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컬라이제이션의
맹아를 보다

지도는 곧 그 시대의 세계관이다. 18세기의 지도는 세계 속 조선의 지형을 들여다보는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성리학과 중화주의가 뼛속 깊이 박혀 있는 조선의 인식 체계 가운데 지리적 이해를 바탕으로 조선 밖 세상을 이해하려 애쓰는 과정이었다.
오상학 제주대 지리교육과 교수

1402년 조선은 몽골제국이 구축한 정보 네트워크를 통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라는 위대한 세계지도를 만들었다. 극동의 작은 나라 조선이 제작한 세계지도에 그리스, 로마, 이슬람 세계의 지리 지식이 담겨 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통일신라, 고려 이후 세계 정보의 네트워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노력의 결과였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조선은 주자성리학이 사회 운영의 원리로 정착되면서 지식 정보의 네트워크는 축소됐다. 대중화인 중국과 소중화인 조선, 그리고 일부 조공국으로 구성되는 세계만이 의미가 있을 뿐이었다.
17세기 주변국과의 전쟁을 치른 조선은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세계 정보의 네트워크에 참여하게 됐다. 중국 사신을 통해 서양의 지리 지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당시 기독교의 전파를 위해 중국에 온 서양 선교사들은 정교한 세계지도를 선교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했다.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 알레니의 ‘만국전도’, 페르비스트의 ‘곤여전도’ 등은 지리상의 발견 시대 이후 서양 지리 지식이 반영된 최신의 세계지도였다. 이들 지도는 중화적 세계관에 머물러 있던 중국 지식인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은 중국 사신을 통해 최신의 서구식 세계지도를 접하게 됐다. 조선 사신들은 17세기 초반부터 이들 지도들을 구입해 조선에 들여왔다.
1708년 조선은 영의정 최석정의 주관 아래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를 새롭게 제작했다. 여기에는 이전 지도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동물들의 그림이 수록돼 있다. 지도 제작을 주도한 최석정은 “‘곤여만국전도’가 보여주는 세계는 전통적인 세계관과 매우 달라 황당한 측면이 있지만 그 자체로 존재 이유가 있을 것이므로 마땅히 이로써 견문을 넓혀야 한다”고 역설했다. ‘곤여만국전도’ 이외에도 알레니의 <직방외기>에 수록된 ‘만국전도’, 페르비스트의 ‘곤여전도’ 등이 조선에서 다시 제작되면서 지식인 사회에 영향을 미치게 됐다.
서구식 세계지도는 처음에 한양과 근기 지역의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전파됐으나 18세기에는 지방에서도 일부 학자들이 서구식 세계지도를 접하는 사례가 나타났다. 당시 지식인들에게 서구식 세계지도는 단순히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물
(異物)을 넘어 하나의 탐구 대상이 되기도 했다. 서구식 세계지도가 보여주는 세계는 기존의 중화적 세계관에 기초한 지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돼 있다.
일부의 실학자들은 서구식 세계지도를 통해 세계인식을 확장시켜 갔지만,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세계관에 입각해 서구식 세계지도를 해석하려 했다. 당시까지 그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세계는 중국과 그 주변 지역에 불과했다. 아프리카, 신대륙, 오세아니아 등은 그들의 전통적 세계관에서는 포섭될 수 없는 지역이었다. 그런 지역은 가볼 수도 없고 실체를 확인할 수 도 없는 미지의 세계였다. 이러한 미지의 세계를 조선의 유학자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받아들여 이해하려 했는데, 중국 고대의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 나오는 괴상하고 황당한 나라들로 이들 지역을 대치시켰던 것이다. <산해경>에 나오는, 눈이 하나 달린 사람들이 사는 일목국(一目國), 몸뚱이가 셋인 사람들이 사는 삼신국(三身國) 등과 같은 기괴한 나라들로 그들 나름의 세계지도를 다시 그린 것이 ‘원형의 천하도’라 할 수 있다.
‘원형의 천하도’는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의 모습으로 돼 있고 중심에서부터 내대륙, 내해, 외대륙, 외해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내대륙에는 중국과 그 주변 국가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당시 실제로 존재하고 있던 나라들이다. 중앙에는 천지의 중심인 곤륜산이 자리 잡고 있다. 내해와 외대륙에는 <산해경>에 나오는 가상의 나라들이 표기돼 있다. 가장 외곽에는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곳에 각각 부상(扶桑)과 반격송(盤格松)이 그려져 있고, 내해의 일본국 밑에는 봉래(蓬萊), 영주(瀛洲), 방장(方丈) 등의 삼신산이 그려져 도교적 성격도 담겨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세계지도의 제작을 통해 넓은 미지의 세계로 인식을 확장시켜 나가면서 한편으로는 국토에 대한 자각을 통해 새로운 조선전도를 만들어냈다. 두 차례의 전란을 겪고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중원을 장악하게 되자 조선은 자신의 강역을 새롭게 인식하고 탐구하면서 이를 지도로 표현하고자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농포자 정상기의 ‘동국지도’다. 정상기는 이전까지 축적된 다양한 자료를 활용하고 독창적인 백리척(百里尺)을 고안해 국토의 모습을 실제와 가깝게 그려냈다.
1757년 조정에 알려지게 된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이후 관청에서 적극 활용하게 되는데, 이는 정상기의 지도가 행정·군사적 용도로는 최적의 요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사례가 1770년 신경준의 ‘동국여지도’ 제작 사업이다. 그는 영조의 명을 받아 ‘동국문헌비고’와 짝할 수 있는 지도를 만들었는데, 이때 기본도로 사용된 것이 정상기의 ‘동국지도’였다.
민간에서도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지도 제작에 이용됐다. 특히 해주 정씨 가문의 정철조, 정후조 형제는 정상기의 지도를 바탕으로 수정, 편집해 더 뛰어난 해주본을 제작하기도 했다. 또한 이후에 제작되는 많은 전도들은 정상기의 대전도를 바탕으로 축소한 것들인데, 도리도표에 수록된 전도, 19세기 전반에 제작된 목판본 ‘해좌전도’ 등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그의 후손과 다른 지도 제작자들에 의해 수정, 보완되면서 조선 후기 지도사의 큰 흐름으로 자리 잡게 됐다. 1834년 제작된 김정호의 ‘청구도’도 바로 정상기의 ‘동국지도’를 바탕으로 수정, 보완됐던 전도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지도학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1861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그의 ‘청구도’를 바탕으로 보완, 발전시킨 것인데 이 역시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정상기의 ‘동국지도’로 이어지게 된다.
18세기의 조선은 중국을 통해 세계적 지식 정보의 네트워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세계 인식을 확대시켜 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국의 국토에 대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정교한 조선 전도를 만들어냈다. 세계지도를 통해 세계화의 흐름을 파악하고 조선 전도를 통해 지역화의 실체를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18세기 조선의 지도는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의 맹아를 보여주고 있다.

