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story 제 152호 (2018년 01월)

[big story] 2018 행복 키워드로 주목받는 ‘워라밸’

워라밸(work & life balance)이 2018년 무술년(戊戌年)을 관통할 핵심 트렌드로 주목받고 있다. 초(超)불확실성의 시대, 갈수록 심화되는 저성장 기조와 함께 지금 당장의 ‘행복’을 우선시하는 현재 지향적 가치관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과거의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보다 ‘나’ 자신의 만족을 중시하는 초개인주의화도 급속히 진행 중이다. 많은 이들이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도 ‘힐링’을 포기할 수 없는 가치로 여기고 있으며, 공동체를 위한 희생을 더 이상 미덕으로만 여기지 않는다. 이런 사회·구조적 변화 속에 정부와 기업들도 저출산·고령화의 타개책으로 워라밸을 주목하고 있다. 2018년, 대한민국 워라밸의 현주소와 방향성에 대한 적극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한경 머니=공인호 기자] “우리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산업화를 위해 헌신했고 범국민적 항쟁이라는 말에 걸맞게 민주화를 위해서도 최선을 다했다. 가장 길게 일하는 나라라는 오명을 들어가면서도 일하고 또 일했다. 외환위기 때는 금도 모았고, 악정에 맞서 촛불도 들었고, 더 이상 비정규직이 희생되지 않는 사회를 위해 희망버스도 탔다. 그럼에도 우리들의 삶이 여전히 고단하고 희망을 찾기 어려운 형편이라면 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것이다.”

2012년 출간된 <저녁이 있는 삶>의 일부다. 과거 유력 대선 후보였던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는 ‘저녁이 있는 삶’을 대선 공약의 전면에 내세워 눈길을 끈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쓴 책 <저녁이 있는 삶>에서 이스털린의 역설(Easterlin’s paradox)을 인용해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소득 수준을 갖게 된 이후에는 경제가 성장해도 사람들의 행복감은 늘지 않는다”고 소개했다.

한 나라의 경제 규모가 일정 궤도에 오르면 정부의 정책 목표가 ‘성장’ 자체에만 맞춰져서는 안 되며, 성장을 위해 개인 삶을 희생시키는 것 역시 더 이상 관용될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그로부터 6년이 흐른 2018년, 과연 대한민국 국민들은 ‘저녁이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희망보다 ‘만족’…현재 지향적 문화 확산
‘워라밸(work & life balance)’이 2018년 무술년(戊戌年) 대한민국 경제·사회의 구조적 변화를 관통할 핵심 트렌드로 급부상하고 있다. 다만 대한민국의 워라밸 열풍은 단순히 ‘일과 삶의 균형’ 정도로만 해석하기에는 입체감이 부족해 보인다. 궁극적 목표가 구성원 모두의 ‘행복’이라는 측면에서 과거 손 전 대표가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던 ‘저녁이 있는 삶’이 의미상 맥락에 더 가까워 보인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비정규직 문제 해결 및 근무시간 단축 등을 위한 노력도 부의 양극화를 완화하고 경제 성장의 과실을 저변으로 확산시키기 위함이다. 사실 워라밸은 지난 1970년대 말 영국에서 처음 사용된 용어다.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된 서양에서는 정부의 인구정책과 기업의 경쟁력 확보 차원에서 활용됐었다. 서양에서 무려 50년 가까이 사용돼 온 용어가 대한민국에서는 제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되고 있는 최근에서야 회자되고 있는 셈이다.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워라밸은 좀 더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국내 경제는 최근 수년간 3% 안팎의 저성장 기조가 고착되면서 이 같은 양적 성장의 둔화는 가치관의 질적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 ‘오늘의 희생이 미래의 희망을 담보해줄 것’이라는 전통적 가치관이 급격히 붕괴되고 있으며, 갈수록 심각성을 더하는 부의 양극화는 거스르기 힘든 사회 병리적 현상이 된 지 오래다.

