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정민영 아트북스 대표] 편지는 작가의 내면으로 난 창이다. 빈센트 반 고흐가 남긴 수많은 편지들이 그렇고, 절절한 가족애가 담긴 이중섭의 그림엽서, 딸에게 보낸 김종학의 편지 등이 그렇다. 작가는 조형언어로 말하지만, 편지는 가슴으로 말한다. 작가의 체취와 예술 세계를 접하기에 편지만 한 것이 없다.

비평이 작가의 예술적 성취에 대한 평가라면, 편지는 작가 마음의 적나라한 표현이다. 비평이 공개적인 글이라면 편지는 개인적인 글이다. 비평이 객관적이라면 편지는 주관적이다. 우리는 편지를 통해 비평문에서는 알 수 없는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와 창작의 비밀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

박수근의 꿈이 담긴 연애편지
박수근, 절구질하는 여인
박수근, 절구질하는 여인
미석 박수근(1914~1965년) 작품의 중심에는 여성이 있다. 그 여성들은 궁핍한 시대를 산 우리나라 여성의 초상으로 평가되곤 한다. 상식적으로 남자는 바깥일을 하고, 여자는 집안일을 한다고 여기지만 박수근의 그림에서 바깥에서 일을 하는 주인공은 여성들이다. 머리에 짐을 이거나 거리에 앉아서 행상을 하거나 나물을 캐고 빨래를 한다. 집 안팎의 노동에 열심인 여성상에는 모델이 있다. 박수근이 연애시절 보낸 편지는 그 단서가 된다.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돼주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청혼한 박수근은 1940년 2월 김복순(1922~1979년)과 결혼한다. 박수근이 가진 것이라고는 ‘붓과 팔레트’뿐이었다. ‘물질적인 고생’을 피할 순 없었다. 박수근은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리거나 외국인들에게 그림을 팔아서 근근이 생계를 이었다. 부인은 자식을 키우며 일을 해서 살림을 꾸렸고, 남편을 뒷바라지했다.

박수근의 아내에 대한 지극한 애정은 작품에서 확인된다. <절구질하는 여인>, <맷돌질하는 여인>, <일하는 여인> 같은 몇몇 그림은 아내(와 자식)를 모델로 했다. 화강암 같은 마티에르로 조형된 인물의 형상은 점차 단순화되면서 보편적인 한국의 여성상으로 자리 잡아 갔다. 그것은 부인에 대한 ‘조형적인 오마주’였다. 편지의 이 구절은 앞으로 펼쳐질 삶을 압축한 미리 쓴 ‘부부 약전(略傳)’ 같다. 박수근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 덕분에 ‘훌륭한 화가’가 될 수 있었다.

김환기가 파리로 보낸 편지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글재주까지 타고난 수화 김환기(1913~1974년)는 생전에 상당수의 글을 남겼다. 비평과 에세이, 일기 외에 친구와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도 있다. 그중에는 파리로 유학 간 건축가 김중업(1922~1988년)에게 쓴 편지가 눈에 띈다. 1953년 5월 지면(誌面)을 통해 ‘파리에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것이다.

“중업 형, 나도 가볼까 은근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형이 부르는 소리를 듣자 그만 마음이 바빠지는구려. 들으니 뒤피(Dupy)도 세상을 떠났구려. 마티스(Matisse), 루오(Rouault), 피카소(Picasso), 브라크(Braque) 이 거장들이 떠나기 전에 파리에 나가야 할 터인데, 8·15 후인 오늘에도 역시 파리는 멀구려. 과거나 오늘이나 우리 예술가들의 최대의 불행은 바람을 쐬지 못한 것, 그럴 기회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오. 우리들 넓은 세계에 살면서도 완전히 지방인이외다. 한국의 화가일지는 몰라도 세계의 화가는 아니외다.”

부러운 마음이 역력하다. 막다른 골목에서 출구를 찾는 듯한 심경이 고스란히 표출돼 있다. 당시 세계 미술의 중심지는 유럽, 그중에서도 프랑스 파리였다. 파리는 화가들이 동경한 파라다이스였다.

국내 화단이 좁게만 느껴졌던 김환기는 이 편지를 발표한 지 3여 년 만인 1956년 마침내 파리에 입성한다. 그곳에서 많은 전시회를 접하며, 역시나 우리 것을 그려야 한다는 자각을 실천한다. 이 ‘파리시대(1956~1959년)’의 작품은 ‘시(詩) 정신’과 ‘노래’를 지향한 것으로, 소재는 문인 취향의 자연주의적인 것이었다. 산과 달, 매화, 사슴, 학 같은 자연의 형상들이 선과 색의 조화 속에 시적인 율동미를 연출한다.

이 공개적인 편지는 서정적 추상에 주력한 파리시대와 순수 추상으로 나아간 ‘뉴욕시대(1963~ 1974년)’를 예고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드넓은 예술 세계를 향한 수화의 열망과 심경을 확인할 수 있다. 1963년 뉴욕으로 무대를 옮긴 김환기는 오랫동안 천착한 추상미술의 결정체인, 숱한 단색 톤의 점으로 작업한 ‘점화(點畵)’ 시리즈를 완성한다. 이로써 김환기는 ‘한국의 화가’에서 ‘세계의 화가’로 우뚝 선다. 한국적 서정성과 서구의 모더니즘을 접목해 도달한 개성적인 조형 세계는 지금 국내외 경매에서 연신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의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남쪽나라’를 향한 이중섭의 편지
이중섭, 길 떠나는 가족
이중섭, 길 떠나는 가족
“야스카타에게
나의 야스카타, 잘 지내고 있겠지. 학교 친구들도 모두 잘 지내고 있니? 아빠도 잘 지내고 있고 전람회 준비를 하고 있어. 아빠가 오늘(엄마와 야스나리, 야스카타가 소달구지에 타고 아빠는 앞에서 소를 끌고 따뜻한 남쪽나라에 함께 가는 그림을 그렸어. 소 위에 있는 것은 구름이야.)
그럼 안녕. 아빠가.”

