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하는 금융 명가 대우증권

KDB대우증권(이하 대우증권) 최고경영자(CEO) 인선이 난항을 거듭하고 있다. 한국 증권 업계를 대표하는 대우증권의 표류는 금융투자업에 애정을 가진 이들에게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이에 대우증권을 거쳐간 역대 CEO들의 평가를 통해 대우증권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SPECIAL REPORT] 역대 CEO로부터 길을 찾다
PART 1. 전성기를 구가한 김창희 전 사장 재임 시절
2011년 6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는 대우증권 전·현직 임원들이 모두 모였다. 74세로 세상을 떠난 김창희 전 대우증권 사장을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자리에 모인 많은 대우증권 OB(Old Boy)들은 김 전 사장 재임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대우증권을 회상했다.

대우증권이 한국을 대표하는 증권사로 성장한 데는 김 전 사장의 힘이 컸다. 1937년생인 김 전 사장은 한국 증권업의 산증인이다. 증권거래소, 한국증권금융 등을 거친 그가 대우증권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73년 대우증권 전신인 동양증권에 입사하면서부터다. 그해는 대우실업(주)이 동양증권을 인수한 해다.

김 전 사장이 동양증권으로 자리를 옮긴 데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영향이 컸다. 두 사람은 경기고와 연세대 상대 동기로 오랫동안 친분을 쌓아온 터였다. 무역으로 사세를 확장하던 김 전 회장이 증권업에 진출하며 친구인 김 전 사장을 부른 것. 영입 당시 직함은 부장이었지만 김 전 사장은 실질적으로 CEO 역할을 했다. 이후 이사, 상무, 전무, 부사장을 거치면서 김창희 전 사장은 김우중 전 회장과 동양증권 사이 다리 역할을 했다. 김 전 회장은 입이 무겁고 묵묵히 일하는 그의 스타일을 무척 신뢰했다고 한다.

김 전 사장이 경영 전반에 나선 것은 1984년 김영규 사장에 이어 대표이사에 취임한 이후다. 당시는 업계 3위 동양증권이 업계 1위이던 삼보증권을 합병하고, 상호를 동양증권에서 대우증권으로 바꾼 직후였다. 동양증권과 삼보증권을 합병해 업계 1위 증권사로 거듭난 대우증권의 초대 대표이사 사장에 오른 것이다.

이후 대우그룹 해체로 대우증권이 채권단에 넘어간 1999년까지 김 전 사장은 16년간 대우증권을 이끌었다. 재임 기간 김 전 사장은 대우증권을 2, 3위 증권사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최고의 증권사로 키웠다.

재임 기간 김 전 사장은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국제화에 앞장선 것도 그중 하나다. 한국 증권 산업 역사상 최초의 해외 사무소인 도쿄사무소를 시작으로 뉴욕사무소, 런던사무소 등을 차례로 개설했다.

도쿄사무소 개설 직후 있었던 일화가 있다. 1985년 초 김 전 사장이 도쿄사무소를 찾았다. 당시 도쿄사무소는 현 트러스톤연금교육포럼 강창희 대표가 맡고 있었는데, 김 전 사장이 “일본에서는 사장 재임 기간이 얼마나 되냐”고 묻더란다. 당시 일본은 특별한 사고가 없는 한 사장 재임 기간이 10년이었다. 3년은 다른 부사장들 교통정리하고 4년은 마음먹은 대로 경영하고, 나머지 3년은 후계자를 키운다. 강 대표의 설명을 듣고 김 전 사장은 무척 흡족해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일본보다 긴 16년을 사장으로 재임했다.

강 대표는 김 전 사장처럼 장기적인 비전을 가진 CEO가 있었기에 지금의 대우증권이 있다고 말한다. 나아가 현재 한국 증권사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이유로 김 전 사장 같은 CEO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지금처럼 매년 실적으로 평가받는 ‘월급쟁이 CEO’로는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세계적인 증권사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고(故) 김창희 전 사장은 머리가 비상해 보고를 받으면 핵심을 짚어 되물었고, 답을 제대로 못하면 목에 핏대를 세워 나무랐다. 그 덕에 ‘김핏대’라는 별칭이 따라다녔다.
고(故) 김창희 전 사장은 머리가 비상해 보고를 받으면 핵심을 짚어 되물었고, 답을 제대로 못하면 목에 핏대를 세워 나무랐다. 그 덕에 ‘김핏대’라는 별칭이 따라다녔다.
김 전 사장은 오너인 김우중 전 회장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었기에 일반적인 전문경영인과 달랐다. 그랬기 때문에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때론 과감한 투자도 가능했다. 외모도 경영 스타일에 걸맞게 장군 스타일이었다고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회상한다. 평소에는 과묵한 편이지만 흥분하면 다혈질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다고 한다. 머리가 비상해 보고를 받으면 핵심을 짚어 되물었고, 답을 제대로 못하면 목에 핏대를 세워 나무랐다. 그 덕에 ‘김핏대’라는 별칭이 따라다녔다. 따라서 많은 직원들이 보고에 앞서 체크에 체크를 거듭했고, 그 앞에서 벌벌 떠는 직원도 있었다. 그런 카리스마와 리더십이 있었기에 김 전 사장만 보고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이 많았다.


