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늘어나는 이혼, 그리고 재혼 혼전계약서로 재산분쟁 막는다
“아무리 사랑해도 혼전계약서를 써라.” 미국의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가 쓴 책 ‘트럼프의 부자 되는 법(How to Get Rich)’에 나오는 대목이다. 떠들썩한 두 번의 이혼을 거치는 과정에서 혼전계약을 맺어 경제적 손실을 줄인 트럼프의 현실적인 조언이다. 미국은 이혼을 잘못했다가 쪽박을 차는 억만장자들이 꽤 많아, 혼전계약이 결혼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관문으로 손꼽힌다.

오늘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이혼율이 최상위권인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황혼 재혼을 앞둔 자산가들을 중심으로 혼전계약서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이혼 후 재산분할 문제뿐 아니라 종교, 양육, 가사 분담 등 결혼 생활에서 지켜야 할 조건들에 대해 혼전계약서에 꼼꼼히 기록한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가정 법률 전문가들도 법의 테두리 안에서 체결한 부부 간 약속이 결혼 생활의 안전장치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입을 모으는 상황에서 혼전계약서는 머지않아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혼전계약서 트렌드를 엿보고, 국내외 사례와 똑똑하게 계약서 쓰는 법을 정리했다.


#. “재혼을 앞두고 있는데 자식들 때문이라도 애들 엄마 될 사람과 재산 문제는 확실히 해두고 싶은데 혼전계약서를 쓰는 게 좋을까요.” 최근 한 법무법인을 찾은 70대 자산가가 이혼 전문 A 변호사에게 털어놓은 고민이다. 그는 20억 원 정도 재산을 가지고 있고, 출가한 삼남매가 훗날 유산 상속을 문제 삼아 아버지의 재혼을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 한 중견기업 오너 2세가 이혼 전문 B 변호사에게 혼전계약서 1부만 작성해달라고 했다. 사연인 즉,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평범한 집안의 딸이라는 이유로 부모의 반대가 심했던 것. 부모는 결혼을 허락하는 조건으로 이혼 시 여자 측에서 거액의 위자료를 청구할 수 없도록 서약하게 했다.


혼전계약서를 쓰는 예비부부가 늘고 있다. 결혼 전 각자 보유한 재산에 대한 권리관계와 이혼 시 재산분할 비율, 결혼 생활에서 지켜야 할 조건 등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혼전계약은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유교문화가 깊이 뿌리 내린 보수적인 사회의 특성상, 사랑해서 결혼하는 이들이 돈 문제를 운운하며 계약서를 쓰는 것 자체가 정서에 맞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구 1000명당 6.4명이 혼인하고 2.3명이 갈라서는 ‘이혼공화국’ 대한민국에서 혼전계약서는 더 이상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특히 수백억 자산가들은 무방비로 이혼할 경우 거액의 위자료를 상대에게 주어야 하는데, 이 경우 힘들게 모아온 재산을 한번에 날릴 수 있어 치명적이다. 이혼 시 재산분할은 아무래도 가장 민감한 부분이다.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나라는 부부간 재산분할 비율을 대체로 50대50 정도로 본다. 가령, 자산이 10억 원이고 채무가 2억 원일 경우 부부의 재산 축적 기여도가 50%씩 같다면 8억 원의 절반인 4억 원씩 나눠 갖는 식이다.

황혼 이혼 후 새 출발을 하려는 중장년층 자산가들이 혼전계약에 큰 관심을 보이는 것도, 재산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로 접근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얼마 전 법무법인 세종이 개최한 ‘혼인 전 계약과 가업승계 세미나’에는 평일 낮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50여 명의 고객이 참석해 북새통을 이뤘다. 세종은 최근 몇 년간 혼전계약서와 관련한 고액자산가들의 관심이늘어남에 따라 이번 세미나를 준비하게 됐다. 이날 발표를 맡은 조정희 변호사는 “황혼 이혼 건수가 많아지면서 재산분할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던 고객들의 법률 자문 건이 적지 않았다”며 “혼전계약서에 대해서는 여전히 생소하게 여기는 분위기지만 세미나 이후 진지하게 작성을 고려해보겠다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고 말했다. 혼전계약에 대한 관심은 여러 통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지난해 한 결혼정보회사가 30~60대 예비 부부 30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혼전계약의 필요성에 대해 71%가 ‘필요하다’고 응답했으며, 29%가 ‘불필요하다’고 응답했다. 25~35세 미혼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한 다른 설문조사에서도 ‘혼전계약서를 쓸 의향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남성의 26.8%가, 여성의 37.2%가 ‘그렇다’고 답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48.2%가 ‘싸움을 미리 막아 부부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했으며, 21%가 ‘이혼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응답했다.
[COVER STORY] 늘어나는 이혼, 그리고 재혼 혼전계약서로 재산분쟁 막는다
그렇다면 실제로 혼전계약서를 쓰는 커플은 얼마나 될까. 부부재산약정서를 쓰고 대법원 등기까지 마쳐 법적 효력을 지니는 혼전계약서가 많지는 않지만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2001년 5월 21일 국내 최초로 부부재산계약이 인천 남동등기소에 등기된 이후 2001~2002년 7건, 2003년 3건, 2004년과 2005년 각 1건, 2006년 3건, 2007년 10건, 2008년 15건, 2012년 17건, 2013년 29건으로 늘었다. 올해는 6월 말 기준 16건이 접수됐다.


