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story 제 155호 (2018년 04월)

[big story]여백, 피로감 해방시키는 탈출구

예술로 본 중년의 미니멀 라이프

[한경 머니 기고 = 글·사진 김윤섭 미술평론가·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술사(史) 면면마다 미니멀리즘이 존재했다. 가장 단순한 표현을 지향하지만 그 함축된 의미와 만족은 무한대다.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 궁극의 목적이 그러하듯.

[로버트 라우센버그, , 캔버스에 유채, 121.9×121.9cm, 1951년]

적막감이 흐르는 1952년 뉴욕의 한 콘서트홀. 홀로 불빛을 받으며 무대에 등장한 피아니스트는 조용히 피아노 앞에 앉는다. 모두 숨죽이며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를 응시한다. 그가 오늘의 주인공인 연주자이기 때문이다. 한동안 악보를 쳐다보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그런데 1분이 지나고 2분이 다가오는 데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닐까요?”, “왜 가만히 있지?”, “쉬잇, 조용히 좀 해보세요!” 나지막한 목소리로 여기저기서 인내심 약한 이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와 제지하는 소리들이 뒤엉키다가 다시 조용해졌다.

어느새 1분이 훌쩍 더 지나고 있었다. 어두운 관객석에서 느끼는 1분은 족히 일상의 10분 그 이상의 무게로 느껴졌을 것이다. “음~”, “허어~!” 서로 눈치를 보며 차마 말을 못하던 청중은 낮은 헛기침과 신음소리로 답답함의 표현을 대신했다. 그로부터 다시 기나긴 1분이 더 지날 무렵, 이게 웬일인가! 아무런 연주를 하지 않던 피아니스트는 피아노 뚜껑을 아예 덮어 버렸다. 정확히 ‘4분 33초’ 만이다.

공연장 안은 또다시 참았던 관객들의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 이젠 누구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토록 점잖게 입장했던 고상한 관객들은 불만에 가득 찬 투정꾼으로 변해 있었다. 그날의 연주는 거기까지였다. 

미술가이자 작곡가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년)의 <4분 33초> 연주회 실황 장면이다. 아무 연주도 하지 않았던 피아니스트가 바라본 3악장의 악보엔 ‘TACET(비교적 긴 휴식을 뜻하는 음악용어)’이라는 글만 쓰여 있었다.

물론 오선지에는 음표 역시 하나도 없었다. 공연장과 관객에게 나온 소음마저 음악이 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연출이었다. 지금에야 명곡으로 불린다지만 당시엔 많은 논란을 빚었다. 케이지는 왜 이런 음악을 만들었을까? 그 결정적 계기는 크게 두 가지의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우선 친구였던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1925~2008년)의 전시로부터 영감을 받았다는 설이다. 케이지는 1951년 라우센버그의 전시에서 작품 <하얀 그림>을 만난다. 제목처럼 작품은 흰 캔버스 상태였다. ‘설치를 잘못 해놓은 건가?’ 케이지가 의아해하면서 작품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다가간 순간, 비어 있던 흰 캔버스 바탕에 자신의 그림자가 꽉 들어차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그림자 외에도 작품 주변엔 조명의 빛과 어우러진 옅은 먼지까지 미묘한 하모니가 연출돼 있었다. 그 순간 뭔가 스치는 영감이 있었다.

두 번째도 같은 해인 1951년 하버드대의 방음 시설이 된 빈 방에 들어갔을 때 맞은 경험이다. 방음된 방에 들어간 케이지는 절대적인 고요를 기대했지만, 의외로 얼마 지나지 않자 빈 공간엔 오히려 미세한 소리로 가득 차 있음을 느끼게 된다. 아마도 그 순간 ‘완벽한 무음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 경험들이 1952년의 특별한 연주곡 <4분 33초>를 탄생시켰다.

이듬해인 1953년엔 라우센버그도 드쿠닝의 그림을 6개월 동안 지워 가며 회화의 전통적 작업 방식을 파괴해 완성한 <지워진 그림>을 발표한다.

