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기업의 역사가 짧다 보니 성공적 가업승계의 롤 모델을 찾기가 힘들다. 하지만 해외에선 가족기업으로 수백 년간 이어온 기업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어떻게 했기에 분쟁 없이 장수할 수 있었을까.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구치는 3대를 못 넘기고 창업자 가문에서 다른 가문으로 매각됐다. 미국 서부지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일간지 LA타임스 또한 2000년 갑자기 트리뷴(Tribune Company)에 매각되고 말았다.

한때 승승장구하던 이 기업들이 무너진 이유는 무엇인가? 가족들 간의 경영권 다툼으로 극심한 경영난에 빠졌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허무하게 무너진 구치나 LA타임스의 이야기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현재 진행 중인 롯데가(家)의 분쟁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기업 중에서도 가족 간 소유권 분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곳이 매년 20~30%씩 증가하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족 분쟁을 막을 방법은 없는가? 가족 분쟁으로 회사가 어려움을 겪거나 심지어 매각되는 경우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해외에는 100년, 심지어 200년 넘도록 한 가문에서 기업이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회사도 아주 많이 있다. 과연 그들의 공통적인 성공 요인은 무엇일까?

1. 별도의 가족고용정책을 가지고 있다
스웨덴의 출판·미디어 기업인: 보니에르 그룹
[롯데家 분쟁, 남의 일 아니다] 해외 가족 기업의 분쟁 없는 상속 비결

대부분의 오너 경영자들은 자녀들이 원하면 언제든 회사에서 일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특별한 조건이나 제한 없이 말이다. 그리고 경험이나 능력이 부족한 데도 가족이라는 이유로 일정 기간이 지나면 최고경영자(CEO)가 된다. 과연 자녀가 리더로서 준비가 미흡하거나 능력이 부족한 데도 기업을 경영하는 것이 정말로 자녀를 위한 것인지 의문이다. 게다가 가족들이 기준과 원칙도 없이 너도나도 회사에 들어온다면 후계자 선정 과정에서 갈등만 커질 뿐이다.

더욱이 기업이 3대로 넘어가면 기업에 참여하는 가족 수가 많아지기 때문에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이나 유럽의 성공한 장수기업들은 대부분 가족고용정책, 즉 가족이 기업에 참여하는 조건을 미리 협의하고 명문화하고 있다. 가족고용정책의 공통점은 대학을 졸업하고 외부에서 수년간의 경험을 쌓아야 하고, 일반 직원과 동일한 평가를 거쳐 회사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족도 엄격한 평가를 통과해야만 CEO가 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스웨덴의 출판·미디어 기업인 보니에르 그룹(Bonnier Group)이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1804년 설립돼 무려 200년이 넘게 유지돼 오고 있는 이 기업에는, 창업자가 정해 놓은 ‘가족들이 회사 경영에 참여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가족들도 반드시 직원과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보상을 받는다’, ‘가족 중 누군가 대표 자리에 오르려면 이사회의 평가를 거쳐 승인을 받아야 한다’ 등의 내용이다.

가족이라고 특별대우를 받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처럼 실력을 쌓아야만 입사하고 승진할 수 있으며, 이렇게 건전하고 공정한 경쟁을 거쳐 모두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자녀가 진짜 후계자가 될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해 둔 것이다. 이러한 규정 덕에 능력이 없는 자녀는 후계자가 되기 어렵다. 이와 같이 엄격한 가족고용정책을 만든다면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로 능력과 관계없이 기업에 참여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족벌주의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인식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2. 가족주주 간 주주협약서를 두고 있다
프랑스 가족경영 럭셔리 브랜드: 에르메스 가문
[롯데家 분쟁, 남의 일 아니다] 해외 가족 기업의 분쟁 없는 상속 비결
창업 초기에는 창업자가 지배적인 소유권을 가지고 있지만, 대개 2대나 3대에 이르면 소유권이 가족들에게 분산되기 마련이다. 가족기업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거의 대부분이 소유권과 관련된 것이고, 세대를 넘어가면서 창업 가문 내에서의 영속성이 불투명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러 세대의 가족들이 주식을 나누어 가지면서도 창업자의 경영철학을 지키며 가문 내에서 기업이 지속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장수기업들은 대부분 가족주주 간 주주협약서를 체결하고 있다.

