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기고 =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문화예술학부 교수] “식탐은 칼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다”는 중세 라틴의 격언처럼 초콜릿 역사의 면면마다 신의 열매를 향한 인간의 탐욕이 오롯이 배어 있다. 인간의 탐욕이 빚은 초콜릿의 명암을 따라가 보자. 사진 한국경제DB
[big story]인간, 신의 열매 ‘카카오’를 탐하다
유럽의 중세 문학과 문헌 연구자인 사라 모스와 알렉산더 바데녹이 펴낸 <초콜릿의 지구사>의 두 저자가 말했듯이 ‘초콜릿은 까다로운 식품’이다. 초콜릿나무는 남북으로 위도 20도 이내, 해발 300m 아래쪽에서만 자란다. 더욱이 큰 나무가 드리우는 그늘과 적당한 습도, 섭씨 16도 이상의 온도도 요구된다.

심지어 병충해에 약해서 잘 자라던 초콜릿나무가 한순간 죽어버리는 일도 부지기수다. 열매를 딸 때도 다른 줄기에 난 씨눈을 다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다음 해에 수확을 기대할 수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말릴 때는 건조한 기후가 필수다. 그만큼 초콜릿은 본래부터 귀했던 식품이다.

실제로 중앙아메리카의 마야와 그 이후의 아즈텍 원주민들은 초콜릿나무의 열매인 ‘카카오 콩’을 화폐 대용으로 사용할 정도로 귀하게 여겼다. 콜럼버스의 아들 페르디난드는 1502년 8월 15일 현재의 온두라스 인근 과나하 해안에서 카누에 카카오 콩을 가득 실은 원주민들을 만났다. 그들은 이것을 들고 유럽에서 온 이방인들의 배에 올랐다. 그런데 몇 알이 떨어지자마자 다들 눈알이 빠진 것처럼 허리를 숙여 카카오 콩을 집었다. 이 장면이 유럽인들에게는 카카오 콩, 즉 초콜릿을 금처럼 여기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유럽인들 중에 아즈텍 원주민 부인들이 볶은 카카오 콩 가루에 옥수수가루, 바닐라, 고추, 허브 등을 넣고 반죽해 만든 죽이나 음료를 마셨다면 결코 그런 판단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역사가 지로라모 벤초니는 아즈텍 원주민이 마시는 초콜릿 음료를 두고 “인간이 마실 음료라기보다는 돼지에게 더 적합한 것이다”라고 비난했다.

이에 비해 크레올(Creole)은 달랐다. 그들은 원주민들처럼 중앙아메리카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생활한 에스파냐 계통의 백인들이다. 크레올 부인들은 자신들의 부엌에서 일하는 원주민들이 제공해준 초콜릿 음료에 점점 빠져들었다. 초콜릿에 함유된 테오브로민(theobromine)은 비록 그 순도는 약하지만 카페인과 비슷한 흥분성 물질이기 때문이다.

자주 먹다 보면 자연히 중독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초콜릿이 글로벌 푸드(global food)가 되도록 만든 본질이다. 아즈텍식 초콜릿 음료에 중독된 에스파냐 출신 가톨릭 사제들이 16세기 후반 귀국하면서 에스파냐의 궁중에 초콜릿 덩어리를 선물로 가지고 왔다. 그러나 문제는 초콜릿 음료에 들어가는 부재료가 없다는 것이었다. 옥수수 가루 대신에 우유, 꿀 대신에 설탕, 그리고 고춧가루 대신에 후추나 계피가루를 넣었다. 17세기 초반이 되면 초콜릿 음료가 가톨릭 사제에 의해서 이탈리아 궁중을 비롯해 서유럽의 왕실로 퍼져 나갔다.

17세기 중후반이 되자 초콜릿 음료는 부인용 만병통치약으로 탈바꿈했다. 결핵과 폐병, 치아 청결과 입내 제거, 그리고 결석·배뇨장애 해소와 다이어트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을 위한 음료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러다 보니 아즈텍에서 수입된 고체의 초콜릿은 뇌물로도 쓰였다. 즉, 초콜릿이 유럽에서 권력과 부의 상징이 된 것이다.

1704년에 런던에서 발행된 <교양 있는 여교사>란 책에는 다음과 같은 요리법이 적혀 있다. “같은 양의 물과 우유를 넣고 끓이면서 바닥에 눌어붙지 않도록 계속 저어 가며 잘 섞는다. 여기에 초콜릿 덩어리와 술을 넣은 후 불에서 내린다.

