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CTURE 2 역사 속 리더

[한경 머니 =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역사의 매력은 사실의 기록과 전승 그 자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 속 이야기를 통해 현재 우리의 모습을 반추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를 관리하는 방법과 조직을 이끄는 리더들이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big story]조선판 탄핵 ‘반정’으로 돌아본 소통과 리더십
2017년 3월 우리 국민 모두는 대통령이 탄핵당하는 정치 현실을 경험했다. 대통령이 국민이나 참모들과 소통하지 않고, 비선 조직에만 의존할 때 얼마나 큰 혼란을 초래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필자는 대통령 탄핵 과정을 지켜보며 무엇보다 조선시대 왕의 리더십을 떠올렸다.

조선시대판 탄핵이라고 할 수 있는 두 번의 ‘반정(反正)’에 의해 왕위에서 축출된 왕 연산군과 광해군의 모습에서도 독재, 불통, 소수 측근 정치라는 키워드가 떠올랐다. 최근 조선 왕들에 대한 관심은 서적이나 영화, 드라마 등을 통해서도 상당히 표출됐지만,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상황 전개가 이루어진 현재의 정치 현실과 맞물리면서 조선시대 왕의 리더십에 대해서는 보다 통찰력 있는 분석이 요구되고 있다.

조선 왕의 리더십 유형
조선의 왕은 고대나 고려의 왕들에 비해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지는 못했다. 제도가 정비되면서 왕을 견제하는 장치도 적절히 운영됐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정치사에서 큰 축을 차지하는 왕권과 신권의 문제는 결국 왕권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행사하느냐에 따라 갈등의 양상을 보이기도 하고 조화를 이루기도 했다.
[big story]조선판 탄핵 ‘반정’으로 돌아본 소통과 리더십
세종과 같은 왕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뜻에 맞게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루었던 측면이 크다. 조선왕조는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크고 작은 변화를 경험했다. 크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과 같은 국가 간 전쟁에서부터 왕의 계승을 둘러싼 분쟁, 각종 역모 사건, 북벌(北伐)과 같이 시대적 소명으로 떠오른 난제들이 조선의 왕 앞에 닥쳐 왔다.

세종 시대에 추진된 공법(貢法)과 광해군 시대의 대동법, 영조 시대의 균역법, 정조 시대의 신해통공과 같이 역사의 획을 그은 각종 경제 정책들을 최종 결정하는 것도 왕의 몫이었다. 안정기에 국가 체제를 완성해 갔던 왕, 보수와 개혁의 갈림길에서 역사적 선택을 요구받았던 왕, 신하의 나라로 전락하는 조선을 지키기 위해 왕권을 유지하려 했던 왕, 전란의 소용돌이를 맞서거나 피해 가야 했던 왕 등. 이처럼 조선의 왕들은 안정기와 격동기를 막론하고 자신의 정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야 하는 위치에 서 있었다.

조선왕조는 500년 이상 장수한 왕조였고, 27명의 왕이 재위했다.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왕들을 체제의 정비가 요구되던 시기를 살기도 했고, 강력한 개혁이 요구되던 시기를 살기도 했다. 태종이나 세조처럼 집권의 정당성을 위해 강력한 왕권을 확립해야 했던 왕, 세종이나 성종처럼 체제와 문물의 정비에 총력을 쏟았던 왕이 있었고, 광해군이나 선조처럼 개혁이 시대적 요구가 되던 시대를 살아간 왕도 있었다. 선조와 같이 전란을 겪고 수습해야 했던 왕, 인조처럼 적장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왕, 원인은 달랐지만 부왕의 복수와 명예 회복을 위해 살아간 효종과 정조도 있었다.

최고의 왕과 최악의 왕
과학자, 예술가로서 보인 다재다능함과 더불어 신하들과의 소통에도 능했던 세종은 우리 역사 속 최고의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1443년 훈민정음 창제와 1446년 반포를 비롯해 애민사상의 발로에서 나온 <농사직설>, <향약집성방> 등의 농서와 의서 간행, 천재 과학자 장영실의 발탁과 해시계, 자격루, 혼천의 등 각종 과학기구 발명을 지휘한 왕도 세종이었다.

