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의 저편에는 늘 나를 향한 누군가가 있다
[한경 머니 = 김성신 출판평론가] 서간문은 위로의 언어이기도 하다. 편지란 나를 알고, 나를 향해 날아오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온전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장 연애편지부터 쓰기 시작해도 좋겠다.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편지가 있다. 중세 프랑스에서 신학자이자 철학자로 명성이 높았던 아벨라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1118년 성당의 참사회원인 퓔베르의 조카 엘로이즈의 가정교사가 된다. 당시 아벨라르는 39세였고, 엘로이즈는 영리하고 아름다운 17세 소녀였다. 둘은 스물두 살이라는 큰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아들을 낳은 후 비밀리에 결혼을 한다.

그러나 퓔베르가 이들의 결혼을 세상에 폭로하며, 이에 항의하는 엘로이즈를 학대한다. 아벨라르는 퓔베르로부터 엘로이즈를 피신시키기 위해 수도원으로 보낸다. 그러나 아벨라르가 엘로이즈를 수녀로 만들려 한다고 착각한 퓔베르는 가문에 대한 모욕이라고 여겨 복수를 결심하고는 사람을 시켜 아벨라르를 거세한다. 이후 아벨라르는 수도사가 됐고, 엘로이즈는 피신했던 수녀원에서 그대로 수녀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벨라르는 친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 편지를 보내는데, 이 편지를 우연히 엘로이즈가 읽게 된다. 이 편지에 엘로이즈가 답장을 보내면서, 이들 사이에 편지가 오가게 된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편지 12통

이들이 평생 얼마나 많은 서신을 주고받았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은 12통의 편지다. 편지 한 통 오고가기가 어려웠던 중세시대의 편지여서인지 그 분량이 방대하다. 단 12통의 편지만으로도 책 한 권 분량이다. 엘로이즈는 연인을 향한 절절한 마음을 담아 편지에 이렇게 쓰고 있다.

“하느님이 아시는 일이지만, 나는 당신의 한마디로 지옥의 불구덩이를 향해서라도 당신을 따라나섰을 것이며, 또 앞서기도 했을 것입니다!…(중략)…나의 마음은 당신 없이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부탁입니다. 내 마음이 당신과 함께 편안히 있게 해주세요!
…(중략)…
오! 만약 나에게 마음대로 이야기하는 일이 허용된다면 이렇게 울부짖고 싶습니다. ‘신이여, 당신은 나에게 모든 일에 잔인하십니다! 오, 무자비하신 자비의 신이여! 오, 불운을 주시는 행운의 신이여!’”

엘로이즈의 이런 가슴 아픈 편지를 읽고 난 후 아벨라르가 보낸 답장은 다음과 같다. 짐짓 중년의 철학자다운 어투로 달래듯 말하지만, 행간에서 느껴지는 절절함은 그 어떤 사랑의 절규보다 울림이 크다.

“당신은 우리가 하느님께 귀의하던 당시의 일을 하느님께 원망하고 있소. 그러나 당신은 하느님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찬미를 드려야 할 것이오.…
(중략)…그런 감정을 버려주오. 그러지 않고는 당신은 나를 즐겁게 해주지 못할 것이며, 나와 함께 영원한 천복을 누리는 자리에도 이르지 못할 것이오. 지옥에까지 나를 뒤따를 준비가 돼 있다고 고백한 당신인데, 그런 당신을 두고 내가 그곳에 홀로 갈 수 있겠소?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하느님께 가게 될 때 당신이 나로부터 분리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라도, 당신의 구원을 위한 경건을 지니시오.”


