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선미 주택금융공사 콜센터장 "최연소 국가품질명장…스스로 ‘꿈’이 되다"

interview 장선미 한국주택금융공사 콜센터장
[한경 머니 = 배현정 기자 | 사진 이승재 기자] KT그룹 최초 명장, 서비스 부문 최연소 국가품질명장, 대통령상 4회 수상 등. 해당 산업 최고의 명장 자리를 개척한 장선미 한국주택금융공사 콜센터장을 만났다.


“국가품질명장이라는 영예가 많은 동료와 후배들에게 ‘꿈’이 됐으면 합니다.” 장선미 명장은 산업통상자원부가 선정한 국가품질명장(2017년)이자, 최연소 명장이다. 지난 2000년 국민은행 콜센터에서 상담사로 시작해 현재 한국주택금융공사 자회사인 에이치에프파트너스가 운영하는 한국주택금융공사 콜센터장을 맡고 있다.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전국품질분임조 경진대회 대통령상 금상 수상 외 3회 대통령상 수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상 2회 수상, KTCS 최고경영자(CEO) 표창 2회 수상 등 수많은 기록을 만들어 왔다.


최근 장 명장이 펴낸 책 <대한민국 산업에 여성의 꽃을 피우다>의 부제는 ‘평범한 여성이 산업명장이 되기까지’다. 그는 “콜센터 상담사는 이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조차 낮춰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제2·제3의 명장이 곳곳에서 배출돼 업계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부심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콜센터에서 브랜드 가치를 만들다


현재 서울과 부산 230명의 직원이 있는 주택금융공사 콜센터를 이끄는 센터장이자 분야의 최초이자 유일한 명장으로서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장선미 명장. 하지만 그도 처음부터 콜센터의 길을 걷고자 했던 것도, 사명감이 투철했던 것도 아니었다고 했다. 콜센터에서 일하게 된 것은 국민은행 콜센터의 채용공고를 우연히 접하고, 국민은행이 주는 신뢰감 때문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전공(중국 경제학)과 관련된 기업에 취업하고 싶었는데 번번이 고배를 마셨습니다. 기껏 합격통보를 받고 간 곳은 취업준비생을 울리는 다단계 같은 회사였고요. 취업의 가시밭길을 걷고 있을 때 ‘국민은행’을 보고 콜센터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지원했습니다.”


막상 취업에는 성공했지만, 콜센터 업무에 순탄하게 적응하지도 못했다. 주변에서 “어디 다니니?”라고 물으면 자신 있게 답변하지 못했다. 결국 스트레스로 건강에 이상이 오면서 콜센터를 나왔다. 다시 콜센터로 돌아온 건 약 1년 뒤다. 국민은행에 다니던 시절 함께 일한 선배로부터 국민은행 콜센터 팀장을 뽑는다는 얘기를 듣고, 가슴이 뛰었다. 이런저런 방황 끝에 휴대전화 대리점에서 일하던 때였다. “콜센터에 뼈를 묻어 보자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그는 남다른 성공 비결로 ‘인내’를 꼽는다. 콜센터의 진입장벽이 낮다 보니 쉽게 그만두는 경우가 많은 것에 안타까움을 표한다. 장 명장은 “한때 저도 콜센터를 스쳐 지나가는 곳으로 생각했고 ‘82년생 김지영’처럼 육아와 일 사이에서 갈등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내하다 보니 ‘장선미’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며 “하찮은 일은 없다. 어느 자리에서든 기회를 만들어 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다음은 장 콜센터장과의 일문일답.

장선미 주택금융공사 콜센터장 "최연소 국가품질명장…스스로 ‘꿈’이 되다"