신선한 달걀의 노른자에 장미 물에 녹인 가루설탕을 잘 섞어서 넣는다. 걸쭉해지면 그릇에 붓는다.” 오늘날의 핫 초콜릿과 비슷하지만, 맛까지 비슷하다고 할 수는 없다. 아즈텍의 초콜릿 음료가 서유럽식으로 바뀐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18세기가 되면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부유층 가정에서는 초콜릿 음료를 아침식사에서 반드시 차리는 메뉴로 여겼다.

초콜릿이 이렇게 권력과 부의 상징물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수요에 비해 공급이 딸렸기 때문이다. 18세기 초반까지 서유럽의 상인들은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는 초콜릿 나무를 다른 지역에서도 재배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특히 18세기 말에 중남미에서 일어난 독립전쟁은 초콜릿의 유통을 흔든 대사건이었다. 결국 서유럽의 상인들은 설탕을 넣는 커피와 차에 주목했고, 유럽식 초콜릿 음료는 사양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19세기, 초콜릿 관념이 바뀌다
19세기 초 사양길에 빠져 있던 초콜릿을 건져낸 사람은 네덜란드의 과학자 쿤라드 반 호텐(Coenraad van Houten)이다. 사실 아즈텍에서 수입된 초콜릿 덩어리에는 지방 함량이 매우 높아서 뜨거운 물에 녹인 다음에 이것을 걷어내는 데 엄청난 시간이 들었다. 그런데 반 호텐이 수압식 압착기를 사용해 이 지방을 분리해내는 방법을 개발한 것이다. 이렇게 압착된 초콜릿의 가루는 마치 커피나 차처럼 뜨거운 물에 타서 스푼으로 젓기만 해도 됐다.

이때가 1828년이었다. 그러나 이 개발이 반 호텐을 부자로 만들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와 함께 일했던 독일인 J. M. 레만(J. M. Lehmann)이 차린 카카오 압착기가 영국과 미국으로 팔려 나갔다. 세계적인 초콜릿 메이커 ‘허쉬’의 창업자 밀턴 스네이블리 허시(Milton Snavely Hershey) 역시 1893년 시카고박람회에서 레만의 기계를 구입하고 초콜릿 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초콜릿 제품 대부분은 스위스 사람들에 의해서 개발됐다.

1879년 스위스의 다니엘 페터(Daniel Peter)는 앙리 네슬레(Henri Nestle)가 개발한 가루우유를 초콜릿에 섞어 밀크 초콜릿을 개발했다. 이 밀크 초콜릿에 다시 카카오버터를 넣어서 고형의 초콜릿을 만들었다.

로돌프 린트(Rodolphe Lindt)는 초콜릿을 서서히 가열하면서 화강암 롤러로 잘 섞어 부드럽고 풍미가 좋아진 고형이면서도 부드러운 지금의 일반적인 초콜릿을 개발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바로 지금의 초콜릿이다. 이때부터 초콜릿은 권력과 부의 상징에서 대중적인 달콤한 식품으로 그 모습을 바꾸어 갔다.

19세기 후반 초콜릿의 대중화를 이끈 또 다른 역사적 사건은 중남미 국가의 독립으로 식민지를 잃은 서유럽 국가들이 아프리카를 점령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일어났다. 1819년 포르투갈 상인들은 초콜릿 나뭇가지를 잘라서 서아프리카 근해의 상투메섬에 심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이어서 서아프리카의 영국, 프랑스, 독일 식민지에도 초콜릿 나무가 재배됐다. 마침내 지금의 가나인 ‘골드코스트’에서의 초콜릿 생산량은 중남미를 넘어설 정도로 많아졌다. 오늘날 ‘가나’를 내세운 초콜릿 상품이 존재하는 이유도 이때의 성공적인 재배 때문이다.
20세기 초 초콜릿 과자는 산업혁명에 성공한 서유럽의 중산층 가정에서 가족의 사랑을 상징했다. 특히 우유와 함께 초콜릿은 어린이의 건강에 유익한 식품으로 선전되면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초콜릿을 세계적인 식품으로 만든 또 다른 사건은 제1차와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전장에서 총알과 대포에 맞서던 군인들의 전투식량에는 반드시 초콜릿이 들어 있었다. 전투식량에 들어간 식품은 기계화를 통해서 표준화된 대량 생산이 이루어졌고, 무료였기 때문에 입맛의 파급력이 너무나 강력했다.

