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기고=안계환 독서경영포럼 대표] 얼마 전까지 우리 사회에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인문학 강연이 갈수록 뜸해지고 있다. 인문학 관련 행사도 주춤하고 평생교육기관에서 진행하는 교육 프로그램에서도 인문학 강연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인문학이 우리의 미래’라며 사람들의 높은 관심을 받았던 것과는 확연히 대조적이다. 이대로 괜찮을까.
[big story] 기술 아닌 ‘사람’에서 답을 찾다
인문학이 외면을 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현대의 인문학이 그들이 원하는 ‘현실적인 답’을 제시해주지 못해서가 아닐까 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옛이야기, 그리고 과거 사상가들의 가르침이 실망감을 안겨준 것이다. 인문학에 대한 무관심은 ‘4차 산업혁명’이라는 시대적 담론도 영향을 미쳤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인터넷 속도와 스마트폰 보급률처럼 사람들의 관심도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4차 산업혁명으로 급속히 옮겨 갔다.

“인공지능(AI)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구글의 미래 예측에 사람들의 눈이 번쩍 뜨였고, 급기야 AI 지배론, 직업 종말론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한국인들이 유난히 미래지향적이라는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깨진 유리창 이론’의 연구로 잘 알려진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명예교수인 필립 짐바르도가 <타임 패러독스(Time Paradox)>에서 제시한 시간 연구에 따르면 한국인은 대부분 미래지향적 시간관을 갖고 있으며, 현실을 즐기고 안주하기보다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보하는 경향이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진짜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사회 변화에 대한 관심과 그에 대한 적절한 대비는 우리 모두의 당연한 책무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을 둘러싼 담론이 얼마나 유효한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인문학을 공허하게 보는 시각과 마찬가지로 그 누구도 AI 시대의 변화상을 명확히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일반인들은 그저 AI가 우리의 직업을 빼앗아 갈지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에만 함몰돼 있을 뿐이다.

‘자유 의지’로부터 시작되는 혁신
그럼 이제 4차 산업혁명의 실체를 들여다보자. 4차 산업혁명을 표현하는 핵심 키워드 중 하나는 바로 ‘개인화(personalization)’다. 전기와 화학 산업, 그리고 인터넷 산업에서 소비자 ‘개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 대량 생산 시대에는 생산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상품은 만들어지는 대로 대중에게 팔려 나갔다. 하지만 AI로 대표되는 미래에서는 개인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개개인의 기호와 특성을 제대로 파악해 맞춤형으로 생산 가능한 시대가 바로 4차 산업혁명 시대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자. ‘나(개인)는 누구인가’는 인문학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아니던가. 서양 철학의 원조인 소크라테스는 델포이 신전의 낙서였다는 ‘너 자신을 알라’를 통해 지혜를 추구하는 인간을 강조했다. 동양에서는 자기 수양을 통해 참인간이 되는 방법들을 제시했다. 공자는 ‘군자(君子)’가 되라고 말했고 맹자는 ‘성인(聖人)’이 되는 길을 열었다. 신비로운 철학자인 장자는 ‘진인(眞人)’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했다. 불교에서는 여기에 ‘각자(覺子)’, 즉 깨달음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처럼 동서양 사상가들이 말하는 참 인간되기는 ‘나’로부터 출발해 깨달음을 얻고 세상에서 제 역할을 하는 지혜로운 인간 되기다.

개인화의 다음 단계는 무엇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화(liberal)’ 내지는 스스로의 생각이 정립되는 ‘자유 의지’다. 자유 의지를 가진 이는 누군가의 생각에 속박당하지 않으면서 스스로의 생각을 갖고 실천하는 자유인이다. 경제적 측면에 적용하면 광고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제품을 사는 소비자다. 주변인에게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의 결정으로 투표하는 민주 시민, 강점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사업을 하는 비즈니스맨, 가이드의 깃발을 따라가는 단체여행객이 아니라 구글 내비게이션을 켜고 스스로 숙소를 찾는 배낭 여행자도 마찬가지다.

