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의 취미

점잖은 슈트 속에 감춰진 뮤지션 본능을 드러내는 데 1분이면 충분했다.
서울 신사동에 위치한 실용음악원 파워하우스에서 만난 조준희(48) 유라클 대표와 이근승(50) IMM네트웍스 대표는 연습실에 들어서자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렉트로닉 기타를 둘러맸다. 이내 이어지는 시원한 일렉 사운드. 오십 언저리의 두 중년 남성은 기타 줄을 튕기며 일상의 시름을 날렸다.
[Cover]조준희 유라클 대표 & 이근승 IMM네트웍스 대표  “ 일렉 기타에 미칠 때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이 친구가 날 끌어들였죠. 가만히 있는 사람을 ‘날라리’로 만들어 놨어.”(웃음) (이근승 대표)
“어이구, 형님. 이렇게 좋아하시면서.”(조준희 대표)

일렉 기타에 푹 빠진 50대 최고경영자(CEO)가 있다는 소개를 받고 파워하우스로 향했다. 갓 50대가 된 남성 한 명과 곧 50대를 바라보는 남성 한 명. 모바일 소프트웨어 및 헬스케어 서비스 전문 기업 유라클을 운영하는 조준희 대표와 투자회사인 IMM네트웍스를 운영하는 이근승 대표는 이곳에서 일렉 기타를 배우는 수강생이다. 엄밀히 말하면 배우는 데서 그치지 않고, 또래들과 멤버를 결성해 밴드도 만들고 정기적으로 공연도 갖는다.

날마다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는 비즈니스의 현장이 현실 세계라면 기타를 메고 음악을 하는 이 공간은 이상의 세계다. CEO와 아마추어 기타리스트. 전혀 다른 두 가지 모습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퍽 매력적이라며 그들은 엄지를 들어 올렸다.

일찍이 일렉 기타에 빠져든 조준희 대표가 아마추어 밴드 활동의 매력을 또래들에게 알음알음 전파했다. 마음은 있지만 ‘내가 저런 걸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던 중년의 기업가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고, 파워하우스는 CEO들이 다니는 음악학원으로 소문이 났다. 이근승 대표도 그중 한 명이다.


“바쁘게 살아왔는데, 너무 늙어 버렸다”
이 대표는 홍콩 페레그린증권 인베스트먼트 뱅커 출신으로 30대에 현재 IMM네트웍스외에 당시 지인들과 IMM컨설팅을 창업했다. 투자자문, 창업투자업으로 사세를 확장하는 동안 삶을 고스란히 사업에 바쳐야 했다. 당연히 취미생활 같은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올해 지천명(知天命)을 맞으면서 느끼는 바가 있었다. 어느 날 거울을 보면서 문득 나이 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한없이 슬퍼졌다고 했다.

“우리 나이가 되면 자기 늙는 건 잘 몰라요. 그러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보면 깜짝 깜짝 놀랍니다. 오십이라는 숫자는 사십과는 또 달라요. 사십은 발버둥 치면 거부가 되지만 오십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죠. 우울증으로 빠지지 않으려면 밝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은데 그럴 만한 계기가 없었어요. 준희가 음악의 세계로 인도해준 덕분에 구원받았죠.(웃음)”

그는 “기업하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느라 우울한 이야기만 한다”며 “여긴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사람들이니 즐겁고 신나는 얘기만 하게 되는데, 그 속에서 새로운 삶의 가치를 찾는다”고 말했다.

오래전부터 삶과 일의 조화를 추구해 온 조 대표가 맞장구를 친다. 그는 와인, 아쿠아리움, 피규어, 골프, 산악자전거(MTB) 등 여러 취미생활을 통해 육체와 정신을 단련해 왔다. 남성들이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우울해지는 건 가정, 직장에서 그 어느 때보다 큰 희생을 강요당하기 때문인데, 반대급부로 자신에게 투자하다 보면 묘하게 위안이 된다는 게 그의 얘기다.

“60, 70대를 풍요롭게 살기 위해 적어도 50대 전까진 할 수 있는 걸 배워 놔야 해요. 지금이라도 평생 가지고 갈 취미 하나 정도는 배우라고 권합니다. 나중에 은퇴하고 나서 해야지 하면 이미 늦어요. 금전적으로도 달리니 실력이 느는 것을 기대하기도 어렵고요.”(조준희 대표)
[Cover]조준희 유라클 대표 & 이근승 IMM네트웍스 대표  “ 일렉 기타에 미칠 때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영원히 나이 들지 않는 법은 취미를 가지는 것
이들은 음악을 하면서 언제 가장 희열을 느낄까. 이근승 대표는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다”라고 말했다. 취미로 악기를 배우면 코드를 다 익히고 나서는 지루해서 금방 그만두게 된다.

파워하우스는 밴드를 결성해 공연을 한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악보를 볼 줄 모르는 아마추어도 3개월만 꾸준히 배우고 연습하면 무대에 설 수 있다. 한 번 공연을 해본 사람은 그 희열을 잊지 못해 더 열심히 음악에 빠지고 다음 무대를 위해 더욱 실력을 연마하게 된다. 지난 9월 홍대의 한 클럽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는 이 대표의 표정에 생기가 넘쳐흘렀다.

“짜릿했어요. 처음엔 내가 할 수 있을까 했죠. 어쨌거나 합주가 되더군요. 잘하든 못하든 우리끼리 즐기는 무대이니 스트레스 받을 것도 없고요. 무대에 섰던 날을 정말 잊을 수 없어요.”
조 대표는 영국 기타리스트인 에릭 클랩튼의 광팬이다. 에릭 클랩튼이 쓰는 팬더사(社)의 기타를 구매하기 위해 무척 공을 들였고 결국 토드 크라우스라는 장인이 만든 마스터 빌더 시리즈를 800만 원에 손에 넣었다.

그는 악기를 연주하며 자녀들과 공유할 수 있는 부분도 많아졌다고 했다. 현재 고등학교 3학년인 아들과 음악 이야기를 하며 자연스레 교감할 수 있게 됐다. 사람이 긍정적으로 바뀌니 사업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는 데다 레슨 때문에 저녁 약속을 점심으로 옮기다 보니 술도 줄어들고 건강을 챙길 수 있다는 것 역시 장점이다. 여러모로 50대에 균형적인 삶을 사는 데 악기 연주만큼 도움이 되는 것도 없다고 입을 모은다.

“오십은 산 정상에 올라가기까지 가장 힘든 구간인 것 같아요. 산에 올라가면 어떤 식으로든 내려와야 합니다. 늙지 않는 방법은 취미를 가지는 겁니다. 그리고 그 안에 몰입해보세요.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자신할 수 있어요.”(조준희 대표)

“제 인생이 행복하냐고 물으면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돌아서면 너무나 복잡한 일들도 많거든요. 적어도 이걸 할 때만은 행복하니까. 그러면 좋은 거 아닙니까.”(이근승 대표)


이윤경 기자 ramji@hankyung.com
사진 김기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