온라인상에서는 소위 ‘금수저’, ‘은수저’ 논란을 넘어 ‘헬조선’이라는 말이 일상처럼 사용되고 있다. 결국 이 같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즉각적인 행복에 대한 열망을 증폭시켰고, 일과 삶의 균형을 통해 현재의 즐거움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2017년 대한민국의 소비문화를 이끈 ‘욜로(You Only Live Once, YOLO) 열풍 역시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 태동했으며,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도 워라밸을 전제로 한 소비 트렌드로 해석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욜로 열풍을 현재 지향적이고 충동적 소비를 부추기는 불안정한 행태로 해석하는 시각도 여전하지만, 평생을 모아도 집 한 채 장만하기 어려운 무한경쟁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불안한 미래로부터 일말의 탈출구가 되고 있다. 여기에 1인 가구 증가에 따른 가족 간 연대 약화와 스마트폰 등장 이후 심화되는 개인 지향적 가치관도 워라밸 트렌드를 가속화하는 핵심 동인으로 작용했다. 평생직장의 개념이 점차 사라지고 과거 직장 중심의 공동체 의식이 크게 퇴색되면서 단자화, 즉 초개인주의화가 급속히 진행된 것이다.

이 같은 일련의 사회·구조적 변화는 미래 지향적 소비보다 지금 당장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현재 지향적 문화를 확산시켰고, 대한민국의 많은 이들이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도 안식과 힐링을 포기할 수 없는 삶의 가치로 느끼고 있다. 정부 입장에서도 과도한 경쟁과 소진성에서 벗어나 많은 국민들이 일상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건강한 힐링 문화를 확산시키는 일이 중요한 역할로 부상하고 있다.

◆‘삶의 질’ 양극화…워라밸의 높은 벽
반복되는 야근과 주말 근무에 지쳐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장기간 나 홀로 무전여행을 떠난 A씨. 남부러울 것 없는 고액 연봉을 포기하고 퇴근 이후 가족들과 소소한 취미생활을 즐기는 B씨. 워라밸을 위해 멀쩡한 직장을 그만두고 지금을 즐기는 사람들의 얘기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어렵게 않게 접할 수 있다.

이 같은 경향은 구직자들에게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2017년 취업포털 ‘사람인’이 구직자 400명을 대상으로 ‘입사를 희망하는 기업의 연봉과 야근 조건’을 조사한 결과, 절반 이상인 65.5%가 ‘연봉 중간, 야근 적은 기업’을 선택했고, ‘연봉 낮음, 야근 없는 기업’(22.8%)이 뒤를 이었다. 반면 ‘연봉 높음, 야근 잦은 기업(주말 근무 포함)’을 선택한 비율은 11.8%에 그쳤다. ‘연봉 높은 직장이 최고’라는 과거의 구직관이 무너지고 직업 선택의 기준이 ‘삶의 질’로 옮겨갔다는 방증이다.   

2017년 욜로 열풍과 맞물려 급부상한 ‘혼밥족’, ‘혼술족’은 물론 홀로 여행을 다니는 ‘혼행족’은 더는 새삼스럽지 않은 신조어가 됐고, 시간 날 때 바로 여행을 떠나는 ‘즉행족’이라는 용어도 등장했다. 이는 비단 2030세대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최근 1~2년 새 급부상한 ‘캠핑족’은 4050세대가 이끌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7년 캠핑 시장에서 4050세대의 침낭·캠핑 세트 구매량은 전년 대비 2배 이상 급증했다는 통계도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욜로 열풍 속에 우리나라 국민이 느끼는 삶의 질은 어느 정도일까. 유엔 지속가능개발연대(SDSN)가 발표한 ‘2017년 세계 행복도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155개국 중 56위에 그쳤다. 욜로 열풍이 젊은 층을 넘어 중장년층에까지 확산된 한 해였지만 모든 사람이 이런 작은 행복조차 누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못한 탓이다.

