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story 18세기 인문학]
키워드로 보는 18세기 인문학_18세기의 문장

소품문의 시대,
작은 것들을 찬양하다

18세기의 화려한 문화의 꽃은 문체로 피어났다. 형식적으로는 짧은 길이, 내용으로는 개별적이고 작은 가치를 담은 18세기의 문장은 거창하고 심오하면서 논리와 윤리를 강조한 고문과 차별되며 오늘날까지 명문장으로 회자되고 있다.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키워드로 보는 18세기 인문학_18세기의 문장
18세기 조선에서는 문학의 역사에서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났다. 교육 열풍의 뒤를 이어 어떤 시대보다도 많은 문인들이 배출됐고, 그 결과 획기적이라고 할 만큼 많은 문집들이 만들어졌다. 문인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수적인 증가를 기반으로 지금까지도 그 명성이 이어진 많은 명문장가들이 배출됐다. 당연히 기억할 만한 수많은 명문이 이 시대에 창작됐다.
변화가 양적으로 질적으로 크게 일어났는데 여기에는 전통적으로 문학을 창작하고 향유한 양반 사대부만 그 역할을 맡지 않았다. 여성들도 참여하고 실무적 업무만 담당하던 중인(中人)들도 문학 활동에 참여했다. 심지어는 노비들까지도 전문 시인으로 등장해 정초부나 이단전 같은 유명 인사가 배출됐다. 여성들이 소설을 읽는 독자로 나섰고, 중인을 비롯한 서민들이 문학에 참여하면서 이른바 여항문단(閭巷文壇)이 만들어졌다. 요컨대, 문학이 양반 남성만 독점하던 데서 벗어나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18세기에 문인들이 역동적으로 문학을 즐기면서 창작은 그야말로 역동적인 국면을 연출했다. 그중에서도 문장에서는 특별한 변화의 바람이 몰아쳤다. 새로운 문장을 쓰려는 시도가 거세게 일어났고, 그렇게 등장한 새로운 문장을 소품문(小品文)이라 불렀다. 소품문은 들판의 불길처럼 문단에 새로운 글쓰기의 흐름으로 대두해 기왕의 낡은 문장을 대체하려고 덤벼들었다.
그렇다면 이 소품문은 대체 무엇인가? 이름도 생소한 소품문은 18세기를 전후해 등장했다. 그 이전에는 옛날 스타일의 고문(古文)이란 문체가 있었다. 건국부터 멸망하기까지 조선시대에는 고문 양식이 지배했다. 문인들은 고문 양식을 준수해 글을 썼다. 고문은 중국의 당송(唐宋) 시대에 마련된 스타일로 조선의 문인들은 이 스타일을 채택해 그들의 전형적 관심사를 표현했다. 고문은 조선 유가사상의 범주를 거의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조선 선비의 사유와 정서, 논리와 윤리를 충실하게 지향했다. 조선왕조 특유의 이데올로기를 문체와 내용 면에서 충실하게 투사했다. 문인들이 정치와 철학, 도덕과 삶을 논하고, 사유와 감정을 표현할 때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고문이었다. 하지만 어떤 양식도 영원한 생명력을 가질 수는 없다. 고문은 오랜 기간 사용되면서 역으로 융통성 없는 틀로 작용했다. 변화를 추구하는 문인들에게 고문은 구속이었다. 형식적 구속은 내용과 정서마저도 구속했다.
그런 예스런 스타일의 문장에 불만을 품고 변화를 요구하는 문인의 욕구가 18세기에 폭발했고, 경직돼 생생한 활력을 잃어 가는 문체를 개혁해 새로운 스타일의 문장을 쓰려는 혁신 운동이 일어났다. 그 중심에 이용휴(자기다운 삶을 찾는 글), 박지원(그 자체로 문체가 된 이름), 노긍(냉소와 자의식의 산문), 이덕무(문단을 뒤흔든 낯선 문장), 이옥(저잣거리의 이야기꾼), 홍길주(천하의 지극한 문장)와 같은 문장가들이 등장했다.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지식인의 내면을 꺼내다