대향 이중섭(1916~1956년)이 가족에게 보낸 엽서의 내용이다. ‘야스카타’는 큰아들 태현의 일본 이름이고, ‘야스나리’는 둘째아들 ‘태성’의 일본 이름이다. 이때 이중섭은 서울 종로구 누상동에 머물고 있었다.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의 처가로 보내고, ‘기러기 아빠’가 돼 통영과 진주를 거쳐 대구에서 잠시 지내다가 1954년 6월 서울로 상경했다. 자기 때문에 일본에서 아내가 진 빚을 갚아야 한다는 절박감으로, 개인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듬해 1월 하반기에 가진 개인전은, 그러나 판매가 저조했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개선되지 않았다.

이 엽서 상단에는 <길 떠나는 가족>이 그려져 있다. 사내(이중섭)가 앞에서 고삐를 잡고, 여인(아내)과 두 아이가 소달구지에 앉아 있는 그림이다. 종이에 굵은 연필 선으로 소재를 그리고, 그 위에 유채물감을 묽게 칠했다. 이 엽서 그림은 유화로도 그렸다. 유화는 현재 2점이 남아 있다. 위의 내용은 <길 떠나는 가족>에 대한 이해의 단서를 제공한다. 따뜻한 남쪽나라를 향한 이중섭의 바람이 그것이다.

한 평론가의 말처럼 “단순히 나들이 가는 장면이라기보다는 행복이 넘치는 이상향을 향해 가는 설정”(오광수)이다. 이미 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왔고, 또 한반도의 최남단 서귀포에서 행복한 한때를 보낸 만큼 그에게 남쪽은 따뜻한 이상향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중섭은 끝내 가족과 함께 ‘따뜻한 남쪽나라’에 가지 못하고, 혼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김종학이 딸에게 보낸 편지
김종학, 여름 꽃 잔치
김종학, 여름 꽃 잔치
‘설악산의 화가’, ‘꽃의 화가‘로 통하는 김종학(1937년생)의 작품은 싱그럽다. 자유로운 전면 구도에 야생의 꽃들과 들풀, 지저귀는 새와 곤충, 냇물과 산야가 천진한 붓질과 원색에 힘입어 약동하는 생명력을 과시한다. 그는 작업에 투신한 외골수였지만 틈틈이 딸에게 편지를 쓴 다정다감한 아버지이기도 했다.

1986년부터 보낸 편지가 250통이 넘는다. 당시 뉴욕에 유학중이던 딸은 이들 편지를 모아 두었다가 훗날 <김종학의 편지>(2012년)라는 책으로 묶는다. 그 덕분에 우리는 아버지로서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와 작품 너머에 있는 “예술가의 고된 삶과 아픔, 인내와 외로움의 시간”(딸 김현주), 작품 이야기 등에 마음을 축일 수 있다.

“아빠가 꽃을 그리고, 나비를 그리고, 나무를 그리고, 냇가며 폭포 등을 그리는 것은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아니, 수천 년 동안 좋아하는 대상을 그리는 것에 그치는 게 아냐. 그런 대상을 그리며 타락한 화가로 여기는 20세기 회화에 반발하는 의미도 있단다.

무엇을 그릴까 무척 고민도 했었다. 추상에서 시작해서 다시 구상으로 돌아왔지만 추상에 기초를 둔 새로운 구상이지. …(중략)… 아빠가 그리는 꽃도 실은 사실적으로 피는 꽃이 아니라 화면 위에서 다시 구조적으로 피어나는 꽃이야. 아빠는 그림 그릴 때 항상 색을 어떻게 배치하고, 크고 작은 형태들을 서로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관심을 둔다.”

작업의 특징과 관심사를 드러낸 대목이다. 자연을 그리는 구상 작업이 추상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다는 점, 소재의 구조적인 조형, 색채의 배치와 형태의 배열에 대한 각별한 궁리 등은 괴발개발 그린 듯한 김종학의 작품을 더 눈여겨보게 한다. 이처럼 작가의 편지가 사생활을 넘어 작품 세계를 내비칠 때, 편지는 작품의 심연을 밝히는 한줄기 빛이 된다. 작품은 ‘작가의 마음’이지만 편지는 ‘작품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작가의 편지에 주목하는 이유다.

정민영 대표는
월간 미술세계 편집장과 단행본 스타일의 미술 교양지 계간 이모션 편집인을 지냈고, 현재 (주)아트북스 대표이사로 있다. 저서로는 <편집자를 위한 북디자인>, <정민영의 미술책 기획노트>, <일그러진 우리들의 영웅—한국 현대미술 자성록>(공저), <29개의 키워드로 읽는 한국 문화의 지형도>(공저) 등이 있다.

[big story] 편지의 인문학

- 편지, 사람과 시대를 잇다
- 작가의 편지를 보면 그림이 보인다!

- 사랑과 죽음 사이, 음악가의 편지
- 내 아들, 딸들에게 편지를 쓰다
- 편지의 저편에는 늘 나를 향한 누군가가 있다
- 나는 편지 쓴다, 고로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