가장 순수한 추상주의
아마도 서양미술의 이런 움직임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절정에 달하지만, 출발은 훨씬 더 이전부터다. 대표적인 예로는 20세기 초 카지미르 세베리노비치 말레비치(Kazimir Severinovich Malevich, 1878~1935년)에 의해 시작된 절대주의(suprematisme)를 들 수 있겠다. 러시아 혁명 후 구성주의와 함께 일어난 이 전위미술 형식은 회화의 재현성을 거부하고 가장 단순하고 순수한 감성 표현을 추구한 기하학적 추상주의 운동이다.

[카지미르 세베리노비치 말레비치, , 캔버스에 유채, 79.4×79cm, 1918년]

절대적 본질을 추구하기 위해 무(無)에 가장 근접하게 순수성을 표현한 1900년대 초반 말레비치의 작품들은 신조형주의의 대가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년)의 기하학적 추상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는 면에서 의미가 깊다.

이 같은 서양미술에서 보여준 비움의 실험적 시도는 동양의 경우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1932~ 2006년)의 영상작품 <영화를 위한 선(禪)> (1962~1964년)이 좋은 예일 것이다. 이 작품은 그의 스승이자 동반자였던 존 케이지의 <4분 33초>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

[백남준, <영화를 위한 선(禪)>, 미디어 영상작품, 1964년]

그래서일까. 백남준은 아무것도 담지 않은 투명 필름을 투사한 영상작품을 선보였다. 여기에서 그가 작품 제목에 ‘선(禪)’의 개념을 넣은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분명 ‘사의적이고 명상적인 비움’이란 속뜻을 지녔을 것이다. 보이는 현상 저 너머의 본질적인 것을 찾아가는 화두(話頭)를 꺼내 들었다.

동양에서 비움은 대개 ‘여백(餘白)’과 연관 짓는다. 여백은 ‘남겨진 부분 혹은 빈 공간’이다. 그냥 없거나 빈 것이 아니다. 정확히는 채울 수 있음에도 ‘고의적으로 비워 놓은 것(공간)’인 셈이다. 아마도 그 밑바탕엔 노자(老子) 사상의 ‘장단상형(長短相形)’ 개념도 기인할 것이다. 길고 짧음은 서로를 통해 모양을 이룬다는 얘기다.

비었다는 개념과 채워졌다는 개념도 결국은 등가(等價)이자 서로의 해법이다. 그래서 여백의 미학은 넓게는 ‘쉼의 가치’와도 통한다. 무엇인가로 가득 찬 심리적 부담이나 시각적 피로감을 해방시켜주는 탈출구이자 창문이다.

노장사상부터 단색화까지
동양의 노장사상(老莊思想: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기반으로 한 수많은 논변)과 비움의 미학이 잘 접목된 예로 달항아리를 빼놓을 수 없다. 노장(老莊)의 가르침 중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이란 대목과 무척 잘 어울린다. 둥근 원형의 겉모습은 ‘공(空)’ 사상에 비유되지만, 도자기라는 기본 속성이 더 많은 의미를 품고 있다. 본디 도자기의 쓰임(쓸모 있음)은 딱딱한 껍질이 아니라, 한가운데 빈 공간이다. 실제 만져지지도 않는 ‘쓸모없던 빈 공간’으로 인해 비로소 도자기의 기능성은 온전히 완성된다. 

[강민수, <달항아리>, 폭 65.5cmx높이 67.5cm, 2011년 그림은 이재삼 작품]

[.강민수, <달항아리>, 폭 65.5cmx높이 67.5cm, 2011년 그림은 강요배 작품]

폭과 높이가 무려 65cm가 넘는 초대형 달항아리. 달을 테마로 삼았던 한 전시에서 만난 강민수 작가의 <달항아리>는 마치 전시장에 휘영청 보름달을 옮겨 놓은 느낌을 전했다. 한 아름에 껴안기도 버거운 그 <달항아리>의 진면목은 구연부(口緣部)에 얼굴을 가져갔을 때 발견된다.