여기에 더해 박연으로 하여금 궁중 음악을 완성하게 하고, 김종서와 최윤덕으로 하여금 4군 6진을 개척해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경계가 이루어진 현재의 한반도 영토를 확정하는 등 세종이 완성한 찬란한 업적들은 나열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여기에 더해 세종은 ‘함께하는 정치’라는 리더십을 발휘한 왕이었다. 스스로가 출중한 능력의 소유자였음에도, 독단적으로 정국을 운영하지 않았다. 필요한 경우 백성들에게까지 의견을 구하고, 인재들을 불러 모아 이들이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나갔다. 1430년 공법이라는 토지 세법을 정할 때는 17만 명에 이르는 백성들에게 직접 의견을 물어보았으며, 재판에서 삼심제(三審制)를 정착시켰다.

관청에서 일하는 천민 여성들에게는 100일의 출산 휴가를 부여했으며, 남편에게는 30일간의 육아 휴직을 줄 정도로 인권과 복지에도 눈을 뜬 왕이었다. 천민 출신 과학자 장영실의 발탁이나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데 반대한 황희를 정계에 복귀시켜 최고의 재상으로 만들면서 소통과 포용 리더십의 모범을 보여줬다.

조선이 건국된 지 30여 년이 지난 세종 시대는 초기의 정치적 시행착오를 수습하고 왕과 신하가 함께 머리를 짜내며 조선이라는 나라를 안정시켜야 할 과제가 대두된 시기였다. 집현전은 세종의 인재 양성이 실현된 대표적인 공간이었다. 집현전은 세종의 지대한 관심 속에서 <향약집성방>, <삼강행실도>, <자치통감>, <국조오례의>, <역대병요>와 같이 의학, 역사, 의례, 국방 등 전 분야에 걸친 편찬 사업을 통해 학문과 문화의 꽃을 피웠다.

세종은 수시로 집현전을 방문해 학자들을 격려했으며, 최고의 특산물 귤을 하사해 사기를 높여주었다. 또한 집현전에서 장기 근무한 학자들을 배려해 사가독서(賜暇讀書), 즉 왕이 하사하는 휴가 제도를 실시했다. 심신이 지친 학자들에게 재충전의 기회를 준 것으로, 오늘날 기업이나 공공기관의 휴가 제도, 대학교의 연구년 제도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를 기준으로 하면 최악의 왕은 반정으로 축출된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big story]조선판 탄핵 ‘반정’으로 돌아본 소통과 리더십
연산군이 최악의 폭군임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광해군의 경우에는 초반의 개혁정책이나 오늘날 관점에서도 탁월한 외교 감각이 보이는 실리외교 등 긍정적인 리더십을 보인 측면도 많다. 그러나 두 왕 모두 축출되는 시점에서는 독재, 불통, 왕권에의 집착, 무리한 토목공사, 소수 측근 의존 등의 공통점이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연산군의 독재와 불통 정치는 <연산군일기>가 비록 과장된 점이 있다 하더라도 그 정도가 너무나 심했다. 한 해의 세금도 버거워하던 백성들에게 2, 3년 치의 세금을 미리 거두어들이는가 하면 노비와 전답에도 각종 명목을 붙여 세금을 부과해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 1504년 8월에는 금표(禁標)를 확대해 경기도 일원의 민가를 철거하라는 명을 내렸다.

연산군은 민가를 허물고 그 입구마다 금표비를 세워 백성들의 출입을 막고 자신만의 향락의 무대가 되는 사냥터를 넓혀 갔다. 자태가 고운 여자들을 전국 팔도에서 찾아내어 이들을 궁궐의 기녀로 차출했다. 채홍사(採紅使)로 칭해진 사람들이 기녀들의 선발에 나섰고 이때에 뽑힌 기녀들은 운평(運平), 가흥청(假興淸), 흥청(興淸)으로 불리었다.

“누각 아래에는 붉은 비단 장막을 치고서 흥청·운평 3천여 인을 모아 노니, 생황과 노랫소리가 비등하였다”는 기록이나, “그때 왕은 처용(處容) 가면을 얼굴에 걸고 대비 앞에서도 희롱하고 춤을 추었다”는 기록에서는 왕의 자질을 의심하게 한다.