혼전계약 법적 효력은 민법 제829조 ‘부부재산약정’
혼전계약서는 ‘부부재산계약제도(부부재산약정)’를 근거로 작성할 수 있다. 민법 제829조 ‘부부 재산의 약정과 그 변경’의 내용은 ‘부부가 혼인 성립 전에 그 재산에 관하여 약정한 때에는 이 사항을 등기하면 승계인, 제3자에게 대항할 수 있다. 전 항의 약정에 의하여 부부의 일방이 다른 일방의 재산을 관리하는 경우 부적당한 관리로 인하여 그 재산을 위태하게 한 때에는 다른 일방은 자기가 관리할 것을 법원에 청구할 수 있고, 그 재산이 부부의 공유인 때는 그 분할을 청구할 수 있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그러나 혼전계약서를 쓴다고 해서 무조건 법적 효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 법원의 기본 입장은 계약을 체결했다고 해도 이혼하는 시점에서 계약 내용 전부를 그대로 인정해주지 않는 분위기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민법 제829조를 혼인 중의 재산관계에만 적용, 이혼 시에는 동일한 효력을 인정받지 못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 하지만 시대가 달라진 만큼, 최근에는 가족법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 조항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현재의 민법 제829조의 경우 규정이 지나치게 간략해 이혼이나 상속 때 생기는 복잡한 재산분쟁으로 인한 혼선을 막는 데 한계가 있으니, 부부재산약정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혼인 종료 후의 재산 관계나 부부 일방의 사망에 대비한 계약 체결도 모두 가능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조 변호사는 “국내 혼전계약은 여전히 불완전한 측면이 있지만 구체적인 조항을 작성해 등기한다면, 이혼 시 유의미한 증거로 채택돼 재산을 지키는 데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전계약서를 작성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 현행 법정재산제는 ‘부부별산제’를 원칙으로 한다. 부부별산제란 부부가 각각 혼인하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재산 및 혼인 생활 중에 자기 명의로 취득한 재산을 그의 ‘특유 재산’으로 해 각자에게 관리, 사용, 수익을 얻게 하는 제도다. 가령, 남편이 구매한 아파트에서 거주하다가 이혼하게 돼 재산분할을 하는 경우 집값 전체가 아니라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집값이 오른 차액만 분할 대상이 된다. 이때 부부재산약정을 체결하지 않으면 재산분할의 대상이 되는 공유재산의 범위가 너무 넓어 이혼 시 법적 다툼의 소지가 생긴다. 혼전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으면 이혼 시 배우자와 재산을 50%씩 나눠야 하지만, 혼전계약서를 작성한 경우 그에 근거해서 재산을 나누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혼 전문 법무법인 윈의 이인철 변호사는 “‘혼인 전의 재산은 각자의 소유로 하고, 혼인 이후 늘어난 재산만 나눈다’고 계약하면 재산을 상당 부분 지킬 수 있다”고 말했다.

부부재산약정은 일단 체결하면 사기, 강박 등으로 계약을 취소하거나 혼인관계가 끝나 부부재산계약이 자동 종료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부부의 합의에 의해 해지하거나 내용을 변경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해 신중하게 작성해야 한다.

혼전계약서에는 재산에 관한 내용 외에도 결혼 생활 중 서로가 지켜야 할 규칙, 가령 스킨십이나 가사 분배, 자녀 양육 등 부부 사이에 필요한 여러 내용을 자유롭게 넣을 수 있다.