놀라운 것은 아벨라르와 엘로이즈가 사랑하는 연인으로서 함께 지냈던 시간은 채 1년도 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렇게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했고, 결국 죽어서 함께 묻힌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대표적 서간체 소설

서간문의 연원을 따져 올라가면 로마의 시인인 호라티우스와 오비디우스의 작품을 대표작으로 꼽는다. 이후 서구에서는 18세기 후반 낭만주의 작가들에 의해 서간문이 자주 활용된다. 새뮤얼 리처드슨의 <파멜라(Pamela)>(1740년), 장 자크 루소의 <신 엘로이즈>(1761년),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년),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히페리온(Hyperion)>(1797~1799년), 리카르다 후흐의 <최후의 여름>(1910년) 등이 대표적인 서간체 소설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서간체 작품이라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꼽을 수 있다. 괴테의 첫 성공작으로서, 이전까지 무명 작가였던 괴테를 일약 저명인사로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다음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중의 한 대목이다.

“사랑하는 친구여, 이것은 어쩐 일일까? 내가 나 자신을 겁내고 스스로에게 놀라다니! 그녀에 대한 나의 사랑은 어디까지나 거룩하고 순수하고 남매간 같은 우애, 사랑이 아니던가? 이제까지 단 한번이라도 마음속으로 죄스러운 소원이나 엉큼한 욕망을 가진 적이 있었던가? 물론 맹세할 수는 없다. 그런데 꿈을 꾼 것이다. 아아, 이처럼 모순되는 갖가지 작용, 불가사의한 간밤이었다. 입 밖에 내는 것조차 몸이 떨린다.”

당시 유럽의 많은 젊은이들은 소설 속 베르테르처럼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주인공 베르테르를 모방해 자살한 사람이 2000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유명인이나 자신이 모델로 삼고 있던 사람 등이 자살할 경우, 그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해서 자살을 시도하는 현상을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라고도 한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한문 서간으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동문선>에 수록된 신라의 녹진의 <상각간김충공서(上角干金忠恭書)> 1편과 최치원이 쓴 <답절서주사공서(答浙西周司空書)> 등을 포함한 32편이다. 근대 서간체 소설의 우리나라 최초 작품은 이광수의 <어린 벗에게>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간 문학이라고 하면 우리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아마도 유치환의 시 <행복>일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숫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봇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하략)
편지의 저편에는 늘 나를 향한 누군가가 있다
유부남이었던 유치환과 젊은 미망인이었던 이영도는 자신들의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을 기워내 이렇게 아름다운 시편으로 남겼다. 비록 남의 연애편지지만 읽는 동안 가슴은 뜨겁게 급속 충전이 된다.

최근 문어체와 구어체의 헤게모니 투쟁에서 구어체가 확실하게 승기를 잡아 가고 있는 양상이다. 이 오래된 저울의 균형이 급격히 기울어진 데에는 소셜미디어의 영향이 지대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인은 소셜미디어에 날마다 엄청난 분량의 언어를 직접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게 ‘글’이 아니라 ‘말’에 가깝다는 것이다.

소셜미디어에 써 넣고 있는 글의 양을 계량해보면 연간 한 사람이 책 몇 권의 분량을 집필하는 셈이라는 통계도 있다. 이렇게 말처럼 활용되는 글들은, 기록되지만 거의 편집되지 않으며, 대개 말처럼 공중에서 휘발된다. 구어체 문장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서간문이라는 문장 형식으로 이어진다. 서간문은 누군가에게 쓴 편지 형식의 문장이다. ‘발신인’과 ‘수신인’, 그리고 ‘용건’이라는 이 세 가지 구성 요건을 가지고 있으며, ‘말하기 대신에 쓰는 글’을 뜻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소셜미디어에 쓰는 문체는 대부분 서간문의 이 핵심 요건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그러고 보면 지금 우리는 모두 하루 온종일 엄청난 양의 편지를 써서 누군가에게 보내고 있는 셈이다.

사실 서간문은 위로의 언어이기도 하다. 그래서 편지라는 형식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조건반사적으로 사람의 온기를 느끼게 된다. 그것이 오래전 어느 연인 간에 서로 주고받았던 편지든, 편지의 형식을 빌린 소설 작품이든 별로 상관이 없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편지의 저편에는 늘 나를 향한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

김성신 출판평론가는…
<북톡카톡>, <일등인생을 만든 삼류들> 등을 썼고, 칼럼과 방송, 강연 등을 통해 독자들이 책을 더욱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다. 현재 광운대 국문학과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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