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김수정 기자] ‘정하여진 영역 또는 본디의 목적이나 길, 사상, 규범, 조직 따위로부터 빠져 벗어남.’ 사전 속 일탈의 정의다. 뭔가 거창한 탈선마냥 보이지만, 일상 속 작은 균열을 즐기는 정도의 일탈은 예상치 못한 삶의 즐거움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래서 제안한다. 일과 조직, 사회적 시선에 갇혀 자신도 모르는 새 체념하듯 삶을 견뎌내고 있는 중년들이여, 지금 당장 일탈하라.
[Big Story] 중년, 일상의 파열을 즐겨라
중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정체성에 혼란을 겪어보기 마련이다. 나는 누구이고,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가며, 과연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 건지 이런저런 고민들에 사로잡혀 잠 못 이룬 이들도 있을 터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중년의 위기(midlife crisis)’로 설명한다.

캐나다의 정신분석학자 엘리엇 자크가 1965년 주창한 개념으로, 여기서 중년은 사람이 삶의 유한성에 직면하면서 젊은 시절에 가질 수 있었던 꿈과 목표가 점차 사그라지는 시기라고 정의한다. 또한 사회적 역할 변화와 체력 쇠퇴, 죽음에 대한 자각, 미래에 대한 불안 등으로 인해 사춘기처럼 자아 혼란을 겪게 된다는 것.

최근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저성장 시대’, ‘100세 시대’ 등등 시대적 환경도 중년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명퇴(명예퇴직)는 기본이고, 반퇴(은퇴 후에도 경제적 이유로 다시 경제활동을 하는 것)라는 변수까지 나타난 현실은 그들의 숨을 옭아맨다. 집 장만 하느라 받은 대출금도 다 못 갚았고, 자식 공부에 결혼시키고, 노후도 준비하려면 아직 한참을 벌어도 부족한데 말이다. 문자 그대로 진퇴양난이다. 중년들의 시름이 짙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우리나라 중년들의 정신건강이 위기에 처했음을 알리는 징후는 다양한 지표에서 나타난다. 보건복지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조울증과 관련해 최근 5년간 심사 결정 자료를 분석한 결과, 전체 진료 인원 3명 중 1명 이상이 40~50대로 집계됐다. 전 연령대 중 가장 높은 비율로 중장년층의 자살률은 해마다 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2012년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발표한 근로자 정신건강 자료에 따르면, 45~54세 근로자의 정신질환 발병 건수는 직전 연령대인 35~44세와 비교할 때 무려 3.52배나 많았다. 이는 미국 1.54, 캐나다 1.19, 영국 1.16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치다.

따라서 중년의 위기가 닥쳐오면 열심히 살아온 인생에 대한 보상심리와 후회가 생겨나 일탈을 꿈꾸게 된다고 한다. 문제는 막상 일탈을 꿈꾸지만 정작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왜’ 일탈하려는지 진지한 고민이 없다 보니, 그저 한여름 밤의 꿈으로 치부하고 말거나 드라마, 영화 등을 통해 대리만족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실제로 중년의 외도를 담은 치정멜로나 버킷리스트를 앞세운 각종 여행예능 콘텐츠들이 대세로 떠오르고 있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중년 중심의 대중문화 콘텐츠들이 점점 늘어나는 데에는 우리 사회 중년의 자화상과 TV의 주 수요층이 변화한 것에 기인한다”며 “가령, 과거에는 중년 하면 자기 삶의 즐거움을 찾기보다는 가족을 위해 일하는 데에 주력했지만, 요즘은 기대수명이 늘어나면서 중년들도 젊은 세대 못지않게 인생을 다양하게 즐기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러면서 “인생을 즐기려는 중년들의 욕구와 함께 TV의 주 시청자가 1030세대에서 4060세대로 이전되면서 중장년을 타깃으로 한 프로그램이 늘어나고 있다”며 “콘텐츠의 다양성 면에서는 긍정적인 측면이 분명 있다. 단, 대중문화에서 그려지는 내용들 상당수가 현실과 괴리가 있다. 대리만족은 되겠지만 그것이 오롯이 중년의 일탈 욕구를 충족하기엔 한계가 있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현실적인 한계도 간과할 수 없다. 간혹 외국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비춰진 그들의 바캉스 문화는 여전히 우리의 그것과는 천지차이다. 해마다 해외로 떠나는 국내 여행객들은 늘어나지만 한 달가량 여유롭게 휴가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현재 아내와 2년째 스웨덴에서 거주 중인 이석원 여행전문기자는 “(내게) 한국에서 산다는 것은 일탈의 공간을 자신의 삶 안에 만드는 것조차 어렵다는 의미였다”며 “반면, 스웨덴을 비롯한 유럽의 중년들은 일탈도 일상의 연장으로 여긴다. 예컨대, 다니던 회사를 장기 휴직하고 아프리카로 봉사활동을 간다거나 오토바이로 시베리아를 건너 한국과 일본까지 여행을 하는 사람도 봤다. 국회의원을 하던 사람이 시베리아 횡단 골프 여행을 하는 등 이곳에선 일탈이 일상의 단면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런 일이 여전히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다. 사회 시스템이 그걸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며 “내 경우 40대 중반에 꿈꾸던 일탈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것이었는데 결국 실행하지 못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니까. 일상이 곧 일탈의 공간이 될 수 있는 스웨덴에 이민한 것이 내가 중년에 취한 가장 큰 일탈이 됐다”고 덧붙였다.