고지도로 보는 ‘대동여지도’와 독도
‘대동여지도’ 제작의 미스터리

최근 개봉한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에는 김정호가 전국을 답사한 것을 바탕으로 지도를 제작한 것으로 그려진다. 백두산을 수차례 오르고 10년간에 걸쳐 전국을 답사하며 실제 측량한 자료를 기초로 ‘대동여지도’를 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지도 제작의 방식으로 전 국토를 측량해 우리나라의 전도를 그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삼각측량과 같은 근대적 측량 방식이 없던 우리나라에서 목측(目測)이나 보측(步測)에 의한 측량으로 전도를 제작하기는 쉽지 않다. 김정호는 이러한 어려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김정호의 천재성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김정호는 당시까지 축적된 조선지도학의 성과들을 흡수하고 이를 종합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하게 된다. 1861년 ‘대동여지도’의 제작 이전에 1834년 ‘청구도’라는 지도책을 만들었다. 또한 우리의 국토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대동지지>, <동여도지>, <여도비지>와 같은 방대한 지리서를 저술하기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지도 판목은 군사기밀 누설죄로 대원군에 의해 감옥에 갇히고 ‘대동여지도’ 판목이 불태워졌다는 이야기가 더 이상 역사적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희미한 호롱불 밑에서 부단히 책을 읽고, 쓰며 한편으로는 ‘대동여지도’를 판각하면서 보낸 인고의 세월! 괴나리봇짐을 등에 지고 백두산을 오르내리면서 조국 산천을 응시하던 각색된 영웅 김정호의 모습과는 분명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김정호의 위대함이 반감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속에는 우리의 산천과 강토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그려내어 후손들에게 물려주려 했던 인간 김정호의 열정과 고뇌가 스며 있는 것이다.
키워드로 보는 18세기 인문학_18세기의 지도
고지도에 그려진 독도
독도는 지리적, 역사적, 국제법적으로 한국의 영토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지도에는 독도가 어떻게 표현돼 있을까? 우리의 영토이기 때문에 울릉도의 동남쪽에 독도가 당연히 그려져 있을 거라고 추측하기 쉽다. 그러나 전통적인 고지도에는 현대의 측량 지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 고지도에 그려진 독도는 ‘우산도(于山島)’라는 이름으로 표기돼 있다. 독도라는 명칭은 1906년에야 공식 기록에 나타난다. 조선 전기의 지도에는 우산도가 울릉도의 서쪽에 그려진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우산도가 독도가 아닌 가상의 섬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지도는 경위도에 기반을 둔 측량 지도가 아니다. 당시 동해에 울릉도 이외에 독도라는 섬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정확한 위치와 방향, 면적 등을 모른 상태에서 그리다 보니 울릉도의 서쪽에 그려진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우산도는 울릉도의 동쪽에 제대로 그려진다. 안용복 사건 이후 울릉도와 우산도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안용복의 증언에 따라 우산도가 울릉도의 동쪽에 있음을 인지하게 됐기 때문이다. 정상기의 ‘동국지도’에는 처음으로 우산도가 울릉도 동쪽에 그려지게 됐는데, 이후에 제작되는 대부분의 전도에는 우산도가 울릉도 동쪽에 그려졌다.
키워드로 보는 18세기 인문학_18세기의 지도
키워드로 보는 18세기 인문학_18세기의 지도
사진 설명
1. 회입 ‘곤여만국전도’(1708년, 서울대 박물관 소장) 마테로 리치의 ‘곤여만국전도’를 따라 그린 지도. 영의정과 중앙 정부 지휘 아래 세계지도를 만들었으며, 모사된 지도 안에 최석정의 글이 수록돼 있다.
2. ‘원형의 천하도’(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세계 지리 지식이 들어온 후 조선식으로 재해석해 독창적으로 그린 세계.
3. 정상기의 ‘동국지도’(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극동의 작은 나라, 조선에서 자부심을 갖고 정교한 조선 지도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 국토의 실제 모습을 그려낸 최초의 지도.
의주에서 연경까지 사신들이 오고 가던 길. 조선은 청나라 연경을 통해 세계 인식을 확장해 가는 한편 세계 속 조선의 실제 모습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4.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목판(1861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지도 판목은 ‘대동여지도’ 판목이 불태워졌다는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오상학 교수는…
역사지리학 및 고지도학을 깊이있게 연구해 왔으며
<한국전통지리학사> <천하도-조선의 코스모그라피>, <조선시대 세계지도와 세계인식>, <옛 삶터의 모습, 고지도> 등의 저서가 있다. 서울대 규장각 특별연구원,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제주대 지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