간극의 차이는 도대체 무엇일까. 사진 한국경제DB

[big story]뉴트로엔 세대별 결핍이 숨어 있다

그 골목은 비좁고 낡았으며 기름 냄새가 났다. 골목 안에서는 끊임없이 돌아가는 인쇄기 소음이 멈추지 않았다. 30년 전, 그 골목은 언제나 사람으로 붐볐고 마스터 인쇄를 찍어 내는 열기와 잉크 냄새가 섞인 공기는 차가운 겨울에도 하얀 김을 내뿜었다. 지금, 한결 한산해진 그 골목 안에서는 오후 6시만 되면 온갖 빛깔의 네온사인이 켜진다.

1990년대의 홍콩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스튜디오 까페에는 ‘모모삼림(某某森林)’이라 쓰인 붉은 등이 현란하다. 모든 식재료를 프랑스에서 직접 공수했다는 와인바 앞에는 동남아시아에서 옮겨 온 것 같은 부처의 흉상이 놓여 있다. 낡은 철제문을 열고 들어가면 30촉 백열등 같은 아슴아슴한 불빛이 눈에 들어온다. 이 확실한 주광색 발광다이오드(LED) 효과는 가게 안으로 들어온 손님들을 순식간에 30년 전으로 이끈다.

문 밖에는 한겨울에도 봄바람처럼 화사한 옷차림에 손바닥만 한 핸드백을 든 젊은 여성들과 멀쑥하게 차려 입고 핸드메이드 코트를 걸친 채 강렬한 향수 냄새를 풍기는 젊은 남성들이 연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장사진을 치고 있다. 흰 간판에 황금색 캘리그라피 간판이 붙어 있는 푸른 문의 레스토랑 안에서 파는 건 삼겹살과 곱창이다.

[big story]뉴트로엔 세대별 결핍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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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부터)을지로에 오래된 다방. 익선동.]

요즘 서울 중구 을지로에서는 이런 세기말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풍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을지로만이 아니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이나 성동구 성수동, 종로구 익선동 등 곳곳에서 불쑥 등장한 ‘핫 플레이스’들에서 21세기의 젊은 세대는 이처럼 3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여행을 즐기고 있다.

응답하라, 1990년대

2019년의 마지막 하루, 서울 어느 대학의 이벤트 홀에서는 1991년에 데뷔한 어떤 가수의 팬 미팅이 열렸다. 그는 1990년대 한국 가요계에서 거의 철저하게 외면돼 ‘너무 고생한’ 이력을 지녔다고 알려져 있다. 유튜브를 통해 새롭게 조명된 이 ‘시간여행자’는 이제는 흘러간 과거가 돼 버린 1990년대를 전혀 다르게 기억하도록 만들었다.

그의 유튜브 동영상 아래서는 ‘1991년에 태어난 내가 1991년에 데뷔한 가수에게 빠지다니’ , ‘1990년대의 GD다’ , ‘왜 30년이나 먼저 태어나셨나요?’ 라는 댓글들이 눈길을 끈다. 한 케이블 방송사의 프로그램에 출연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서 미국 플로리다의 한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하며 가족과 평범한 삶을 살던 그는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연말 팬 미팅을 진행하는 슈퍼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2019년 최후의 신드롬이라고 할 수 있는 가수 양준일에 대한 이야기다. 그야말로 살아 있는 뉴트로의 상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것이 첫 번째 사례는 아니다.

레트로라는 유행어가 패션과 건축을 포함한 예술 및 대중문화에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10여 년쯤 전의 일이다. 밀레니엄의 열기가 서서히 식어 가고 2000년의 고비를 넘기면서 ‘복고풍’이라는 말이 떠오르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유행에서의 ‘복고’란 늘 있는 일이었다. 유행은 언제나 돌고 돈다고 하지 않던가. 30년 전에도 엄마가 젊을 때 입던 옷을 수선해서 입는다는 우스개 아닌 우스개가 있었다. 그런데 이 ‘복고’는 조금 다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벌써 스무 해 가까이 지칠 줄 모르고 경신되고 있다. ‘복고’의 촌스러움과 선을 그으며 ‘레트로’로 이름을 바꾸고 다시 ‘뉴트로’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냈다.

‘회고(retrospective)’라는 말에 어원을 두는 ‘레트로(retro)’ 개념은 사전적으로 ‘과거의 모양, 정치, 사상, 제도, 풍습 따위로 돌아가거나 그것을 본보기로 삼아 그대로 좇아 하려는 것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정의된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종 주간지와 패션 잡지에서는 이 단어가 간간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레트로 룩’, ‘레트로 풍’, ‘레트로 패션’ 등 패션에 극히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처럼 보였던 이 유행어는 ‘레트로 마케팅’과 연관되면서 이제 전 사회적인 한 가지 취향으로 자리 잡았다. 드라마도 예외는 아니다. 1997, 1994, 1988로 이어지는 tvN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 대한 뜨거운 반향은 우리 사회가 1980년대 말과 1990년대라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지독한 향수를 품고 있다는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은 대한민국이 만성적인 적자를 벗어나 아시아의 4마리 용으로 비상하던 시절이었다.

