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시사철 한국의 들꽃으로 건강과 생명을 빚다

[한경 머니=이현주 기자] 안홍선 스토리퀼트 작가는 정원 디자인에서 고수의 영역이라는 초원풍 야생화 정원을, 시간의 힘을 지렛대 삼아 홀로 일궈낸 ‘들꽃 정원’의 대모라 할 수 있다.
그가 꽃을 통해 얻은 위로는 건강과 생명의 삶이었다.
수선화를 매만지는 안홍선 작가.
수선화를 매만지는 안홍선 작가.
땅과 흙, 나무와 꽃, 닭과 새가 있는 평화로운 정원을 꿈꾼 안홍선 스토리퀼트 작가는 20년 전 서울 연희동 집을 떠나 경기도 오산시의 한적한 터에 자리를 잡았다. 헐벗은 땅에 모종을 심고, 잡초를 뽑고 거름을 주자 들꽃들이 야트막하게 무리를 짓기 시작했다. 무릎 높이의 묘목들은 90여 종의 커다란 나무들이 돼 있었다. 유럽의 주택 정원 못지않은 한국의 들꽃 정원을 만든 이야기다.
정원 전문가들이 한국의 야생화 정원으로 손에 꼽는 안 작가의 정원은 경기도 오산시 서랑로의 서랑 호숫가에 자리하고 있다. 들어가는 길부터 약 9917㎡ 대지의 대부분은 꽃과 나무의 자리였다. 자연스러움을 살린 정원에는 뛰노는 닭들이 크기가 거위만 했고 안 작가가 손수 하나하나 놓은 돌계단, 이야기가 싹트는 야외 식탁, 봄날의 푸른 풀과 노란 수선화의 조화가 목가적인 풍경을 만들어 낸다. 정원의 봄꽃이 만개하기 직전인 4월의 중순 어느 날이었다.
즉석에서 딴 꽃차를 내어 준 안 작가에게 정원을 가꾸는 재미에 대해 물었다. “아침에 새벽안개가 걷히기 전 잠옷에 가운을 걸치고 한 바퀴 둘러보러 나가요. 애들을 한 번만 보고 들어와야지 하고 나가 보면 있으면 안 되는 애들이 있어 뽑아 줘야 해요. 무슨 옷을 입었는지 갈아입을 시간이 아까워 그대로 일을 하다 보면 점심 먹으라는 소리가 들려요. 밤에도 꽃이 잡히는지 풀이 잡히는지 손의 감각에 의존해 일할 정도로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았어요.”

정원은 사람에게 기운과 생명을 준다
안 작가는 정원과 퀼트(손바느질로 만든 작품) 두 가지 일에 반평생을 바쳐 왔다. 그의 퀼트는 주로 정원의 꽃과 나무, 닭, 그 안에 둥지를 튼 가족 등을 모티브 삼아 생의 기쁨과 신비를 담은 스토리가 있는 퀼트(스토리퀼드)다. 동화 쓰고 정원 가꾸는 할머니, 타샤 튜더(Tasha Tudor)가 영국에 있었다면 한국에는 퀼트 하고 정원 가꾸는 안 작가가 있다.
안 작가의 정원은 꽃의 흐름이 끊이지 않으면서 매달 새로운 풍경을 연출하는, 초원풍이라는 점이 독특하다. 인공적으로 깎아 만든 단정한 정원이 아닌, 계절에 맞는 자생화가 한데 어우러져 피어난다. 자연스러운 멋이 느껴진다.
