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story 제 152호 (2018년 01월)

[big story]삶의 균형 맞추기 위한 조건은

[한경 머니 기고 = 한창수 고려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사상가였던 베르나르 퐁트넬은 “행복에 가장 큰 장애물은 너무 큰 행복을 기다린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2018년 한국인들은 그 말을 실천하고자 한다. “더 이상 행복을 기다리지 않고, 워라밸한 삶을 누리겠다”고. 그런데 과연 지금 우리는 워라밸을 제대로 마주할 준비가 된 것일까.


영국의 출판사 콜린스는 2016년을 대표하는 단어로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와 함께 ‘휘게’를 선정했다고 한다. 수년 전부터 덴마크에서 휘게라는 이름으로 등장해 북유럽, 일본 등의 나라에서 일과 삶을 균형 있게 살자는 문화운동이 유행했는데, 요즘은 국내에서도 일과 삶의 균형을 찾는 것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휘게(hygge)는 덴마크어로 ‘편안함’, ‘아늑함’ 또는 웰빙을 뜻하는 말이다. 일하는 것에만 매몰되지 말고, 적절한 휴식을 취하라는 의미를 갖는다. 호텔과 여행사, 관광청 등이 앞장서서 휴식 문화에 접목한 각종 마케팅을 하는 바람에 유명해진 측면도 있다. 심지어 가구를 만드는 업체들도 휘게를 콘셉트로 한 상품을 만들고 있다고 하니 말이다.

일본에서는 일벌레처럼 일만 하고 가족보다 직장을 우선시하던 단카이 세대(団塊の世代)가 지나고,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기에 접어들면서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큰 재난을 겪었다. 그 이후로 일본 사회에서는 단사리(斷捨離: 미니멀 라이프)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 유행이다. 더 이상 돈을 많이 벌고, 잘사는 것에 집중하지 말고, 살고 있는 현재에 만족하면서 인간적인 삶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한동안 국내에서도 유행했던 욜로(YOLO)족도 그 맥을 같이 한다고 하겠다.

한국에서는 2017년부터 일과 삶의 균형을 찾자는 소위 ‘워라밸’이라는 키워드가 뜨고 있다. 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work & life balance)의 한국식 줄임말이다. 표현은 다양하지만, 결론은 일과 공부만 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일과 삶이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여가와 문화생활에 좀 더 투자하라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인생은 오직 한 번이니 일만 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는 것이다.

상처를 넘어 치유와 성장
식민지 시대와 비극적인 전쟁을 거치고, 먹고 살기 힘들 때는 생존을 위해 무조건 열심히 일하고 경제적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모든 구성원이 추구해야 하는 공동의 선(善)이었다. 무한경쟁을 기본으로 서로 밟고 올라서라고 몰아세우는 입시, 부정부패를 해서라도 성공하기를 바라는 사업 등 직장과 일을 위해서라면 자식과 가족과의 소통은 그다음이었다.

국가적 무한경쟁 시대에 돌입한 최근에는 수능 성적과 내신 등급, 경제적 재산 수준으로 능력과 삶의 질을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 됐다. 아예 학력과 재력이 개인의 신분과 계층을 결정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사회지도층도 겉으로는 지나친 경쟁을 삼가야 한다고 하지만, 내 자식들은 그 경쟁에서 이기기를 바란다.

한국 사회에 불고 있는 균형 있는 삶, 워라밸 바람은 현대 한국 사회에서 부모 세대보다 더한 노력을 해도 예전만큼 성취를 이루지 못하는 젊은 세대들의 불만이 물질만능주의, 능력우선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나타나는 현상일 것이다.

2017년을 돌아보면 그동안 우리 사회는 정말 숨 가쁜 시간을 보내왔다. 세월호 침몰 사고는 많은 사람에게 아직 현재 진행형이고, 신문에서는 비슷한 사건사고가 반복적으로 보도되고 있다. 또한 국가 지도자의 스캔들에서 비롯된 촛불운동을 거친 지금도 사회 곳곳에서는 국가와 사회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의학적으로 말하자면 아직 신체 곳곳에 염증이 덜 회복된 채 투병 혹은 요양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지난 여러 해 동안 많은 사건사고를 겪으면서 사회 전체가 수많은 상처를 입었다. 그 후유증으로 구성원들 간의 불신과 미움은 아직 해소되지 않은 것 같다. 공직자 사회와 언론사, 정재계 등을 건강하게 만들겠다는 전 사회적인 움직임도 지속하고 있는데, 그 누구도 언제 끝날지 예상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이 마음의 상처, 트라우마를 겪으면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상처가 회복되는 힐링 단계를 거친다. 이것은 피부에 생채기가 났을 때 그 상처가 회복되는 과정과도 비슷하다. 같은 상처를 입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같은 시간에 회복되는 것도 아니다.


개인의 유전적 특성 및 생활습관에 따라 결정되는 신체적 건강과 인격의 성숙도와 가족, 사회의 지지 수준에 따라 빨리 회복되는 사람도 있지만, 심한 우울증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래 지속하는 경우도 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자신을 향한 폭력성으로 표출돼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고, 만성적 울분 상태에 빠져서 사회를 향한 폭력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이것은 개인이 가진 회복력(resilience)의 차이 때문이다.

