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상속 플랜 경영 수업 실태 및 방향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 이후 대한항공의 주가는 폭락했다. 일부 소비자들의 ‘대한항공 불매’ 운동 움직임도 감지되고 있다. 그동안 대한항공이 쌓아온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질 위기다.

이 사건으로 후계자의 ‘경영자 수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금 깨닫게 했다는 게 재계의 한 목소리다.
[BIG STORY] 기업가 정신·경영 능력 필수 “현장에서 굴리고 또 굴려라!”
가족경영기업의 생존률은 지극히 낮다. ‘패밀리비즈니스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글로벌 회계·컨설팅업체인 EY한영에 따르면 “가족경영기업이 3대까지 생존할 확률은 3%”에 불과하다. 그만큼 가족이 대를 이어 기업을 경영하는 것이 어렵다는 의미다.

반대의 시각도 있다. 컨설팅회사 매킨지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포천 500대 기업’ 중 19%가 가족경영기업이다. 이는 2005년 15%에서 4%포인트 늘어난 수치다. 매킨지는 2025년엔 세계적으로 매출 10억 달러 이상의 대기업이 1만5000개에 달하고, 이 중 37%를 개발도상국의 가족경영기업이 차지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2010년 8000개(15%)에서 배 이상 증가한 숫자다.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가족경영기업의 장점은 향후 이전보다 더 부각되리라는 분석이다.

가족경영기업의 장점은 책임감과 장기적 안목의 경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영국의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가족경영기업이 유지되는 근본적인 이유로 경영 능력을 갖춘 창업자나 후손이 단기 실적에 쫓기지 않고 장기적인 시각에서 뚝심 있게 기업을 끌고 갈 수 있다는 점과 차입을 꺼리는 오너들이 부채비율을 낮게 유지해 위기에 빠지지 않는다는 점을 꼽았다. 반면 가족경영기업의 단점은 역량이 부족한 후계자가 승계했을 경우다. 특히 수십 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수만 명의 임직원을 둔 거대 기업일수록 역량이 부족한 자녀가 경영권을 갖게 되면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3·4세, 2세와 또 달라
현 한국 재벌가의 후계자들은 대부분 3·4세다. 3·4세와 2세는 엄연히 구분해야 한다. 2세는 대부분 창업자의 실패와 성공의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고 배웠다. 어떻게 하면 성공하고, 또 실패하는지를 지근거리에서 목격했기 때문에 창업자의 DNA를 자연스럽게 물려받을 수 있었다. 반면 3·4세는 하나의 비즈니스가 어떻게 태동하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성장하는지를 아예 모른다. 더구나 예전처럼 자녀의 수도 많지 않아 예전처럼 여러 명 중 한 명을 선택하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다행히 일부 재계의 오너들은 ‘현장 수업’의 중요성을 깨닫고, 2·3·4세들을 ‘험한’ 곳으로 내몰아 제대로 된 교육을 받게 하고 있다. 물론 이들의 직책이 평사원이 아닌 차장, 부장급으로 시작한다는 문제점이 없진 않지만, 어쨌거나 생산 현장부터 경험하게 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 대표적으로 구자열 LS 회장의 외아들 구동휘 씨가 있다. 올해 33세인 동휘 씨는 2013년 11월 LS산전 차장으로 입사, 본격적인 경영 수업을 시작했다. 그는 처음 경영전략실 CSO(전략기획) 부문에서 일했으나, 바로 충북 청주에 있는 LS산전 생산공장 생산기획팀으로 발령이 났다. 입사 전 2012년에는, 아버지 구 회장의 권유로 우리투자증권 IB(투자은행)본부에서 2년 가까이 일한 동휘 씨는 역시 공장 일부터 배워야 한다는 부친의 철학에 따라 현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의 장남 김남호 동부팜한농 부장도 2009년 동부제철에 입사하자마자 현장에서 경영 관리 노하우를 쌓으라는 부친의 뜻에 따라 당진공장 아산만관리팀으로 내려갔다. 이웅렬 코오롱그룹 회장의 장남 이규호 코오롱글로벌 경영전략팀 차장도 코오롱인더스트리 구미공장에서 시작했다.