그는 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나물꽃이며 온갖 들꽃이 절로 피어 흐드러진 어린 시절의 고향집 뒤뜰이었다. 그 기억 속의 거친 들판 같은 정원을 갖고 싶었다고 한다. “일곱 살 무렵의 기억이 평생을 가요. 그때 그 생활을 하지 않았더라면 꽃과 관계없는 사람이 됐을 거예요. 우리 아버지는 언제나 정원을 놓지 않으실 정도로 정원을 좋아하셨어요. 한번은 노란 달리아 꽃을 가리키시면서,
‘저게 활짝 필 때 널 결혼시키고 싶었다’고 하셨어요. 그런 멋을 닮고 싶었어요.”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재현한 초원풍 야생화 정원은, 매달 새로운 꽃을 피우며 다채로운 색을 보여 준다. 모란이 4월 말 피고 지면, 5월의 하얀 마가렛으로 완전히 뒤덮이고, 또 마가렛과 붉은 양귀비가 질 때 즈음 접시꽃이 정원을 쫙 늘어놓는다. “이게 다 하얗게 피어 봐요. 장관이죠. 마가렛이 필 때는 마가렛 좋아하는 친구들이 놀러 오는데 그럼 내가 수집해 놓은 원피스를 다 입혀서 춤을 추기도 해요.”
이곳 가을의 정원은 취나물 계통의 들꽃들이 피어올라 은은한 꽃구름을 이룬다. 계절이 갈수록 꽃들의 키가 커져 5~6월에 바짝 잘라 줘도 가을이 되면 사람 키를 넘을 만큼 자라난다. 봄은 한 계절을 살아 키가 작고, 여름은 두 계절, 가을은 세 계절을 살아서 더 큰 것이라고 한다.
안홍선 스토리퀼트 작가의 ‘야생화 정원’을 가다
야생화들은 대개 민들레, 달맞이꽃같이 꽃이 지었다가 봄이 되면 다시 피어나는 숙근초(宿根草)다. 식물 스스로 피는 계절을 알아 때가 되면 꽃이 피었다가 진다. “이것과 저것을 같이 심어요. 그러면 자기 계절에 맞게 올라와서 항상 같은 자리에 꽃이 있는 거예요.” 특히 꽃이 끊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만드는 것은 그가 시간의 힘을 지렛대 삼아 스스로 터득한 노하우다.
“허전한 자리가 생기면 새로운 꽃으로 보충해 주긴 하지만, 풀만 뽑아 주고 기다리기만 하면 돼요. 새벽에 일어나서 아침 닭이 울기도 전에 나가는 게 오늘은 어떻게 됐을까 기다려지거든요. 그러다 안 나타나면 실망해서 들어오고, 또 새로운 꽃이 나오면 매일 쑥쑥 크는 게 기쁘고, 그런 재미예요. 정원 가꾸는 일은 90%의 노력에 10%의 기쁨이 있는 일이라고 하는데, 정말 맞는 말 같아요. 풀과의 전쟁이에요. 그런데 그 10%가 90%를 덮어 주는 건 대단한 것 아니겠어요.”
여기에 무질서한 듯하면서 평온이 느껴지는 정원을 만드는 안 작가만의 노하우가 있다. 그해 갖고 싶은 꽃이 있을 땐 숙군초 옆에 과꽃과 같은 일년생 식물들을 빈자리에 심는 것이다. 물론 숙군초들도 거름의 상태 등에 따라 수명이 다하기도 한다.
처음 꽃을 심을 때도 자연스럽게 심어야 한다. 서너 군데 듬성듬성 심어 놓는 게 핵심이라고 한다.
“여유를 가져야 초원풍이 나와요. 처음부터 많이 사다가 심어 놓으면 거기서 바글바글 하다 오래 살 수 없으니까, 새끼를 쳐서 여기 뿌리고 저기 뿌리고 서로 어우러지게 하는 거예요.”
수선화를 예로 들면, 수선화 한 판(12개)을 먼저 두세 그룹으로 나눠 심는다. 몇 년 후 수선화는 그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새끼를 친다. 그럼 또 서로 엉겨 붙지 않게 한 그루를 파서 옮겨 심고, 이웃을 만들어 준다. 이 단계가 지나면 스스로 알아서 새끼를 치며 서로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고 한다.
“수선화도 얼마나 많이 번식시켰는지 몰라요. 그게 귀여운 거예요. 마치 새끼를 놓는 것처럼. 그런 애틋함이 있죠.”