소품문은 고문과는 반대의 방향을 취했다. 대체로 탈(脫)이데올로기적이어서 정치나 윤리의 문제보다는 개인의 기호와 소시민주의가 상대적으로 크게 나타났고, 정치 혐오증과 같은 태도를 표명했다. 국가와 백성, 윤리와 심성과 같은 보편적 가치, 큰 가치에 억눌려 발산하지 못한 개별적이고 작은 가치에 시선을 던졌다. 고문이 보편적인 진리를 말하고자 했다면 소품문은 구체적인 진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전형적 선비들은 말하려 하지 않았던, 현실세계의 다양한 진실을 말하려 들었고, 당대의 현실을 당대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당대의 문체로 묘사하려 했다.
따라서 소품문에는 당대의 구체적 현실이 생생한 언어로 표현됐다. 이전에는 문학의 소재로 잘 다루어지지 않던 많은 것들이 소품문에서 즐겨 다루어졌다. 예컨대, 도시 취향의 삶과 의식이 자주 등장하고, 혜택 받은 존재가 아닌 소외된 인간들로서 여성과 중인, 평민들의 일상이 묘사됐다. 담배와 물고기, 새와 바둑, 음식과 화훼 같은 기호품을 문학의 소재로 당당하게 문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자신의 내면을 스스럼없이 표현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소품문은 조선의 생동하는 인정세태와 지성인들의 의식 세계, 생활 모습과 거기에 인연한 정서를 매우 진솔하게 드러냈다. 새로운 문장은 고문이 보여주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보여주었다. 생동감 있고 구체적인 삶의 모습과 지식인의 내면, 사회의 동태가 약동했다. 그리하여 짧은 길이에 서정적 내용, 아름다운 문체, 시적 감수성을 문체적 특징으로 삼았다. 그런 점에서 현대의 수필이나 단편소설, 콩트와도 견주어볼 만하다. 글쓰기의 소재를 선택할 때에도 일종의 탈중심화 경향이 나타나는데 그 특징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회에서 벌어지는 소외 현상과 소외된 인물을 선호한다.
둘째, 개인의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해 각 개인의 독특한 삶과 개성, 자의식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셋째,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무의식을 자랑스럽게 폭로하고 예술과 문필 생활을 예찬한다.
넷째, 도시민 생활의 활력과 일반 서민들의 저속한 생활상을 즐겨 묘사한다.
다섯째, 한가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선망한다.
기왕에는 부귀한 자나 명망가 등 이른바 사회적 성공을 거둔 명사를 대상으로 삼아 글을 썼다면 시장 사람들이나 소외된 인간, 불우한 인생을 찾아 그들의 남다른 삶을 포착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인물들의 치부까지도 폭로함으로써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간을 제시하기보다는 현실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을 법한 인물의 형상을 만들고자 했다. 태동하는 시민사회의 활력을 이 시기 문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창작된 18세기의 문장은 한국 사람다운 생활의 감정과 정서를 충실하게 담고 있어 현대 한국인이 읽어도 공감할 수 있는 문장으로 탄생했다. 우리가 전근대로 올라가 현대인의 감수성을 갖고서 공감할 수 있는 문장이 유난히 18세기 작품에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장의 품격_18세기 명문장 하나
이옥의 <연경(烟經)> 4권 4절 ‘담배가 맛있을 때’
◎ 책상을 앞에 두고 글을 읽는다. 중얼중얼 반나절을 읽으면 목구멍이 타고 침이 마르지만 달리 먹을 것이 없다. 글 읽기를 마치고 화로를 당겨 담뱃대에 불을 붙여 한 대를 조금씩 피우자 달기가 엿과 같다.
◎ 대궐의 섬돌 앞에서 임금님을 모시고 서 있다. 엄숙하고도 위엄이 있다. 입을 닫은 채 오래 있다 보니 입맛이 다 떨떠름하다. 대궐문을 벗어나자마자 급히 담뱃갑을 찾아 서둘러 한 대 피우자 오장육부가 모두 향기롭다.
◎ 길고 긴 겨울밤 첫 닭 울음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이야기 나눌 사람도 없고, 할 일도 없다. 몰래 부싯돌을 두드려 단박에 불씨를 얻어 이불 속에서 느긋하게 한 대 조용히 피우자 빈방에 봄이 피어난다.
◎ 산골짜기 쓸쓸한 주막에 병든 노파가 밥을 파는데, 벌레와 모래를 섞어 찐 듯하다. 반찬은 짜고 비리며, 김치는 시어 터졌다. 그저 몸 생각해 억지로 삼켰다. 구역질이 나오는 것을 참자니 먹은 것이 위에 얹혀 내려가지 않는다. 수저를 놓자마자 바로 한 대를 피우니, 생강과 계피를 먹은 듯하다. 이 모든 경우는 당해본 자만이 알리라.
해설 이옥(李鈺, 1760~1815년)이 흡연의 멋을 멋지게 썼다.

