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story 제 157호 (2018년 06월)

[SPECIAL] 드라마에는 대중이 원하는 리더가 있다


forum 갑질 논란, 다시 쓰는 리더십
[한경 머니 = 하재근 문화평론가]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그래서 절대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이 근대 민주공화체제의 대전제다. 전근대 사회에선 귀족과 평민, 노비가 철저하게 구분됐다. 귀족은 하인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대하는 게 당연했다. 그때 귀족들은 목소리를 높이는 하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느 안전이라고!” 비슷한 말이 최근 벌어진 재벌 갑질 사태에서 나왔다.

요즘 우리나라의 드라마 작가, 영화 시나리오 작가들을 자괴감에 빠뜨린 사건이 발생했다.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물벼락 갑질 사건에서 비롯된 한진그룹 총수 일가의 갑질 논란이 그것이다. 특히 조양호 회장의 부인인 이명희 이사장에 대한 폭로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회장 ‘사모님’이 원색적인 언어로 고성을 지르며 직원들을 대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공개됐기 때문이다.

그동안 드라마나 영화에서 재벌 오너 일가의 갑질을 많이 그려 왔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언행을 하는 사모님의 경우는 없었다. 아무리 갑질을 하더라도 재벌 사모님 정도 되면 어느 정도의 품위를 지킬 것이라는 전제가 있었다. 그래서 모든 작가들은 사모님을 기본적으로는 우아한 존재로 그렸다. 이명희 이사장에 대한 녹취는 그 전제를 완전히 깨뜨렸다. 우리나라의 최고위층 사모님이 사실은 너무나 일차원적인 태도로 아랫사람들을 대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래서 그런 갑질 형태를 상상하지 못한 작가들이 자괴감에 빠진 것이다. 이런 갑질 리더십에 국민의 질타가 쏟아졌다.

2000년대 초에 이미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말이 나왔다. 더 이상 정치권력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권력이 정점에 올랐다는 말이다. 재벌은 그 경제권력의 꼭짓점이다. 한진 총수 일가 갑질 사건은, 우리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경제권력의 꼭짓점이 상상을 직업으로 하는 작가들의 상상조차 초월할 정도로 전근대적인 행태를 보인다는 점을 폭로했다. 꼭짓점이 그러면 그 행태가 층층시하로 내려오면서 전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조현민 전 전무가 직원들에게 “어딜!”, “어디서!”라고 질책하는 녹취가 공개됐다. 감히 내 앞에서 방자하게 굴지 말라는 것처럼 들린다. 자신을 직원들과는 다른 존귀한 신분으로 여기는 듯한 표현이다. 많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조현민 전무, 이명희 이사장 등이 직원들에게 욕설, 고성, 막말 등을 하며 화풀이를 했다고 한다. 직원을 자신과 평등한 인간이 아닌 하인이나 머슴처럼 대한 것으로 추정된다. 과거에 다른 재벌 회장도 직원을 머슴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이것은 근대 민주공화체제에선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하는 사람들 마음속에 모멸감과 반발심이 쌓일 수밖에 없다. 한진 일가 갑질 사건이 화제가 되자 대한한공 직원들이 가면을 쓰고 거리로 나와 총수일가 퇴진을 외친 건 바로 그렇게 쌓인 반발심 때문일 것이다. 만약 평소에 직원들의 마음을 얻는 경영을 했다면 회사가 사회로부터 질타를 받을 때 직원들이 똘똘 뭉쳐 회사와 경영진을 지켰을 것이다. 문제가 터지자마자 직원들이 내부고발에 나서고 경영진을 비난하는 촛불집회를 했다는 것은 평소에 그만큼 불만이 누적됐다는 뜻이다. 이렇게 직원의 마음을 잃은 회사가 과연 국제 경쟁력을 기를 수 있을까.

한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의 리더십 행태가 기본적으로 전근대적인 측면이 있다. 아랫사람을 단지 직무상 지시를 받는 사람이 아닌, 인격적으로 예속된 존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식민지와 군사정권 권위주의 체제를 거치면서 봉건문화를 시민문화가 제대로 대체하지 못했고, 수직적 군사문화까지 확산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직적 체제에서 ‘꼰대’를 향한 불만이 하늘을 찌른다. 특히 젊은 세대로 갈수록 불만이 커져, ‘헬조선’을 탈출하겠다는 움직임까지 나타난다. 이러면 기업에서도 직원들의 마음을 얻기가 힘들어진다.

드라마에 투영된 리더의 판타지 


드라마는 현실에서 좌절된 꿈을 대리만족시켜주는 판타지다. 현실의 리더십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고압적이고 안하무인의 행태를 보이는데, 그것을 바로잡을 힘이 없기 때문에 드라마를 통해 이상적인 리더십에 대한 열망이 표출된다. 지도자, 영웅을 그리는 사극이 대표적이다.