[big story]뉴트로엔 세대별 결핍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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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부터)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오비맥주, OB라거 ‘뉴트로’ 제품.]

삶 자체는 여전히 비루하고 조악하고 어수선했을지언정 눈앞에는 언제나 장밋빛으로 물드는 환상적인 비전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오늘도 유행 중인 레트로의 근원에는 ‘1990’이라는 원형이 존재한다. 한국 대중문화에서 1990년대는 확실히 새로운 기원으로 꼽힌다. 그것은 태생적으로 ‘이식된 것’이었던 현대적 의미의 대중문화가 드디어 우리 고유의 색깔을 띠기 시작한 시기였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팝과 엔카, 할리우드 영화와 재패니메이션이 아니어도 좋은 ‘나의 취향’이란 것이 시나브로 만들어지는 시대였다. 2020년에 이르러 이처럼 1990년대는 어느덧 우리의 ‘옛것이지만 좋은 것(Oldies, but goodies)’이 돼 가고 있다.

노스탤지어 또는 시뮬라크르

옛것을 그리워하는 ‘복고(復古)’적인 취향으로서 레트로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에 대한 향수(鄕愁, nostalgia)와 연관된다. 이 ‘이미 지나가 버린 것에 대한 향수’는 돌이킬 수 없는 청춘에 대한 그리움과 관련이 있다.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순간은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이 찬란했던 순간의 재현은 한층 더 아름답게 각인된다.

이미 경험된 것에 대한 신뢰와 가장 찬란한 순간의 조우는 ‘과거에 대한 미화’로 귀결됐다. 대중문화 평론가들은 대부분 이러한 트렌드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다. 문화평론가 사이먼 레이놀즈는 21세기의 첫 10년이 과거를 바라보는 ‘거대한 재탕의 시대’였다고 비평했고,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인의 ‘레트로토피아’에 대한 기대는 불투명하고 암울한 미래에 대한 반감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아직 도달하지 못한 어떤 대상(未來)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사라진 현재는 과거를 소환한다. 아직 알지 못하는 좋은 것보다는 차라리 이미 알고 있는 나쁜 것이 낫다는 생각이 복고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스베틀라나 보임 하버드대 비교문학 교수는 “향수란 상실과 전이의 감정”이며 “자신의 판타지와 교감하는 로맨스이기도 하다”고 정의했다. 또한 그는 향수병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일시적인 질병에서 치유할 수 없는 현대 조건으로 바뀌었다”며 “20세기는 미래의 유토피아로 시작해 향수로 끝났다”라는 말로 오늘날을 ‘향수라는 이름의 세계적인 유행병의 시대’로 진단한다. 현실과 상상을 혼재하게 만들고, 과거와 현재를 뒤섞이게 만드는 이 트렌드는 이제 우리를 원본 없는 복제가 더 실재처럼 느껴지는 시대로 우리를 이끈다.

옛것의 실재를 기억하고 있는 세대가 레트로를 향유하는 것은 자신의 가장 찬란한 순간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머릿속에서 이상화된 ‘봄’이 산들바람과 따사로운 봄볕과 분홍 꽃바람으로 포샵이 되는 것과는 달리 실재의 봄은 훨씬 더 불안정하고 스산하고 황사와 미세먼지로 고통받는 것처럼, 우리의 찬란했던 청춘도 실제로는 훨씬 더 좌충우돌, 갈팡질팡하며 고단한 데도 얻는 것이 없는 부질없는 시간들이었다.

수많은 흐리고 비 오는 날 가운데 기억나는 단 하루가 벚꽃이 화사한 오후일 따름이다. “그땐 좋았지”라고 말하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에 따라갈 만큼 충분한 에너지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과거는 현재보다 틀림없이 더 좋은 시간이 아니었다. 미래가 현재보다 틀림없이 더 좋은 시간이 아닐 수도 있는 것처럼. 레트로 마케팅이 때때로 ‘추억팔이’로 비하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4050세대는 레트로 트렌드가 정점에 이른 핫 플레이스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그 판타지는 그들에게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돌려주지 못하고, 지금 그들이 자신의 청춘을 바쳐 획득한 것들만큼 그들을 뿌듯하게 만들지도 못하면서 ‘비싼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효과보다 비싼 대가를 우리는 ‘낭비’라고 부른다. 4050세대에게는 사실 낭비할 에너지가 거의 없다.

뉴트로라는 트렌드가 1020세대에게 더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이유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사용할 수 있는 만큼 충분히 넉넉한 에너지를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청춘은 청춘의 아까움을 알지 못한다. 대부분의 청춘은 자신의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방식을 찾는 과정 중일 것이다.