문장의 품격_18세기 명문장 둘
이용휴 <하루가 쌓여 열흘이 된다(當日軒記)>
사람들이 당일(當日)이 있음을 모르는 데서부터 세도(世道)가 그릇되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오로지 당일이 있을 뿐이다. 이미 지난 시간은 다시 회복할 방법이 없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은 아무리 삼만 육천 일이 연이어 다가온다 하더라도 그날은 그날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으므로 실제로는 그다음 날까지 손쓸 여력이 없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저 한가할 한
(閑)이란 글자는 경서(經書)에도 실려 있지 않고, 성인도 말씀하지 않으셨건만 그것을 핑계로 사람들은 세월을 허비한다. 이로 말미암아 우주 사이에는 자기 분수대로 일하지 않는 사람이 많이 생겼다. 또 이렇다. 하늘 자체가 한가롭지 않아서 늘 운행하고 있거늘 사람이 어떻게 한가하게 여유를 즐길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당일에 행할 일이 사람마다 똑같지가 않다. 착한 사람은 착한 일을 행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은 착하지 않은 일을 행한다. 따라서 길하고 흉하며, 때이고 아니고 간에 하루는 시간을 쓰는 사람 하기에 달려 있다. 하루가 쌓여 열흘이 되고 한 달이 되고 한 계절이 되고 한 해가 된다. 한 인간을 만드는 것도 하루하루 행동을 닦은 뒤에야 크게 바뀐 사람에 이르기를 바랄 수가 있다.
지금 신군(申君)이 몸을 수행하고자 하는데 그 공부는 오직 당일에 달려 있다. 그러니 내일은 말하지 말라! 아! 공부하지 않은 날은 아직 오지 않은 날과 한 가지로 공일(空日)이다. 그대는 모름지기 눈앞에 환하게 빛나는 이 하루를 공일로 만들지 말고 당일로 만들라!
해설 이용휴(李用休, 1708~1782년)가 ‘당일헌’이라는 이름의 집에 걸어둘 글을 요청받고 쓴 문장으로 교훈을 말하되 식상하지 않게 말하고 있다.

그 자체로 문체가 된 이름, 박지원
연암 박지원, <말똥구리 시집> 중 일부 발췌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말에 올라타려 할 때 종이 나서서 말했다.
“나으리! 취하셨습니다. 한쪽은 가죽신이고, 한쪽은 짚신을 신으셨네요.”
그러자 백호가 냅다 꾸짖었다.
“길 오른쪽을 가는 이는 내가 가죽신을 신었다고 할 테고, 길 왼쪽을 가는 이는 내가 짚신을 신었다고 할 게다. 내가 염려할 게 뭐냐.”
이것으로 따져보면, 천하에서 발보다 쉽게 눈에 띄는 것이 없지만 보는 방향이 달라짐에 따라서 가죽신을 신었는지, 짚신을 신었는지도 분간하기 어렵다. 따라서 참되고 올바른 견해는 참으로 옳음과 그름의 중간쯤에 있다. 예컨대, 땀에서 이가 생기는 것은 지극히 미세하여 살펴내기 어렵기는 하지만 옷과 살 사이에 빈 공간이 있어서 떨어져 있지도 않고 붙어 있지도 않으며, 오른쪽도 아니고 왼쪽도 아니니 어느 누가 그 중간을 알아낼 수 있으랴?
말똥구리는 스스로의 말똥을 아낄 뿐 여룡(驪龍)이 머금은 구슬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여롱도 구슬이 있다고 하여 말똥구리의 말똥을 비웃지 않는다.

