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성실은 항상 정답인가?
SPECIAL FORUM [한경 머니 =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발칙한 제목이다. 성실은 그 의미부터 정성스럽고 참되다는 뜻이다. 그러니 성실은 늘 정답일 수밖에 없다. 어떤 조건에 의해서 옳고 그름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옳은 의무다. 이마누엘 칸트가 말한 ‘정언명령(定言命令, categorical imperative)’까지는 안 되더라도, 그 바로 아래 반열에 오를 만한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성실이라는 지고지순한 가치에 반기를 드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성실한 것이 늘 정답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혹시 게으른 사람이 자기 합리화를 위해 꺼내는 궤변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사회적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퇴색한 성실의 의미

성실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말이지만, 사실 그 원래 의미가 제법 퇴색한 용어다. 성실(誠實)은 고금에서 널리 쓰이고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의 ‘세종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알타리의 추장이란 그 관하 사람에게 구혼하는 법인데, 이제 이쪽에 구혼해 왔으니 그 귀화의 성실 여부는 비록 알 길이 없으나….” - 세종 20년

만주에 살던 야인 동창이 조선인과의 혼인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즉, 여기서 성실이란 구혼하는 마음의 진실함을 말하는 것이다. 원래 성실은 일부러 잔꾀를 부리거나 거짓된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무조건 목표를 향해 매진하고 노력하는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성실은 후자의 어감이 더 강하다. 바람직한 근로자의 자질로 전용되고 있다. 땀을 흘리며 일하는 청년을 보고 ‘성실한 청년이로군’이라고 하거나, 일을 체계적으로 착착 진행하는 직원을 보고 ‘성실’하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마치 ‘일개미’ 같은 모습을 연상케 한다.

게다가 성실이 늘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사회적 믿음도 커지고 있다. 성실은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는 성품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면접장에서나 으레 하는 형식적인 말에 불과하다는 식이다. 요리조리 유연한 태도와 초지일관 성실한 태도를 반대의 개념으로 두기도 한다. 기존의 가치에 공손하게 순응하고, 케케묵은 질서를 추구하며, 자발적으로 많은 노력을 하면서도, 적은 보상에 기분 좋게 만족하는 사람이 돼야만 비로소 ‘성실’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성실이 아니라 바보다.

뒤끝과 성실

원래 성실은 좋은 도덕적 가치일 뿐 아니라 아주 유리한 진화적 전략이다. 우리는 타인을 식별하고, 타인의 관계에 대한 기억을 저장하는 독특한 인지적 모듈이 있다. 인간은 수천 명의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데, 믿을 만한 좋은 사람인지 혹은 조심해야 할 사람인지에 대한 기억은 그 사람의 이름에 대한 기억보다도 더 오래 남는다.

뒤통수에 위치한 뇌에는 타인의 얼굴을 식별, 구분하는 특화된 부분이 있다. 머리의 양 옆에는 그렇게 기억한 얼굴을 행동이나 감정과 연결해 저장하는 뇌가 있다. 인간은 누가 나에게 ‘성실’하게 행동했는지, 아니면 ‘불성실’하게 행동했는지 기억하도록 진화한 것이다. 과하게 말해서 ‘뒤끝’은 진화의 산물이다.

진화적 게임 이론에 의하면, 이는 협력을 낳은 가장 중요한 인지적 모듈이다. 사실 타인을 구분하지 못하고, 그의 행동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떤 협력도 일어날 수 없다. 말 그대로 호구가 되는 것이다. 즉, 정성스럽고 참된 성품으로서의 성실이라는 자질은 인간 사회에서 반드시 진화할 수밖에 없는 유리한 형질이다. 당장 계약을 하려 한다면 성실한 사람과 할까. 아니면 불성실한 사람과 할까. 답은 자명하다. 그런데 이렇게 바람직한 성실의 가치가 최근 급락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협력이 통하지 않는 사회

아마 우리는 모두 성실한 사람과 거래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니 오랜 세월이 지나면 인간은 모두 성실해질 것이다. 성실하지 않으면 발을 붙이기 어려우니 말이다. 하지만 오히려 불성실한 사람이 더 많아지고 있으며, 심지어 성실하던 사람도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옳은지’ 의문을 품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성실이라는 가치가 작동하기 위해서 필요한 선행조건이 있다. 바로 보복 가능성이다. 보복이라고 하니까 좀 무섭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협력을 거부하는 것’이다. 불성실한 사람이 협력을 요청했을 때, “예전에 네가 불성실했으니 협력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협력은 비협력보다 유리하기 때문에 잠재적인 보복 가능성은 사람들을 성실한 행동으로 이끄는 힘으로 작동한다.