증권사관학교 대우의 명성
인재 양성도 김 전 사장의 중요한 업적 중 하나다. 인재 양성 또한 CEO가 장기적인 비전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강창희 대표는 자신이 직접적인 수혜자라고 했다. 공부를 위해 1년 휴직을 신청했더니 김 전 사장이 “월급 줄 테니 파견 나가는 형식으로 하라”고 했다. 강 대표뿐 아니라 많은 직원들이 김 전 사장의 배려 덕에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내부 인재 양성뿐 아니라 외부 인재 영입에도 공을 들였다.

강 대표는 도쿄사무소장을 끝으로 1989년 국제영업부장으로 귀국해보니 자신보다 학벌이 나쁜 부하 직원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흔치 않던 유학파들이 즐비했다. 강 대표는 “학벌 좋고 머리도 좋은데 태도까지 좋은 직원”들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현재 금융투자 업계에 퍼져 있는 대우증권 출신들의 면면을 보면 김 전 사장이 인재 양성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황건호 전 금융투자협회장을 비롯해 박종수 금융투자협회장, 손복조 토러스투자증권 사장,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사장, 신성호 IBK투자증권 사장, 김영호 트러스톤자산운용 대표, 김석중 현대인베스트먼트자산운용 사장, 한동주 흥국자산운용 사장, 나홍규 인피니티투자자문 대표, 윤재현 파레토투자자문 대표, 이철순 와이즈에프엔 사장, 정유신 한국벤처투자 사장 등이다.

당시는 증권 업황도 좋아서 투자가 아깝지 않았다. 대우증권 출범 이후 올림픽까지 주가가 상승랠리를 이어갔고, 브로커리지로 번 돈을 국제부와 리서치 등에 선행 투자를 했다. 그게 1990년대 들어 힘을 발휘해 대우증권이 부동의 1위로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이다.



PART 2. IMF와 대우그룹 해체, 그리고 산은금융지주 계열로
IMF 외환위기는 전성기를 구가하던 대우증권에도 그림자를 드리웠다. 모기업인 대우그룹 해체 후 대우증권은 제일은행 외 8개사로 변경됐다. 최대 주주가 바뀐 지 사흘 만인 1999년 9월 김창희 대표이사 사장의 이임식이 있었다. 김 사장이 물러난 자리에는 박종서 전무(현 금융투자협회장)와 이중구 상무가 공동 대표이사로 올랐다.

박 대표는 경기고와 서울대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외환은행, 한외종금, 헝가리 대우은행 등을 거친 후 대우증권에 합류했다. 그는 외환은행 시절 모시던 부장이 헝가리 대우은행장으로 가며 부행장 자리를 제안해 대우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대우그룹이 해체된 후 귀국해 대우증권 재무본부장을 지낸 인물이다.

박 전무의 대표이사 취임은 대우증권 안팎으로 이슈가 됐다. 1998년 상무로 대우증권에 합류한 사람이 1년 만에 대표이사 전무 자리에 오르니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항간에는 외부 압력설이 나오기도 했다. 박 전무와 동문인 금융감독원 고위인사가 압력을 행사했다는 구설이었다.

어찌됐든 대표이사를 꿈꾸던 내부인사들의 심사가 편할 리 없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손복조 사장과 황건호 전 회장이다. 황 전 회장은 1976년 대우증권 전신인 동양증권에 입사해 국제금융부장, 기업금융본부장 등을 거친 정통 대우맨이었다. 손 사장 또한 1984년 대우증권에 입사해 기업금융본부장을 지낸 내부인사였다.

대표이사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이다 박 전무가 승자가 된 것이다. 이후 지금까지도 세 사람은 관계가 껄끄럽다. 재밌는 사실은 황건호 전 회장과 박종수 전무는 2008년 금융투자협회 초대 회장 자리를 두고 다시 한 번 경합을 벌였다는 점이다. 2008년 리턴 매치에서는 황 전 회장이 승자가 됐다.

박종수 대표를 아는 이들은 그를 ‘외유내강형 CEO’라고 말한다. 항상 웃는 얼굴이지만 대표이사에 오른 후 직원들을 장악하고 정비에 나섰다. 그 덕에 대우증권이라는 조직이 크게 망가지지 않았다는 게 금융권의 평가다.