구연부 안쪽의 어둑한 공간은 마치 심연의 소우주를 만난 것처럼 심오한 울림으로 가득하다. 그 순간 문득, 비운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라는 원론적인 물음과 만나게 된다. 형상과 공간, 비움과 채움, 색즉시공(色卽是空)이 따로 없다.

서양미술은 배경보다는 주로 형태를 중요시 여겼다. 따라서 전통적 개념의 작품에서 ‘비움(empty image)’은 미완성으로 간주됐다. 모더니즘(modernism) 이후 추상화가 등장하면서야 비움을 독립된 개념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또한 채움과 비움의 상호관계를 통한 착시효과를 표현했으며, 다양한 비움의 시각 표현으로 감성을 전달하고자 애썼다.

그 대표적인 미술사조가 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한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나, 흑색 또는 한 색만 사용했던 모노크롬(monochrome) 등이다. 같은 개념으로 한국의 ‘단색화(dansaekhwa)’를 빼놓을 수 없다.  

단색화 역시 ‘비움 미학’의 대명사다. 최근 몇 년간 한국의 단색화는 국제적인 주목을 받으며 새롭게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그 선두주자를 꼽으라면 이우환 화백이 으뜸이다. 이 화백의 그림은 주로 간결한 절제미, 심오한 함축미의 절정을 보여준다.

[이우환, , 캔버스에 광물 안료, 유채, 162×130cm, 2009년]

1970년대의 <선으로부터>와 <점으로부터>, 1980년대 <바람과 함께>, 1990년대 이후의 <조응>, 2000년대 <다이얼로그(dialogue)> 시리즈까지 50여 년 동안 일관된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마치 깊이 잠든 호흡을 깨어내어 점, 선, 면으로 화면 위에 응축시켜 놓은 것 같다. 특히 최근 작품 <다이얼로그>는 빈 여백의 공명(共鳴)에 대한 응답으로 ‘신의 한 수’가 따로 없다.

왜 그토록 동양에선 ‘비움(empty image)’ 또는 ‘여백(餘白)’을 중요하게 여길까? 이는 이미 중국 당대(唐代, 618~907년)에 발생한 수묵화로부터 출발했다. 먹과 종이는 흑과 백의 대비이고, 수묵산수화의 공간 처리는 비움과 여백 표현의 표상이 됐다. 얼핏 비움을 활용해 먼 곳을 흐리게 하거나 안개 또는 구름을 표현한 것으로만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공기나 물처럼 만질 수도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상징적인 시각화 작업이기도 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시각화하는 과정은 사대부를 중심으로 성행한 문인화로 절정을 이룬다. 작가의 의도적인 정신성을 대변한 문인화의 화법은 여백으로 표현할 수 있는 비움과 채움의 철학적인 정신성을 잘 보여준다.

[이정걸, , 캔버스에 혼합 재료, 61×116.7cm, 2016년]

인생의 긴 여정에서도 비워낼 때가 온다. 중년의 삶이다. 치열하게 살아온 삶의 무게를 조금씩 내려놓고, 나를 위한 진정한 자유로움을 맞을 준비의 시기다. 비워진 삶이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면 중심이 든든해야 한다.

누구에 의해서나 보상받으려는 의도가 아닌, 무뎌진 껍질을 스스로 벗겨내야 한다. 60대를 코앞에 둔 이정걸 작가의 작품도 그런 이야기를 담았다. 주변에 버려진 빈 껍질들에서 삶의 껍데기를 발견한다. 그것들은 화면에 반쯤 잠긴 부조 형식으로 표현했다. 오로지 그림자로만 그 존재감을 알아볼 수 있게 한 설정도 가슴 찡한 여운을 전한다. 그리곤 되묻는다. 이제 당신은 스스로 비울 준비가 돼 있나요?

김윤섭 소장은…
미술평론가로서 명지대
대학원 미술사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및 서울시립미술관 작품가격 평가위원, (사)한국미술시 가감정협회 전문위원, 대한적십자사 문화나눔 프로젝트 아트디렉터, 교보문고 교보아트스페이스 기획위원, 숙명여대 겸임교수, 계간 조각 편집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심의추천위원, 한국미술 경영연구소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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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18-03-29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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