반면, 상위 10개국의 경우 1위 노르웨이에 이어 덴마크, 아이슬란드, 스위스, 핀란드, 네덜란드,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스웨덴 등으로 근로시간이 짧고 직장 내 복지가 잘 갖춰진 유럽에서 무려 7개국이 나왔다. 더욱 눈길을 끄는 통계가 있다. 통계청과 한국삶의질학회가 공동 조사한 ‘국민 삶의 질 종합지수’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06년부터 2015년까지 국내총생산(GDP)은 28.6% 증가했지만, 같은 기간 삶의 질은 11.8%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부의 양극화와 마찬가지로 삶의 질 역시 계층 전반으로 그 온기가 확산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일과 삶의 불균형에 대한 인식은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2017년 말 ‘사람인’이 직장인 72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저녁이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직장인은 절반(50.6%) 수준에 그쳤고, 저녁이 있는 삶을 살지 못하는 주된 요인으로는 야근(60.5%, 복수 응답)이 가장 높았고, 업무 과중(42.0%)과 장거리 출퇴근(33.9%), 퇴근 후 업무 요청(23.5%) 등이 뒤를 이었다.


‘저녁이 없는 삶’을 사는 직장인들의 직장생활 만족도는 45점으로 매우 낮았고, 이들의 98%는 ‘저녁이 있는 삶을 꿈꾼다’고 답했다. 더욱 눈길을 끄는 대목은 10명 중 7명(70.2%)이 ‘높은 연봉’보다 ‘저녁이 있는 삶’을 선택해 워라밸에 대한 갈망이 구직자들보다 컸다는 점이다. 
최근에는 일과 삶의 불균형이 가족 구성원의 삶의 질에도 악영향을 미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와 주목을 끌었다. 호주국립대(ANU) 연구팀이 지난 10년간 2500쌍의 맞벌이 부부와 자녀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격무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자녀의 경우 정신 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초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맞벌이 부부 모두가 일과 가정 사이에서 갈등을 겪을 때 자녀들의 위험이 크게 증가했으며, 특히 부부가 과중한 업무, 긴 근무시간, 고용 불안 등을 겪을 때 자녀들의 정신건강 문제가 빈번한 것으로 조사됐다. 연구팀은 “일터와 가정이 충돌하면 부부 모두와 자녀들 건강에 해가 된다”며 “부모 중 어느 한쪽이 매우 힘들거나 융통성 없는 일을 하고 있을 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워라밸 세대’의 등장, 그리고 ICT 진화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의 워라밸은 신기루일 뿐인가. 안타깝게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대한민국의 워라밸은 개념 자체를 논하기조차 이르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2016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고용 동향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들의 1인당 평균 근로시간은 2069시간으로 멕시코 다음으로 많았다. 이는 OECD 회원국(35개국) 평균 1764시간보다 305시간 더 많으며, 근로시간이 가장 적은 독일보다는 무려 706시간 길다. 이는 근로시간에 대한 법적 불명확성이 크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현재 국내 제조업 사업장의 경우 근로기준법상 기본 근로시간을 주 40시간에 12시간 연장 근무를 포함해 최대 52시간의 근무시간을 허용하고 있다. 문제는 고용노동부의 행정 해석상 휴일 근무시간인 ‘8+8시간’이 추가로 적용될 경우 근로시간이 최대 68시간으로 늘어난다는 점이다. 반면 유럽연합(EU)의 경우 연장 근무를 포함해 주당 48시간을 넘기지 못하도록 철저한 관리감독을 권고하고 있으며, 만약 초과 근무가 발생하면 4개월 이내에 보상하도록 하고 있다. 워라밸 기업이 유럽 선진국에 다수 포진해 있는 것도 EU 등 범정부 차원의 노력 덕분이다.