철저히 밑바닥부터 시작한 사례도 있다. 허창수 GS그룹 회장의 외아들 허윤홍 씨는 현재 GS건설 상무지만 과거엔 주유원 근무 경력까지 있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2002년 GS칼텍스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3개월간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는 주유원으로 일한 것. 이후로도 10년간 현장에서 일하며 혹독한 수업을 받은 바 있다.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은 장남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부회장이 대학을 졸업하자 미국 알래스카행 명태잡이 원양어선에서 선원으로 일하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그는 하루 16시간씩 온갖 허드렛일부터 참치를 잡아 냉동시키는 과정까지 담당하며 ‘제대로’ 수업을 받았다. 김 회장의 차남인 김남정 동원엔터프라이즈 부회장도 대학 졸업 후 창원공장에서 참치캔 포장, 창고 야적 일 등을 하다가 청량리시장 영업사원으로 일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눈에 띄는’ 몇몇 기업의 얘기일 뿐, 대부분의 기업은 여전히 ‘황제식’이다. 미국 유명 대학 MBA 코스를 거친 뒤 곧바로 중견간부나 임원으로 시작해 해마다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땅콩 회항’ 사건으로 가족경영기업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한진그룹이 대표적이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은 25세에 입사해서 7년 만에 임원이 됐고 부사장이 되기까지 14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동생들은 더 빨라서 조원태 부사장은 3년, 조현민 전무는 4년 만에 임원이 됐다. 경영권을 쉽게 물려받으니 선민의식과 특권의식이 생기고 독단에 빠지기도 쉽다. 백대균 월드인더스트리얼매니지먼트컨설팅 대표는 “일반적으로 후계자에게 회계부터 가르친다”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나 윤리경영 등 현대 기업의 필수 덕목을 가르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영승계 프로그램이 아예 없다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김선화 한국가족기업연구소 대표는 “적어도 5~10년 정도 기간의 후계 프로세스를 수립해 승계를 해야 한다”며 “그 과정에서 밑바닥부터 착실하게 수업을 시켜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고 꼬집었다.

그럼 3·4세들의 경영 수업은 어떻게 시켜야 할까. 우선 재벌 2세에서 이뤄지던 경영자 수업과 2세와 3·4세 경영 구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의 경영자 수업의 관점이 달라져야 한다. 3·4세들은 어린 시절부터 주변에서 ‘황태자’ 대접을 받은 데다, 주로 해외 MBA를 거쳐 이론적 학습은 어느 정도 이뤄졌다고 하더라도 현장 경험이 전무하다. 따라서 밑바닥부터 충분한 현장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현장 조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업무의 프로세스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배울 수 있다.

이런 현장 경험을 통해 경영 능력을 갖춰야 한다. 작은 신사업부터 맡겨 냉혹한 시장에서 승리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여기다가 인성 교육도 필수적이다. 경영자로서의 능력과 인품을 갖추지 못했다면 아무리 핏줄이라도 경영권을 물려줘서는 곤란하다. 자녀에게 더 큰 아픔을 주기 때문이다.



성공적인 승계 프로세스

STEP1
어린 시절의 태도 형성

기업과 일에 대한 태도는 어린 시절에 형성된다. 이 시기에는 부모로부터 기업 이야기를 듣거나, 기업을 방문하거나, 출장에 동행하거나 또는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기업에 대해 알아가는 단계다.


STEP2
회사 안팎에서 실무 훈련

후계자 훈련은 보통 자녀가 대학을 졸업한 뒤 사회생활을 하면서 시작된다. 이 시기는 현장 실무 기술을 익히고 대인관계 능력을 키우는 데 중점을 둔다.


STEP3
후계자 리더십 계발

후계자는 실무 훈련을 거쳐 임원의 위치에 오르며 경영에 참여하게 된다. 이 시기 경영자는 후계자의 감독자, 교육자, 보호자, 소개자, 동기부여자의 역할을 해야 하고 후계자가 성장하면서 점차 파트너 관계로 역할을 전환해야 한다.


STEP4
경영권의 점진적 이전

후계자가 실제적인 책임과 권한을 가지고 업무를 수행하는 시기로, 대부분 사장 또는 부사장의 직함을 갖는다. 이 시기 가장 중요한 것은 후계자의 성장에 따라 리더십을 점진적으로 이전하는 것이다.


STEP5
아름다운 은퇴

후계자가 경영 노하우를 전수받고 리더십을 갖추게 되면 경영자는 일선에서 물러난다. 그런데 경영권을 승계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전 경영자는 후계자의 멘토나 조언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이상재 중앙일보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