넘치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 잠재력이 가치 있게 쓰이게 될 정확한 지점을 잘 알지 못하는 것, 그것이 청춘의 특징이다. ‘가장 좋은 것(the best)’이 아니라 ‘가장 적합한 것(the right)’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야 비로소 서서히 터득한다. 그래서 가지 않은 길을 가보고, 경험하지 못한 일들을 찾아다니는 것은 청춘의 특권이다. 4050세대에게 ‘낭비’일 따름인 경험이 1020세대에게는 절실한 ‘충족’일 수 있는 것이다.

빈티지와 레트로 사이, 온고지신

와인의 생산연도와 원재료인 포도의 수확연도를 일컫는 빈티지라는 말은 이제 패션과 트렌드의 각 분야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빈티지 와인이 특정 연도, 특정 지역에서 생산된 최고의 와인을 가리키는 일종의 평가어로 사용되는 것처럼 빈티지라는 수식어는 ‘오래돼도 여전히 가치 있는 것’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빈트로’라는 말까지 쓰이고 있다. 이 말이 ‘빈티지’와 ‘레트로’의 합성어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즉,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예스런 것들 가운데 여전히 가치가 있는 것, 정도의 뜻이 될 것이다.

고대 중국과 유가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우리 문화 전통에서 ‘복고(復古)’는 언제나 숭상되는 것이었다. 옛것은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요, 새로운 것은 사람들이 앞 다투어 즐기는 바이지만 ‘아직 검증되지 않은 것’이니 흘러가는 유행에 불과하다는 판단은 전통 사회에서는 매우 보편적이었다. 새로운 것은 다만 ‘흘러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판단이 서야만 받아들여졌다. 즉, 모든 가치 있는 것은 ‘시간의 시험’을 거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등장하는 말이 온고지신(溫故知新), 즉 ‘옛것을 토렴해 새로운 것을 아는 것’이다. <논어>에는 “옛것을 토렴해 새로운 것을 아는 사람은 스승으로 삼을 만하다”라는 공자의 말씀이 등장한다. 지나간 것을 잘 살피고 새겨서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을 깨우치는 사람이어야 남에게 가르칠 것이 있다는 뜻이다. 사유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사람의 삶 또한 그러하다. 우리는 모두 ‘지금, 여기’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서 가치를 찾아나가기 때문이다.

1020은 왜 뉴트로를 원하는가.

1020세대는 다음 세대를 가지지 못한 젊은 세대다. 다음 세대를 가지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에게 아직 기념할 만한 자기 자신의 역사가 없다는 의미다. 그들에게는 ‘지금, 여기’만 있을 뿐 ‘그때, 그곳’의 추억이라는 것이 없다.

[big story]뉴트로엔 세대별 결핍이 숨어 있다

자기 역사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그 필요성을 체감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역사란 책 속에나 존재하는 거리감 있는 대상일 따름이다. 1020세대가 역사의 중요성을 아는 것은 당위이지 필연이 아니다. 사실 과거가 없다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또한 일종의 결핍이고 결핍은 충족하려는 욕구를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1020세대가 자신들에게 없는 역사를 ‘현재’의 감각으로 즐기는 뉴트로 현상은 이런 관점에서도 설명이 가능하다.


누군가는 뉴트로라는 것이 이미 모든 것이 풍족하고 다양해진 현실에서 독특함과 고유함을 찾으려는 시도에서 비롯됐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테크놀로지의 편의성과 반비례해 자기 통제권을 잃어버림으로써 무력감을 느끼는 현대인의 도피 감정이 뉴트로의 원인이라고 진단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사실 모두 자기 경험의 축적을 소유해 본 기성세대의 판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기 경험의 축적을 경험한 사람만이 경험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결핍’을 실감한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에 대한 결핍은 그것이 없다는 사실을 경험하기 전에는 느낄 수 없는 것이다. 1970년대 출생한 10대에게 1980년대에도 사람이 태어난다는 사실만큼 믿기 어려운 일은 또 없었다. 2000년생 10대에게도 그런 경험은 마찬가지로 믿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뉴트로는 ‘새로운 복고’가 아니라 그저 그들이 경험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일 따름이다.


진로 이즈백을 가장 즐겨 마시는 세대는 찐 진로를 마시던 청춘을 회고하는 4050세대가 아니다. 이제 막 성인의 경계선을 넘은, 순하고 목 넘김이 좋은 주류와 깔끔한 패키지를 좋아하는 1020세대다. 마치 30년 전의 1020세대가 다음 날 아침의 끔찍한 숙취에도 불구하고 저도수의 청주나 레몬소주를 즐겼던 것처럼. 그 기억이 아무리 그리워도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지금 컨디션으로는 돌아가기도 힘들고.

프로필

문현선 교수는 세종대 공연·영상·애니메이션 대학원 초빙교수이자 인문연구모임 문이원 연구원이다. 또한 공작소 파수(破守) 스토리텔러 & 캐릭터 프로파일러, 레 필로소피(LP) 인문 프로그램 ‘타로와 별자리’ 인문학 강사로 활약하고 있다. <무협>, <삶에서 앎으로 앎에서 삶으로>를 썼고, <꿈의 해석을 읽다>, <장자를 읽다> 등을 옮겼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7호(2020년 02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