그 좋은 예가 창업자 가문에서 6대에 걸쳐 약 170여년 동안 이어온 세계적인 명품 기업 에르메스 가문이다. 에르메스의 장수 비결은 바로 기업 소유권을 가족 내에서 지속적으로 통제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는 점이다. 에르메스는 전체 지분의 80%를 여전히 56명의 가족이 보유하고 있으며, 이 중 6명이 최대주주로 각각 5~10%를 가지고 있다. 현재 5세대 가족 중 5명이 최고 경영층에 있고, 6세대 가족 중 5명이 임원으로 일하고 있다.

이들이 6대에 걸쳐 기업을 유지해 온 데에는 가족들 간 합의한 주주협약서가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에르메스의 주주협약서의 주요한 목적은 3가지다. 첫째, 소유권에 따른 가족주주의 권리와 책임을 규정하는 것이고, 둘째, 기업의 근본을 흔드는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을 예방하는 것이며, 셋째, 가문에서 지속적으로 기업의 통제권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에르메스 주주협약서의 주요 내용은 ‘주식을 매도하려는 가족은 반드시 가족 내에서만 매매해야 한다’, ‘의결권이 있는 주식은 가족들만 소유할 수 있으며, 외부인이나 이혼으로 인해 가족관계가 끝난 사람은 의결권 있는 주식을 보유할 수 없다’, ‘회사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거나 CEO를 교체하려면 가족주주 75% 이상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회장은 가족위원회에서 선정한 이사회 멤버가 정하는 인물이 된다’ 등이다.

에르메스의 주주협약서는 가족 내에서 기업을 이어가겠다는 가족 공동의 꿈이 합의되고, 가족 간 분쟁을 예방하려는 의지가 발휘된 결과물이다.


3. 경영권은 가족위원회에서 결정한다
유리공장에서 크리스털 월드까지: 스와로브스키 일가
[롯데家 분쟁, 남의 일 아니다] 해외 가족 기업의 분쟁 없는 상속 비결
한 기업의 주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 기업의 주주로서’ 기업 경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다. 그리고 주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입김이 세지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신이 더 많은 주식을 갖고 회사를 좌지우지하기 위해 다른 가족들과 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만약 능력이나 자질이 부족한데 지분이 많다는 이유로 회사를 자기 마음대로 경영한다면 이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대부분의 장수기업들은 이러한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가족규정을 마련하고 있다.

그중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와로브스키가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이 기업은 1895년 오스트리아의 작은 시골에서 시작해서 크리스털 액세서리의 세계적인 리더로 5대째 이어가고 있다. 현재는 150여 명의 스와로브스키 일가가 회사 오너십을 나누어 가지고 있으며 5세대들이 경영 전반을 포진해 있다.

이 기업이 창업가의 가문에서 100년 이상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은, 특정 가족 구성원에게 절대 권력이 생기는 것을 견제하는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은 지분율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그것으로 인해 회장 자리에 오를 수 없다. 회장은 가족위원회에서 선정한 8명의 이사회 멤버가 정하는 인물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규정은 가족회의를 통해 합의하고 명문화됐기 때문에 가족 간 갈등이나 분쟁을 예방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4 올바른 가치관과 스튜어드십을 이전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화학·의약 회사: 머크가
[롯데家 분쟁, 남의 일 아니다] 해외 가족 기업의 분쟁 없는 상속 비결
아무리 장치를 잘 만들어 놨어도 가족주주들이 “그딴 거 무시하면 뭐 어때”라고 생각하면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주주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자신이 가진 권리를 행사하도록 공통된 가치관을 정해 두고 가족들을 교육해야 하는 것이다.

독일의 347년 된 기업 머크(Merck)가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이 기업도 주식을 가진 가족 수가 엄청나게 늘어나면서 갈등과 분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가족들은 합의하에 이러한 가치관을 내걸었다. 바로 ‘가족주주들은 스스로를 오너(owner)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다음 세대 자녀들을 위해 주식을 신탁(信託)하고 관리하는 사람들(Trustees)일 뿐이다’라고. 이를 전체 가족회의에서 공유하고 다음 세대 기업을 이끌 자녀들을 현장 견학, 세대 간의 대화, 주주로서의 책임과 의무 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철저하게 교육하고 있다.

그래서 이 기업의 가족주주들은 ‘내가 갖고 있는 주식을 어떻게 써먹을까’가 아니라 ‘어떡하면 기업의 주식을 잘 지켜 다음 세대에게 더 큰 가치를 물려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이를 위한 다양한 시스템을 고안해 낼 수 있었다. 주식은 곧 기업 경영에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권리와 같다. 하지만 주식을 갖고 있는 가족구성원 모두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갈등과 분열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현화 기자 leeh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