당시 이를 조롱하고 비판하는 의미로 ‘흥청망청(興淸亡淸)’이라는 말을 민간에 유행시켰다.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오늘날까지 유행하는 것에서 역사의 잘못을 경계하는 의식은 수백 년을 넘어 지속됨을 알 수 있다. 워낙 독재군주였던 만큼 연산군 시대에는 엽기적인 형벌들이 개발되기도 했다. <연산군일기>에는 천장(穿掌)이라는 손바닥 뚫기, 몸을 지지는 낙신(烙訊), 가슴을 빠개는 착흉(剒胸), 뼈를 바르는 과골(剮骨), 손을 마디마디 자르는 촌참(寸斬)을 비롯해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는 쇄골표풍(碎骨飄風) 등 최악의 형벌을 자행했음이 나타난다.

궁중의 내관들에게는 ‘신언패(愼言牌)’라는 패쪽을 차고 다니게 했다. 신언패에 새긴 내용은 “입은 화의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간직하면 몸이 편안하여 어디서나 안전하리라”는 것으로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문구였다. 1506년에는 조정의 관리들에게 머리에 쓰는 사모(紗帽) 앞쪽엔 충(忠)자, 뒤쪽엔 성(誠)자를 새기게 했다.

사모 두 뿔은 어깨 위로 늘어지게 해 왕이 아랫사람을 통제하는 뜻을 보이게 했다. 신하들에게 늘 충성심을 품도록 사모에까지 충성이라는 글자를 새긴 것은 그만큼 연산군 스스로도 독재정치에 불안해했음을 볼 수가 있다. 고문 기술의 개발, 신언패, 충성 사모 해프닝 등 신하들과 불통하며 독재 군주의 전형을 보인 연산군은 1506년 9월 중종반정으로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조선 왕의 리더십을 통해 현재를 보다
조선의 왕들은 시대적으로 요구하는 바가 달랐고 각기 다른 배경 속에서 즉위했지만 성리학 이념으로 무장한 신하들과 학자, 그리고 왕의 통치력을 믿고 따르는 백성들과 함께 국가를 합리적으로 이끌어 갈 임무를 부여받았다. 왕들은 때로는 과감한 개혁정책을 선보였고, 때로는 왕권에 맞서는 신권에 대해 대응도 하고 조정자의 역할도 했다.

모두들 백성을 위한 정책을 추진한다고 했지만 대동법과 균역법처럼 시대의 요청에 부응해서 성공적인 평가를 받는 정책들도 있었고, 무리한 토목공사와 광해군 시대의 천도(遷都)처럼 실패한 정책들도 있었다.

체제의 안정, 변화와 개혁의 중심에 왕의 리더십이 있었고, 왕의 리더십은 국가의 성패를 가름하는 주요한 기준이었기에 왕으로 산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종이나 정조, 성종과 같은 성군(聖君)일수록 신하들과 함께 주요한 책들을 읽고, 이를 통해 정책을 토론하는 자리인 경연(經筵)을 활성화한 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자,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한다. 왕조 시대가 끝나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사회가 도래했다고는 하지만, 적절한 정책의 추진, 여론의 존중, 도덕과 청렴선, 소통과 포용의 리더십, 언론과 여론의 존중 등 전통사회 왕들에게 요구됐던 덕목들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판단된다. 조선시대 왕들이 보인 긍정적·부정적 리더십을 반면교사로 삼아 현재의 리더가 갖추어야 할 덕목들을 함께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왕의 리더십은 국가의 성패를 가름하는 주요한 기준이었기에 왕으로 산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성군일수록 신하들과 함께 주요한 책들을 읽고, 이를 통해 정책을 토론하는 자리인 경연을 활성화한 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신병주 교수는…
서울대 국사학과 및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주로 조선시대의 사상과 문화를 연구하고 있으며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건국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역사의 대중화에 깊은 관심을 가져 KBS <역사저널 그날>에 출연했고 <역사스페셜> EBS 역사 관련 프로그램의 자문을 맡았다. KBS 라디오 <글로벌 한국사, 그날 세계는>, EBS <신병주의 역사여행>를 진행했고, 남명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외교통상부 외규장각도서 자문포럼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저서로는 <왕으로 산다는 것>, <책으로 읽는 조선의 역사>, <글로벌 한국사 그날 세계는>, <이지함 평전>, <왕실 도서관 규장각에서 조선의 보물찾기>,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등이 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2호(2018년 11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