정원은 토양이며 식물이며 환경이 무르익을수록 그 속에서 세련된 아름다움을 빚어낸다고. 안 작가는 “급히 서둘러서 좋을 일은 없다”며 “여유를 가지고 꽃을 가꾸면 이렇게 자기 멋대로 핀 것 같지만 서로 어울리고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또한 색의 조화를 위해서는 되도록 옅은 색끼리 한데 모으고 그 속에서도 조금씩 차이를 두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드는 비결이라고 귀띔했다. 그렇게 색을 써서 꽃대궐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보라색 튤립 한 판과 강원도에서 온 자줏빛 동강 할미꽃을 새롭게 심어 봤다. “다른 사람한테 밭을 못 맡기는 게 엉뚱하게 뭘 뽑아낼지 몰라서예요. 지금은 초록빛밖에 없잖아요. 달마다 다른 빛을 내는 정원이 되라며 집중적으로 갖다 심는 게 있는데, 때로는 접시꽃 길을 만들고 물레꽃 길을 만들어요. 식물은 내가 하자는 대로 다 해요.”
‘착한 식물’이기에, 치유의 힘도 있다고 안 작가는 믿고 있다. “광물과 동물과 식물 세 가지가 지구상의 먹이사슬 관계인데 사람에게 기를 주고 해를 끼치지 않는 게 식물이에요. 사람은 식물에게 이기지만 광물에겐 져요. 한여름이라도 돌베개를 하고 누워 자면 입이 다 비뚤어지죠. 그런데 광물은 식물한테 꼼짝 못해요. 식물이 돌에 붙었다 하면 다 부식시키죠. 이 묘한 먹이사슬에서 사람에게 가장 만만하고 또 영양을 주는 게 식물이잖아요. 또 얼마나 아름다워요. 색깔의 흐름을 봐요. 딱 봐서 아름답다고 느껴지면 생명이 있는 거예요.”
때로 정원에서는 자연의 신비를 느낄 만한 일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심지도 않은 자귀나무는 어디선가 날아와 집 안의 좋은 기운을 가져다줬다고 한다. “자귀나무는 낮이 되면 활짝 퍼지고 해가 지면 잎이 이렇게 모여서, 집 안에 심으면 부부애가 참 좋다고 해요. 밤에는 붙어서 자고 낮에는 각자 일하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죠. 우리 집은 어디선가 와서 지금 몇 그루가 돼요.”
다정하고 포근한 그의 정원을 닮아서인지 안 작가의 언어도 다정하고 포근하게 느껴진다. “우리 정원의 한 가지 특징이 있어요. 이만한 정원 가지면 온실 안 가진 사람이 없는데 나는 온실을 안 가져요. 인간한테 붙잡혀서 자기 계절도 아닐 때 자랑해야 하는 모습이 안쓰러워요. 정원에 대해 학문적으로 공부하진 않았어도,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건 삶의 지혜예요.”
안 작가는 수십 년간 정원 일을 멈추지 않고 매년 다른 빛깔의 정원으로 재탄생시킬 수 있는 원동력을 식물이 주는 기운과 생명으로 꼽았다.
“작은 묘목들이 10년, 20년 지난 후에 보니 나무가 크잖아요. 밤에 가로등 사이로 보면 나무들이 하늘을 찌르는 거예요. ‘내가 이런 나무 속에서 살고 있고나’, ‘나는 어째서 이렇게 부자일까’ 하고 행복한 거예요. 봄에는 온 정원이 나물 천국이에요. 거의 먹는 나물이라서 순이 많이 올라오거든요. 야채 시장이라고 부르는데, 달래도 이만큼씩 나와요. 민들레와 취나물을 무치고, 닭이 알을 놓으면 하나 탁 깨트려서 살짝 익혀 넣고, 달래장을 집어 넣어서 먹으면 너무 맛있어요. 그러니까 부자죠. 돈으로 살 수 없는 큰 부자가 됐습니다.”
안 작가가 직접 하나하나 놓아 만든 돌길.
안 작가가 직접 하나하나 놓아 만든 돌길.
안홍선 작가의 야생화 정원은 매달 다른 꽃을 피우는게 특징이다. 자연스럽게 꽃의 흐름이 연결되며 자연스러운 멋을 낸다.
안홍선 작가의 야생화 정원은 매달 다른 꽃을 피우는게 특징이다. 자연스럽게 꽃의 흐름이 연결되며 자연스러운 멋을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