최근 국내 정치권을 중심으로 주당 최대 근로시간을 52시간으로 단축하는 내용의 ‘근로시간 단축법’이 논의되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인건비 부담이 큰 중견·중소기업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국내 기업들 역시 워라밸을 단순한 비용 문제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직업 선택의 기준이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는 만큼 우수 인력을 확보하고, 핵심 인력의 유출을 막기 위해서라도 워라밸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매년 대한민국의 주요 트렌드를 선정, 발표해 온 김난도 서울대 교수는 2018년 트렌드 조사에서 1988년부터 1994년에 태어나 사회에 갓 진출한 젊은 직장인을 ‘워라밸 세대’로 규정했다. 김 교수는 2017년 한 취업포털의 설문조사에서 경력직은 1순위로 연봉(24%)을, 신입직원은 근무시간 보장(24.8%)을 꼽았는데, 과거 기성세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억누르고 해야 할 일에 집중했다면 현재의 젊은 층은 ‘저녁이 있는 삶’을 요구하며 퇴근 후 시간조차 내일을 위한 휴식보다 오늘의 행복으로 시간을 채우려 한다고 분석했다.

이들 ‘워라밸 세대’는 안정성과 보수, 승진 등을 직장 선택의 최우선으로 여겼던 기성세대와 달리 일과 삶의 균형, 즉 워라밸을 1순위에 놓고 있다. 또 완벽함을 추구하기보다 불완전함을 그대로를 수용하고 긍정적 태도로 자기애를 높이며, 돈보다 ‘스트레스 제로’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특성을 갖고 있다. 특히 직장을 위해 희생하려 하지 않으며 자신과 여가, 그리고 성장(자기계발)을 희생할 수 없는 가치로 여긴다.

소위 ‘칼퇴(정시 퇴근)’는 당연하고 자신의 커리어를 키워주는 직장을 이상적 회사로 인식하며, 미래를 위한 자기관리가 철저하기 때문에 이직과 직무 이동 등의 변화도 두려워하지 않는 특성이 있다. 평생직장 시대가 막을 내리고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가진 근로자들이 부상하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도 워라밸 세대를 등장시킨 배경이 됐다는 분석이다. 한 정보기술(IT) 기업 인사 담당자도 “우수한 인재 확보를 위해서라도 워라밸은 기업들이 추구해야 할 필수 요건이 되고 있다”며 “특히 창의적 사고가 필요한 IT 기업의 경우 수평적 조직문화와 함께 충분한 휴식이 보장돼야 한다는 공감대가 일찍부터 형성돼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더해 워라밸은 저출산·고령화라는 한국 사회의 당면 과제를 해결하는 열쇠로도 주목받고 있다. 현 정부 들어 근무시간을 줄이는 ‘칼퇴근법’과 ‘퇴근 후 카톡금지법’이 국회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다만 김 교수는 “이런 제도가 도입된다고 하더라도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퍼진 야근 문화가 바로 근절되지는 않을 것”이라며 “정책 이행에 앞서 일과 삶의 균형을 중시하는 사회·문화적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며, 이런 변화의 출발은 워라밸 세대를 향한 관심 어린 이해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편, 일각에서는 최근 본격화되는 제4차 산업혁명이 워라밸 혁신을 앞당기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긍정적 전망도 나온다. 이미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해 원격 혹은 재택근무 실험에 나선 기업들도 갈수록 늘고 있다. 또 2017년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내놓은 ‘직업의 미래(Future of Jobs)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371개 기업의 주요 간부들을 대상으로 미래를 바꿀 사회적 변화 동인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44%가 ‘업무환경 변화’를 꼽았다.

미래의 업무환경은 더 이상 기존의 물리적 환경에 국한되지 않으며, ICT의 기술 진화는 업무환경을 넘어 업()의 변화까지 이끌 것이라는 분석이다. 현재는 회사 밖에서 근무를 부분적으로 지원하는 화상회의부터 클라우드 등 업무용 솔루션 등이 활용되고 있지만, 앞으로는 가상현실(VR) 기술의 발전으로 이른바 ‘VR 일터개념이 본격적으로 도입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머지않은 미래에는 일터라는 개념이 불명확해지고 직업 역시 ICT에 적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간 양극화가 심화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공인호 기자 bal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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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17-12-28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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