회복력은 심리적 회복력 또는 신경 탄력성이라고도 부르는데, 스트레스가 닥쳤을 때 크게 늘어났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용수철이나 고무줄의 이미지로 연상할 수 있다. 오래된 고무줄의 탄력이 줄어들고, 나이 먹은 피부의 탄력이 떨어지는 것처럼 상처를 입은 개인의 심리적 회복 속도도 다양하다. 회복력의 정도에 따라 힐링에 걸리는 시간과 완전한 회복 여부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회복력은 평소에 충분히 쉬고 건강한 마음과 신체를 유지하면서 혹시 모를 응급에 대비해서 아껴두고 비축해 두는 에너지 저장소와 같다. 한창 젊고 건강할 때는 평소 내 능력의 100%를 발휘해 일하다가 급한 일이 생기면 며칠이고 밤을 새서 일해도 끄떡없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신체적으로 쇠약해졌을 때가 문제다.

본인이나 가족이 아프거나 응급사태가 벌어져서 본인 능력을 넘어서게 되면, 잘 회복되지도 않고 힐링에 걸리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호흡기 질환, 요통, 대사성 질환 등의 신체적 만성질환이 잘 낫지 않고, 이전에 없던 우울 증상이나 심해진 건망증에 깜짝 놀라게 된다.  

흔히 큰일을 겪고 잘 이겨내면 이전보다 인격적으로 더 성숙해지고, 현명해진다고 한다. 심리적으로 마음이 더 단단해지고 더 성숙한 인격과 강한 체력으로 발돋움하는 것을 의미한다. 소위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것이고 “그런 일도 겪었으니 이제 웬만한 일은 스트레스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직은 갈 길 먼 워라밸
성장에서 보다 중요한 측면은 세상을 보다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고, 타인을 보다 덜 비판적으로 본다는 점이다. 이것을 정신건강의학에서는 외상 후 성장(Post traumatic Growth, PTG)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인간의 성장은 상처가 회복된 다음에 일어나는 일이다. 상처가 채 낫지도 않았는데, 무조건 움직이는 연습을 억지로 하면 상처가 벌어지거나 기능에 손상이 올 수 있다.
사회 전체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일과 삶의 균형을 사회문화의 주요 어젠다로 설정한 핀란드, 덴마크 및 북유럽 국가는 경제적 발전과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시기를 거쳐 안정된 사회로 자리 잡은 지 이미 수십 년이 지났다.
2017년 세계 행복도 보고서에 따르면 설문 대상 155개 국가 중에 1위 노르웨이, 2위 덴마크에 이어 대한민국은 당당하게(?) 56위를 차지하고 있다.

아직 별로 행복한 나라는 아닌 것이다. 행복한 나라의 순위를 매기기 위해 참고하는 것들은 국내총생산(GDP)뿐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행복을 적극적으로 논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수준과 복지 이외에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것이 무조건 일을 조금 하고, 휴식시간을 길게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인심은 곳간에서 난다고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여가와 문화생활을 무작정 늘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우리보다 먼저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에서 그 예를 보았다. 

삶의 균형감을 가지고 살기 위해서는 결심이 필요하다. 조금 덜 성공해도, 돈을 조금 덜 벌어도, 성적을 조금 덜 받아도 여가와 문화생활을 하는 것으로 내 생활이 만족스러운 것이라고 결심하는 것이다. 연극을 보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충분히 하면서도 전교 1등, 수능 만점을 받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일하는 시간이 적어지면 일정 시간에 이루는 성과는 적어질 수 있고, 내가 받는 보수도 적어질 수 있다. 행복한 삶은 기본적인 물질적 조건이 충족된 이후에는 적당한 수준에서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이룰 수 있다. 저널 오브 해피니스 스터디스(Journal of Happiness Studies)에 실린 2016년 연구에서는 “기본적 필요가 충족되고 난 이후의 수입은 개인의 주관적 복지 증진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고하고 있다.

관용적인 사회 분위기 필요
직장과 사회에서 일과 삶의 균형, 소위 워라밸을 추구하기 이전에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건과 사회적 분위기가 우선 마련돼야 한다. 각국의 행복 수준을 조사하는 세계 행복도 보고서는 국민 총수입과 더불어서 가족 및 사회적 지지망, 건강하게 오래 사는가를 의미하는 건강수명, 나와 다른 사람을 얼마나 인정하는가 하는 사회적 관용의 수준, 그리고 사회 전체의 부패 수준을 함께 평가한다는 점을 기억하자.

더불어 남들을 제치고 혼자 앞서 나가는 것보다는 조금 천천히 즐겁게 가도 된다는 것에 대한 합의도 필요하다. 최근 세미나를 위해 방문했던 발칸반도의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불과 십수 년 전 민족 간 분열을 통한 끔찍한 비극을 겪었음에도 경제 발전을 위한 노력과 더불어 서로의 아픔을 보듬고, 관용과 배려, 함께 가는 삶을 위한 노력을 함께 하고 있다고 한다. 

사회적으로 여유와 균형을 찾는 삶은 중요하다. 남들의 시선으로 내 인생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시각에서 내 인생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동시에 필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명확히 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최선을 다하는 삶, 더불어 이 사회를 위해 해야 할 나의 몫은 무엇인가를 잊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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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17-12-28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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