연암 박지원 <큰 누님을 보내고> 중 일부 발췌
유인(孺人)의 이름은 아무개로 반남(潘南) 박씨(朴氏)다. 그 동생 박지원 중미(仲美)가 묘지명을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유인은 나이 열여섯에 덕수 이택모 백규에게 시집을 가서 딸 하나 아들 둘을 두었다. 신묘년 9월
1일에 돌아가 마흔세 살을 살았다. 남편의 선산이 아곡이라 그곳의 경좌 방향 자리에 장사를 지낼 예정이었다. 그런데 백규가 어진 아내를 잃은 데가 가난하여 생계를 꾸릴 방도가 없는지라, 아예 어린 자식들과 계집종 하나를 데리고 솥과 그릇가지, 옷상자와 짐 보따리를 챙겨서 배를 타고 그 골짜기로 들어가 버렸다. 상여와 함께 일제히 떠나는 새벽, 나는 두모포(斗毛浦)에서 배를 타고 떠나는 그들을 배웅하고 통곡하고서 돌아섰다.
아아! 누님이 시집가던 날 새벽에 몸단장하던 모습이 흡사 어제 일만 같구나! 나는 그때 겨우 여덟 살이라, 벌렁 드러누워 발버둥을 치면서 말을 더듬으며 점잔 빼는 새신랑의 말투를 흉내 냈다. 누님은 부끄러워하다가 그만 빗을 떨어뜨려 내 이마를 때렸다. 나는 화가 나서 울음을 터트리고 분가루에 먹을 뒤섞고 거울에 침을 뱉어 문질러댔다. 그러자 누님은 옥으로 만든 오리와 금으로 만든 벌 노리개를 꺼내주면서 울음을 그치라고 나를 달랬다. 지금으로부터 28년 전 일이다.
강가에 말을 세우고 저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銘旌)은 바람에 펄럭이고 돛대는 비스듬히 미끄러지는데, 강굽이에 이르러 나무에 돌고 난 뒤에는 모습을 감추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때 강가에 멀리 나앉은 산은 시집가던 날 누님의 쪽진 머리처럼 검푸르고, 강물 빛은 그날의 거울처럼 보이며,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처럼 보였다. 빗을 떨어뜨리던 그날의 일을 눈물 속에서 생각하니 유독 어릴 적 일만이 또렷또렷하게 떠오른다. 그때는 또 그렇게도 즐거운 일이 많았고, 세월도 길게만 느껴졌다.
그사이에는 늘 이별과 환난에 시달려야 했고, 빈궁과 시름겨워 했다. 그런 일들이 꿈속인 양 황홀하게 스쳐 지나간다. 형제로 지낸 날들은 어찌도 그렇게 짧았단 말인가?

시인인 기하 유연(柳璉, 1741~1788년)의 시집에 붙인 서문으로 글에는 여러 종류의 비유가 등장한다. 비유는 모두 ‘사물과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관점의 문제와 연결된다. 남들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전범이나 유행과 무관하게 자기 개성을 지닌 세계를 자긍심을 가지고 구현해 가는 시인의 길을 말똥을 굴리는 말똥구리에 비유하고 있다(위).
연암이 큰누님을 잃고 쓴 제문이다. 연암이 쓴 서정적 산문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배를 떠나보내고서 홀연히 과거로 시선을 돌려 큰누님이 시집가던 날을 회상하며 둘 사이에 큰 이별이 두 번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덕무가 “정겨운 사연이 눈에 완연히 드러나 하마터면 눈물방울이 싸라기눈처럼 쏟아지게 만들 뻔했다”고 평가했다(아래).

안대회 교수는…
<조선의 명문장가들>,
<벽광나치오>, <선비답게 산다는 것>, <정조의 비밀편지>, <담바고 문화사> 등을 쓰며 옛글을 고증, 해석하는 데 앞장서 왔다. 특히 18세기 산문 문학을 발굴해 알리는 데 공을 들였다. 현재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