 국민 드라마라고까지 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주몽>에선 주몽과 대소의 리더십이 대비됐다. 대소는 귀족과 평민을 철저히 구분하는 리더십이었다. 비참하게 사는 고조선 유민들을 가벼이 희생시킨다. 반면에 주몽은 모든 백성을 똑같이 소중한 존재로 대한다. 문제가 생기면 자신이 솔선수범해 해결한다.

그러자 야철대장 모팔모 같은 인재들이 몰려들어 나라를 중흥시키고, 드라마 시청률이 치솟았다. <태왕사신기>에선 담덕과 호개가 대립했다. 호개는 귀족 중심인 데 반해, 담덕은 병사 하나하나를 모두 동료로 대해 결국 광개토대왕이 된다. <대조영>에선 대조영이 백성을 자기 몸처럼 생각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또 다른 국민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지배층은 전쟁이 터지자 힘든 부역을 평민들에게만 떠넘기려 했다. 반면에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영에 부임하자마자 특권과 차별을 철폐하고 모든 고난을 병사들과 함께 했다. <이산>에서 노론 지배층은 궁핍한 백성들의 언문 상소를 무시하지만 정조는 언문 상소를 통해 백성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 아픔에 공감했다.

<대왕 세종>에선 세종대왕이 힘없는 백성들이 뜻을 표출할 수 있도록 언문(한글)을 만들어주려 노력하는 모습이 담겼다. 반면에 권신귀족들은 자신들만 아는 특권적 문자인 한자를 지키려 한글창제를 반대해 시청자의 빈축을 샀다. <선덕여왕>에선 미실이 귀족만 챙기고 정보를 독점하려 했지만 덕만(선덕여왕)은 백성을 위해 정보를 공개하고 생산수단을 나눠줬다.

이렇게 리더십을 그린 모든 사극(단 하나의 예외도 없다)에서 시청자의 응원을 받는 주인공 지도자는 약자도 소중하게 여기는 수평적이고 개방적인 리더십을 선보였다. 현실의 리더십이 약자를 무시하면 할수록 대중은 드라마를 통해서나마 올바른 리더십의 모습을 보며 대리만족하려 했다. 그래서 비슷한 구도가 반복되는 지도자 사극들이 계속해서 인기를 끄는 것이다.

이런 드라마들을 보면 대중이 어떤 지도자, 어떤 리더십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복잡한 분석이 필요 없다. 한눈에 알 수 있도록 명확하게 리더십 형태가 그려져 있고 대중은 여론과 시청률을 통해 자신들의 바람을 분명히 표현해 왔다. 그런데 우리 현실의 리더십은 이런 대중의 바람에 부응하지 못했고, 이제 그 불일치로 인한 불만이 대대적인 분노와 저항을 부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대로는 안 되는 것이다.

특히 인터넷 시대가 약자들의 목소리를 키웠다. 과거 같으면 감내했을 일도 이젠 문제를 제기하고 공론을 모은다. 정권까지 갈아치운 촛불집회가 네티즌의 자신감을 고양시켰다. 최신 정보기술(IT)로 인해 증거 확보도 용이하다. 녹취 하나면 아무리 힘 있는 강자라도 한 방에 무너질 수 있다. 기업도 흔들릴 수 있다. 이제야말로 우리 리더십 행태를 근대 민주공화국에 맞는 형태로 개선할 때인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가치는 ‘인간 존엄성’이다.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모두가 존엄하기 때문에 모두가 평등하다. 내가 누군가를 고용했다 하더라도, 노동력을 산 것일 뿐 인격을 산 것이 아니다. 직제상 누군가의 위에 있더라도 신분이 위인 것은 아니다. 돈이 많거나 학벌이 좋은 것이 신분의 존귀함이 아니다. 내가 존엄하면 상대도 존엄하다. 약하다고, 돈 없다고, 못 배웠다고, 사람을 무시하면 안 된다. 이 원칙만 정확히 체득하면 민주공화국에 어울리는 리더가 될 수 있다.

백화점 등에서 서비스하는 점원을 대할 때도 이 원칙을 상기할 일이다. 나는 단지 대가를 주고 상품을 구매한 사람일 뿐이지, 상대의 인격을 산 것이 아니다. 인격적으로 점원과 나는 동등한 존재다. 이러한 기본만 지켜도, 갑질 논란의 대부분이 사라질 것이다. 사람들에게 화가 날 때, 드라마 속 인기 지도자라면 이런 순간에 어떤 방식으로 표출할 것인가를 상상해보는 것도 괜찮다. 이순신 장군이 아랫사람을 능멸하고 막말하며 화풀이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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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18-06-04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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