박 대표 취임 후 대우증권은 ‘시장의 리더가 된다’는 기조하에 금융 종합 서비스를 제공하는 투자은행(IB)으로 변신을 시도한다. 그는 브로커리지 중심의 체질을 은행원 출신답게 자산관리 중심으로 변화시키려 했다.
업계 1위 자리를 탈환한 손복조 사장 시절.
업계 1위 자리를 탈환한 손복조 사장 시절.
손복조 토러스투자증권 사장
손복조 토러스투자증권 사장
대과 없이 임기를 마친 박 대표를 이어 2004년 대표이사에 오른 이는 손복조 사장이다. 손 사장은 취임 인사를 통해 ‘업계 1등의 자존심 회복’이 대표이사로 해야 될 가장 큰 사명과 역할이라고 밝혔다. 원년 멤버인 손 사장이 대표이사에 오른 후 대우증권은 다시 소매영업에 주력한다. 랠리를 계속하던 주가도 손 사장을 거들었다. 2005년 7월 19일 대우증권은 종가 기준으로 증권 업계 시가총액 1위로 올라섰다. 8월에는 자산관리 잔액이 처음으로 10조 원을 돌파했다. 브로커리지부문 수익점유율이 10%대에 진입한 가운데 자산관리 영업까지 정상권에 오른 결과였다. 손 사장은 지금도 자신의 임기 중에 대우증권이 명예를 회복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실제 손 사장이 대우증권 대표를 맡던 시기 그를 따르는 임직원이 많았다. 손 사장에 대한 신뢰는 2007년 그의 연임 불가 방침이 알려지자 전국 지점장들이 모여 ‘집단 사표’라는 초강수를 택한 것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박종수·손복조 사장 뒤를 이은 대표들
박종수 금융투자협회장
박종수 금융투자협회장
우여곡절 끝에 김성태 고문이 2007년 대표이사 자리에 올랐다. 김 고문은 연세대를 졸업한 뒤 씨티은행 서울지점, 뱅커스트러스트(BTC) 서울지점 이사, LG종금 상무, LG투자증권 사장, 흥국생명 사장 등을 거친 인물이다. 은행 출신의 김 사장은 그러나 2009년 임기를 1년 남기고 중도 사퇴했다. 대주주인 산업은행의 지주회사 출범에 따라 사퇴를 결정한 것이었다.

산업은행금융지주 출범 후 2009년에는 임기영 사장이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연세대 경제학과와 조지워싱턴대 경영대학원을 나온 임 사장은 장기신용은행, 뱅커스트러스트 서울지점 기업금융책임자, 살로몬브라더스 한국대표, 삼성증권 IB사업본부장, 도이치증권 한국 부회장, IBK투자증권 사장 등을 거친 기업금융 전문가다. 민유성 전 산업은행장이 대우증권 IB부문을 육성하겠다는 복안을 갖고 그를 적극 추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임 사장은 임기 중 차명계좌 개설 의혹, 측근 임원이 연루된 비위혐의 등으로 구설에 올랐다. 2012년에는 잦은 인사와 조직 개편, 희망퇴직 등으로 노조와 마찰을 빚어 대우증권 노조가 장외 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얼마 전 산은금융지주와 마찰로 사퇴한 김기범 사장은 대우증권 국제영업본부장, 메리츠증권 사장 등을 역임한 증권인이다. 김 사장은 증권업 전체가 불황으로 구조조정 바람이 매섭던 시기에도 조직 안정에 힘을 쏟았지만 임기를 8개월 남기고 사퇴했다.

사퇴 배경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중국고섬 사태와 관련한 산은금융지주와의 마찰도 그중 하나다. 중국고섬 사태는 대우증권이 대표 주관사로 상장을 이끈 중국고섬이 두 달 만에 상장 폐지된 사건이다. 이로 인해 대우증권은 일회성 비용이 증가했고 그해 당기순손실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중국고섬 사태는 임기영 사장 시절 생겼고, 김기범 사장은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산은금융지주와 마찰을 빚었다.

문제는 대우증권이 외환위기 이후 많은 CEO를 거치며 경쟁력을 잃었다는 점이다. 대우증권은 강한 조직으로 이끌어온 회사인데, 이제는 직원들도 자부심을 잃었다. 대우증권 출신의 한 인사는 “예전에는 지점장을 하다 승진 못하면 창피해서 나갔는데 지금은 그냥 버티고 있다”며 “공기업 같은 문화가 팽배해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민영화는 대우증권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그래야만 잦은 CEO 교체와 정부 눈치 보기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또 다른 인사는 “CEO가 자주 바뀌면서 결국 거버넌스에 문제가 생겼다”며 “장기적인 비전을 가진 CEO가 나서 인건비를 유동화시키고 저성장·저금리 시대에 맞는 비즈니스 모델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신규섭 기자 wawoo@hankyung.com | 사진 한국경제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