콜센터 분야의 ‘산업명장’이 생경한데, 구체적으로 소개한다면.
“고용노동부에서 자동차 명장, 요리 명장 등 기술과 관련된 명장을 선출한다면, 산업통상자원부에서는 제조와 서비스 분야의 명장을 뽑습니다. 기술 발전을 위해서 특허를 내듯, 서비스 분야에서도 고객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품질 개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불편한 업무 절차를 개선한다든가 고객 응대의 친절도를 높이는 교육 등 향상된 부분을 계량화하는 노력을 평가합니다. 서비스 부문에선 10년 이상의 고객 서비스 현장 근로자 및 지도 사원으로 서비스 접점에서 서비스의 개선과 혁신에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이 신청할 수 있습니다. 명장이 되고 나선 후배 양성에도 힘쓰고 마이스터고 결연 등을 통해 재능 나눔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명장을 꿈꾸게 된 것인가요.
“한국표준협회에서 서비스 부문 성과를 발표하는 대회에 꾸준히 참석했습니다. 서비스를 표준화해 KS인증을 받고자 했습니다. 2013년 성과경진대회에서 우연히 제조 부문의 최연소 명장이라는 분이 발표하는 것을 보게 됐습니다. ‘명장’에 대해 상세히는 모르지만 대단하다고 느꼈어요. 이후 명장 시상식을 보게 됐는데 너무 멋지더라고요. 오랫동안 한 길을 걸어온 사람이 그 노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인 것 같아 도전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서비스 분야 품질 개선 활동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가령 고객이 주택금융공사에 대출계좌가 2개가 있는데, 한 계좌에서 대출금을 상환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과거에는 시스템상 자동으로 계좌를 불러오는 게 안 됐어요. 상담사의 실수로 다른 계좌에서 출금하는 사례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즉시 오류를 인지하지 못하면 연체가 발생할 수 있고, 고객 불만도 많았습니다. 직원들도 업무에 대한 상당한 부담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요. 관련 자료를 모아서 공사에 전달했고, 공사에서도 적극적으로 개선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상담 일선이 아니면 이런 불편사항은 모를 수 있잖아요. 또 다른 사례로는 주택담보대출이 연체되면 각 금융기관에 통보가 가는데, 고객들은 연체금을 상환하는 즉시 정지를 풀고 싶어 하잖아요. 그러려면 각 기관에 완납증명서를 보내야 하는데 기존에는 콜센터에서 보낼 수 없고 별도의 담당부서가 있었습니다. 고객들은 콜센터와 가장 먼저 접하니까 즉시 처리가 안 되는 부분에 대한 민원이 많았습니다. 그런 부분에 대해 공사에 민원사항을 전달하고, 콜센터에서 거래 정지를 풀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처음부터 콜센터 취업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는데, 어떻게 성장하게 됐나요.
“입사 초기에는 ‘내가 여기에서 뭐 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습니다. 그러다 입사 6개월 후 개인성과평가 결과를 받았는데 하위권이었어요.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신속하고 정확한 상담을 위해 업무 지식을 공부했고, 출근 시간을 앞당겼습니다. 그렇게 우수 직원으로 인정받아 갔지만, 몸에 이상이 생겨 그만뒀습니다. 설마 또 일자리를 못 찾겠나 싶었는데 여러 고생을 겪으면서 마음가짐이 달라졌던 것 같습니다. 국민은행의 콜센터 팀장을 뽑는다는 얘기를 듣고 앞뒤 따지지도 않고 감사하게 됐습니다.”


성공 비결로 ‘인내’를 꼽으셨습니다. 콜센터 업무에서 어려운 일들이 많았을 텐데,
“욕도 많이 들었고, 입에 담기도 험한 성희롱도 많이 당했습니다. 2002년 카드 고객센터 업무를 할 때 고객으로부터 성희롱과 함께 욕을 들었는데, 20년이 돼 가는 지금도 그 단어가 잊히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부들부들 떨리기도 했습니다. 직원들에게 그런 경우 상담을 중단할 것을 권고합니다. 금융권 콜센터는 채무 등 금전 문제와 얽힌 민원이 많은데 그 스트레스를 상담사들에게 돌리는 것 같습니다. ‘산업안전보건법’이 시행돼 감정노동을 하는 직원들의 보호가 상당 부분 개선됐지만, 여전히 보호돼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흔히 콜센터 상담을 전문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화상담을 하는 게 뭐가 어렵냐고 하는데, 고객의 민원에 정확하고 신속하게 답변하려면 관련 지식도 쌓아야 하고, 상황 대처 능력도 중요합니다. 고객들은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당장 ‘센터장 나와?’ 하면서 찾아오는 고객들도 있는데, 이럴 경우 안내가 올바르게 됐는지, 고객 불만의 원인이 무엇인지, 실수가 있었다면 어떻게 수습할지 즉각적으로 판단하고 대처해야 하는 때가 많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을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인내하면서 경력을 하나하나 쌓아가다 보니 지금의 자리에 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를 둘러보면 여성이 리더의 자리에 있는 경우는 아직도 소수입니다. 저도 처음부터 센터장이나 국가품질명장을 꿈꾸지는 않았습니다. 묵묵히 걷다 보니 이런 길도 가게 됐습니다. 많은 콜센터 분야 종사자들이 자부심을 갖고, 꿈을 키워 갔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 콜센터 서비스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돕고 싶습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7호(2020년 02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