‘기브 미 초콜릿’의 기억
한반도의 초콜릿 역시 그랬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남한에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미국의 초콜릿이 한반도로 옮겨졌다. 1947년 7월 쌀이 부족하자 미군정에서는 한 사람당 한 개씩의 전투식량 초콜릿을 배급했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유엔군의 참전은 초콜릿을 계층과 지역에 상관없이 전국으로 퍼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도 그랬듯이 유엔군은 길거리에서 만난 굶주린 한국 아이들에게 초콜릿을 나눠주었다.

한국전쟁 때 거리를 방황했던 아이들은 서양 군인만 보면 “기브 미 초콜릿(Give me chocolate)!”을 외쳤다.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에 태어나 한국전쟁의 참혹함을 겪고 학교에서 영어공부에 매달렸다가 1960~1970년대 개발독재 시대에 무역의 주역을 맡았던 ‘초콜릿 영어세대’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전쟁의 비참함을 겪고서 ‘잘 살아보자’는 일념으로 평생을 살았던 ‘기브 미 초콜릿 세대’였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부대에서 도깨비시장으로 흘러나온 초콜릿은 값이 만만치 않았지만 불티나게 팔렸다. 전쟁 중에 맛본 초콜릿에 부자들이 빠졌던 것이다. 1965년 한·일 수교 이후 일본의 제과 기술을 가지고 온 국내 회사에서 초콜릿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중반 국내 초콜릿 산업은 매년 거의 2배 이상의 성장을 거듭했다. 1976년 하반기가 되면 초콜릿의 주원료인 카카오가 부족해서 생산이 중단되는 일도 일어났을 정도로 초콜릿이 인기였다.

1980년대 중반 마침내 한국 사회에서 초콜릿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국내의 한 제과 업체가 1968년에 일본에서 시작된 ‘밸런타인데이=초콜릿 선물’이란 마케팅 전략을 이때 활용하면서 초콜릿은 ‘연애사업’의 필수품이 됐다. 1990년대 이후 이 마케팅 전략은 연인뿐만 아니라 가족, 직장, 학교의 동료들 사이에서도 초콜릿을 선물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밸런타인데이’의 국민적 명절화를 만들어냈다.
[big story]인간, 신의 열매 ‘카카오’를 탐하다
[오리온 초코파이 초기 디자인]
지금은 세계적인 식품이 돼 버린 한국산 ‘초코파이’는 본래 1917년에 미국 남부 테네시주의 채타누가 베이커리(Chatanooga Bakeries)에서 발매한 문파이(Moon Pie)가 효시다. 이것을 일본의 모리나가 제과 회사가 1958년에 씹으면 쫄깃쫄깃한 마시멜로(marshmallow)를 소프트 케이크 속에 넣고 겉에 초콜릿을 입힌 ‘엔젤마크’라는 제품으로 바꾸었고, 이것이 바로 초코파이의 원형이다. 한국 사회에서 초코파이의 성공에는 훌륭한 제품력도 중요하지만, ‘정(情)’이란 광고 덕분이기도 하다. 한국산 ‘초코파이’는 중국에서 ‘좋은 친구’로 변신해 세계적인 식품의 길로 나아갔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한국인은 초콜릿이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는 ‘어두운 그림자’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초콜릿은 서유럽인과 만나면서 불행의 길을 걸었다. 평화로웠던 아즈텍 사람들 대부분을 유럽에서 가져간 온갖 전염병으로 몰살시킨 서유럽인들이 가져간 초콜릿 덩어리의 달콤함에는 착취가 있었다.
[big story]인간, 신의 열매 ‘카카오’를 탐하다
[사진 설명 : 코트디부아르 아비장 유엔 사무소에서 코코아 재배자들이 카카오 열매 자루를 불태우며 코코아 수출 금지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

19세기 말 서아프리카의 가나로 옮겨 심어진 초콜릿 나무는 탐욕에 가득한 대지주 추장들과 영국 상인들의 결탁으로 인해서 값싼 초콜릿을 만들어냈다. 지금도 그 나무 아래에서 어린 10대들은 착취당하면서 카카오 열매를 따서 압착기에 넣고 있다. 초콜릿은 결코 신이 내린 선물이 아니다. 오히려 서유럽 주도의 ‘산업화와 세계화’가 만들어낸 ‘제국주의의 그림자’다.

주영하 교수는…
주로 음식의 문화적
현상과 음식의 역사에 대한 연구를 했다. 음식 문화사, 음식 인문학과 관련해 국내를 대표하는 전문가다. 주요 저서로 <음식 인문학>, <맛있는 세계사>, <차폰 잔폰 짬뽕>, <음식 전쟁,
문화 전쟁> 등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다.

일러스트 허라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