[Big Story] 중년, 일상의 파열을 즐겨라
대중문화 주역에서 소비 중심까지

그렇다면 과연 한국에서 중년을 위한 일탈은 어떤 것일까. 가수 자우림의 노래 ‘일탈’ 속 가사처럼 “할 일이 쌓였을 때 훌쩍 여행을/ 아파트 옥상에서 번지점프를/ 신도림역 안에서 스트립쇼를”이라도 하면 속이 후련해질까. 추억의 명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속 주인공들처럼 뜨겁게 로맨스를 경험하면 행복할까. 그것도 아니면 아마존, 산티아고 등 버킷리스트에 꾹꾹 적어 놓은 스펙터클한 여행기를 체험하는 건 즐거울까.

물론 이 물음에 대한 정답은 없다. 누구나 원하는 바가 다르듯 중년에게 ‘딱 이거다’라고 말할 일탈이란 건 애초에 없다. 다만, 심리전문가들은 중년들의 일탈이 ‘일상의 파괴’가 아닌 ‘생산적 변화’로 작용한다면 행복한 노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수순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진세 고려제일정신건강의학과 원장은 중년들에게 삶의 일탈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중년이 되면 누구나 마치 사춘기처럼 극심한 심리적 변화를 겪습니다. 자신이 지금껏 살아온 길을 반추하면서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 건가’라고 고민하죠. 직장에서는 승진의 갈림길로 두려워하고, 집에서는 가장으로서 점점 가족들로부터 멀어지는 시기라 외로움을 느껴요. 신체적으로도 쇠약해지면서 자신감도 줄어들고요. 따라서 이럴 때야말로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고 생산적 변화를 모색해야 해요.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노년의 행보가 달라지기 때문이죠. 그런 면에서 일상의 자극제로 일탈 혹은 변화가 중년에게 필요합니다. 거창할 것도 없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산책을 해보는 것도, 좋아하는 음악을 스트리밍이 아닌 공연을 보러 가는 것만으로도 큰 효과를 볼 수 있어요. 단, 지나치게 일상을 깨트리는 무모한 일탈은 지양하는 게 좋습니다. 일각에서는 그런 것들이 마치 힐링의 척도인양 조명되는데 생산적 변화는 늘 현실이 바탕이 돼야 해요. 큰 변화를 꿈꾼다면 충분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는 “중년의 일탈은 삶의 의외성에 귀를 기울이고, 일상의 가벼운 파열을 즐기는 것”이라며 “가령, 평소에는 해보지 않던 종교의 예배나 예불을 참여해본다든지, 절대 먹지 않던 음식에 도전해보거나 서먹했던 사람에게 친근하게 말을 건네고, 선호하지 않았던 장르의 음악회에도 가보는 등 새로운 삶의 공간을 발견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참고 문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진심>(삼성사회정신건강연구소 지음)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59호(2018년 08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