그런데 어떤 외부요인에 의해서 이러한 보복 전략이 힘을 쓰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계속해서 거짓으로 속이는 전략이 유리해진다. 단기적으로는 기만 전략이 보다 유리하므로 성실은 열등 전략으로 전락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성실이나 노력과 같은 좋은 가치가 점점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바로 선순환의 고리가 막혀 버린 여건에서 비롯하는지도 모른다. 성실한 사람이 더 큰 보상을 받는 환경이라면 성실하게 살지 말라고 아무리 다그쳐도 모두 성실한 삶을 택할 것이다.
[SPECIAL] 성실은 항상 정답인가?
유통기한이 지난 성실?

성실이라는 가치는 이미 유효기간이 지난 것일까. 건강한 선순환의 흐름이 끝났기 때문에 이제는 성실을 집어 던지고 단기적 찬스를 노리는 것이 유리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 성실은 사회가 만들어낸 인위적인 도덕률도 아니고, 지배계층이 노동자에게 세뇌시킨 행동 지침도 아니다. 인간이 무리 생활을 시작한 이후 확고하게 자리 잡은 유전적 본성이자 심리적 모듈이다.

한국 사회에서 성실이라는 가치에 대한 회의감이 확산되는 이유는 아마도 보상 가능성에 대한 낮은 기대감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면서 노력에 비해 얻는 것이 적어졌고, 게다가 사회적 공정성이나 기회의 균등 등에 대한 실망감이 심해졌다. 하지만 이를 무조건 국가의 잘못이나 지도층의 무능으로 몰아붙이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갑과 을이 다른 사람이 아니듯 이런 사회를 만든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정성스럽고 참된’ 진정한 성실은 여전히 유효한 가치다. 이는 수학적으로도 증명할 수 있는데, 게임이론에 의하면 성실한 전략은 늘 우월한 전략이다. 협력 게임을 시뮬레이션하면, 협력하는 플레이어가 결국 승리하게 된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완벽하게 성실해지는 일은 없다. 너무 성실한 사람이 많으면, 일시적으로 불성실한 전략이 유리해지고, 불성실한 전략이 많아지면 다시 균형을 찾는 식으로 진행된다. 이를 어려운 말로 빈도의존성 선택이라고 한다. 하지만 성실은 늘 다수가 선택하는 우월한 전략이다.

여전히 성실은 정답이다

노력, 성실, 근면, 정직, 희생 등 협력적인 사회적 가치가 뭇사람의 조롱을 받는 시대다.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다. 이러다가 사회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냐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과거의 가치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주장도 한다. 노력이나 성실은 과거 농경사회에나 적합한 덕목이므로 현대사회에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엉뚱한 4차 산업혁명 시대나 인공지능(AI)을 들먹이기도 한다.

물론 모두 틀린 말이다. 일각의 사회적 유행을 보고 전체 사회의 정신이 바뀌고 있다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주장처럼, 사회적 믿음은 그 자체로 유동적인 실체가 아니라 모두 개인의 믿음과 생각에 기반해 구성된다.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게다가 협력적 가치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말도 옳지 않다. 지금까지 게으름과 나태나 기만, 이기주의가 지배적 가치인 사회는 단 한 건도 발견된 적이 없다. 전혀 불가능하다.

한국 사회에서 터져 나오는 대안적 가치에 대한 뜨거운 목소리는, 너무 획일적인 삶의 방식과 덕목을 일방적으로 강요받은 반작용인지도 모른다. 내적인 시행착오의 경험 없이 남만 따라하며 앞으로만 달린 것이다. 제법 그럴듯한 성취는 했지만, 어느 정도의 노력이 적당한지에 대한 축적된 경험이 없다. 무조건 극한의 노력만이 옳은 가치였다. 성실이 좋다는 것은 알겠지만, 누구에게, 어떻게 성실한 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한 경험도 부족하다. 잘못된 갑질을 용감하게 거부하는 행동은 성실일까, 아니면 불성실일까.

최근 일어나는 사회적 움직임은 분명 게으름을 추앙하고, 거짓된 행동을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는 그저 모범사원이나 모범시민, 모범생의 바람직한 가치로서의 미사여구로 전락해 버린 ‘성실’의 진짜 의미를 되찾으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무조건적인 근면과 복종, 순응, 노력이 아니라 진실로 자신과 세상에 정성스럽고 참된 태도를 취하는 성품 말이다. 비록 적지 않은 진통은 있겠지만, 곧 성실의 가치는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성실은 앞으로도 여전히 정답이다.
[SPECIAL] 성실은 항상 정답인가?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59호(2018년 08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