가족법 연구 제20권 1호에 실린 ‘등기례에 나타난 부부재산계약의 내용’을 보면 실제로 등기된 사례들의 내용도 천차만별이다.

2001년 5월 21일 인천 남동등기소에 등기된 혼전계약의 내용 중에는 ‘혼인 중 부담하게 되는 어떠한 형태의 채무에 대해서도 처의 사전 동의를 반드시 얻어야 하며, 그렇지 아니하는 경우 그 채무의 연대책임은 처가 부담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결혼 후 발생할 빚을 염두에 두고 정한 계약이다.

안양등기소에 2005년 11월 등기된 계약서에는 ‘도박, 경마, 복권, 주식투자 등에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고 가정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갔을 때, 이유 없이 3일 이상 외박할 때에는 이혼 시 자산에 대한 지분권을 상실한다’ 등 이혼의 사유가 되는 조항을 조목조목 짚고 있다. 그 밖에도 ‘이혼할 때, 사유 제공자는 자녀의 의사에 반하지 않는 한 양육권을 주장하지 못하며, 자녀가 30세가 될 때까지 생활비와 양육비로 수입의 50%를 배우자에게 지급한다’거나 ‘폭력 등 일방의 귀책사유로 인해 이혼에 이르는 경우 재산분할 비율을 70대30으로 한다’고 명시해 놓은 대목도 있다.

이 변호사는 “아직까지 혼전계약에 대한 인지가 미흡한 우리나라에서는 계약서상 내용이 주먹구구식인 경우가 많다”며 “그 내용이 현저히 불공정하거나 강압에 의해 작성된 경우, 선량한 풍속이나 사회질서에 위반하는 내용이 담기면 일부분 무효가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예컨대 ‘이혼할 경우 한 푼도 줄 수 없다’는 혼전계약서나 이중 결혼을 인정하는 내용, 상대방 신체의 자유를 억압하는 내용 등은 무효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혼전계약서 문화가 아직 생소한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잘 알지 못하는 당사자들이 해당 조항이 배우자 간이나 제3자와의 거래관계에서 문제가 됐을 때 비로소 효력을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돼 혼란을 겪는다.

이같은 혼전계약서상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전문가들은 입법적인 해결을 대안으로 꼽는다. 프랑스 등 유럽 국가에서는 몇 가지 부부재산계약 유형을 제시해 당사자가 그중 하나의 유형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양대 법학과 전상현 교수는 “대법원에서 다른나라 입법례에 근거한 표준계약 양식을 만들면 법률을 잘 모르는 부부들도 계약서를 작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전 교수는 “이제 우리나라도 혼전계약서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며 “혼전계약서는 상대방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약속을 확인하고 만약에 발생할 수 있는 분쟁에 대비해 미리 작성하는 일종의 안전장치라는 인식이 확산돼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부부재산계약의 법률 근거
민법 제829조 부부재산의 약정
① 부부가 혼인 성립 전에 그 재산에 관하여 따로 약정을 하지 아니한 때에는 그 재산관계는 본관 중 다음 각 조에 정하는 바에 의한다.

② 부부가 혼인 성립 전에 그 재산에 관하여 약정한 때에는 혼인 중 이를 변경하지 못한다. 그러나 정당한 사유가 있는 때에는 법원의 허가를 얻어 변경할 수 있다.

③ 전 항의 약정에 의하여 부부의 일방이 다른 일방의 재산을 관리하는 경우에 부적당한 관리로 인하여 그 재산을 위태하게 한 때에는 다른 일방은 자기가 관리할 것을 법원에 청구할 수 있고 그 재산이 부부의 공유인 때에는 그 분할을 청구할 수 있다.

④ 부부가 그 재산에 관하여 따로 약정을 한 때에는 혼인 성립까지 그 등기를 하지 아니하면 이로써 부부의 승계인 또는 제3자에게 대항하지 못한다.

⑤ 제2항, 제3항의 규정이나 약정에 의하여 관리자를 변경하거나 공유 재산을 분할하였을 때에는 그 등기를 하지 아니하면 이로써 부부의 승계인 또는 제3자에게 대항하지 못한다.
[COVER STORY] 늘어나는 이혼, 그리고 재혼 혼전계약서로 재산분쟁 막는다
이윤경 기자 ramji@hankyung.com | 전문가 기고 조정희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 | 사진 서범세 기자, 한국경제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