이 또한 인문학이 추구하는 가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인문학을 영어로 쓰면 ‘리버럴 아츠(liberal arts)’라고 하는데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자유기술(自由技術)이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전통적인 교육 과정과 중세 유럽의 일반교양 과목을 이렇게 불렀다. 중세시대에는 문법, 수사학, 변증법, 산술, 기하, 음악, 천문의 7개 과목이어서 흔히 ‘자유7과’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이는 당시 자유민이 배우던 교양의 전부였다. 자유민이 되려면 최소한 이 정도는 학습을 해야 한다고 정의된 과목들이었다. 서양 인문학의 발상지 그리스와 로마는 자유민과 노예로 구성된 사회였다. 그들 사회에서 자유인에게 요구되던 기본 덕성을 키우기 위한 교양교육으로 인문학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실질적 일들을 담당했던 노예에게 리버럴 아츠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big story] 기술 아닌 ‘사람’에서 답을 찾다
‘사람’ 중심의 신산업만 생존 가능
오늘날에는 신분 계층의 차이가 없기에 누구나 리버럴 아츠에 접근할 수 있다. 누구나 자유 교양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다는 이야기다. 또한 리버럴 아츠에 포함할 수 있는 과목들이 훨씬 다양하고 범위가 넓어졌다. 흔히 인문학을 한자로 하면 문사철(文士哲)이라고도 하지만 이는 지나친 범위 축소다. 동양에서는 역사학이 가장 중요했고 여기에 문학과 사상이 얹혀 있었다. 21세기의 리버럴 아츠는 실용기술을 제외하고는 자유인에게 교양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 하지만 21세기 사람들 모두가 리버럴 아츠를 공부하고 자유인이 되고 있는 건 아니다.

오늘날 유행처럼 번졌던 4차 산업혁명 담론에서 보면 특히 그렇다. 그 속성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남들이 말하는 대로 휩쓸리고 있지는 않은가. 구글이 주최해 온 나라를 들썩이게 했던 ‘세기의 바둑 대결’을 쇼(show)라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비즈니스 현장에서도 비슷한 일은 반복된다. 카페 사업이 잘된다고 하니 엄청나게 많은 이들이 몰렸고,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이 뜬다고 하니 임대료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결국 전문성 없는 카페는 속절없이 문을 닫았고 가로수길은 기존 명성이 훼손된 채 특색을 잃어가고 있다. 남 따라 하기 바쁜 사람들은 비싼 수업료를 지불할 수밖에 없다.

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신산업도 마찬가지다. 많은 이들이 3D프린팅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말한 지도 5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에 많은 기업들이 실패를 경험했다. 사람이 아닌 기술에만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다. 결국 세상을 바꾸는 주체는 사람이고, 사람들이 선택하고 허용해야 기술이 빛을 발하게 된다. 최근 자율주행자동차를 설계하고 구축하는 과정에서 철학자를 참여시키는 것도 이런 변화의 중요한 흐름이다. 자율주행차가 주행 중 불법 횡단하는 젊은 남자를 만났고, 그를 피해야 하는데 우측에 여자 노인 한 명이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명령을 내려 둬야 할까.

AI의 직업 대체 기준도 관심거리다. 조직의 경제적 이익을 우선으로 해야 할지, 아니면 노조의 요구를 먼저 수용할 것인지 등 이 모든 사안들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가치관에 따라서 우선순위가 결정되고 방향이 정해지기 마련이다. 바로 자유인들이 가진 생각들이 토론의 과정을 거치고 사회적 합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 시대의 모든 자유인이라면 확고한 자기주관과 사회적 덕성을 갖춰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자유인의 덕성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은 고전(古典) 리딩을 인문학의 주요 방법론으로 제시해 왔다.

여러 강연에서도 인문고전 이야기를 하고 근대문학을 읽어야 서양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다고 언급해 왔다. 하지만 <사마천>과 <헤로도토스>를 읽어야만 동서양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교과서에 존재했던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은 오늘날에는 더 많이 변화된 자본주의를 만나고 있다. 개인이 지식을 습득하는 통로는 종이신문과 책 외에도 아주 다양해졌다. 여행을 떠날 때 과거에는 그 나라의 여행 안내서를 읽었지만, 지금은 다른 여행자들의 블로그를 참고하고 애플리케이션으로 마련된 정보를 참조하는 시대다.

자유 교양인이 되는 방법도 더 개인화되고 다양해졌다. 인문학 역시도 각자의 방법으로 익히고 때론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인문학은 옛 성현의 책 속에만 있지 않다. 이슬람의 흔적이 남아 있는 스페인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에도, 한쪽 귀를 잘라낸 반 고흐의 그림에도 있다. 책 읽기를 즐겨하는 이는 책을 통해 지식과 지혜를 얻고, 여행을 좋아하는 이는 여행에서 자신을 찾고 자유를 얻으면 된다. 뮤지컬을 즐기고 미술품에 빠져보는 것도 자유 교양인이 되는 효과적인 방법들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답은 다양한 곳에 존재한다. 과거를 읽고 현재를 찾으며 미래를 꿈꾸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에게 투자하는 인문학의 본질이다.

안계환 대표는…
경영과 역사를 접목한 책을 쓰는 작가이며 독서경영 컨설턴트, 직장인 독서 모임 <독서경영포럼>의 대표다. 네이버에 <인류문명연구소>라는 이름의 인기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과거 엔지니어에서 벤처기업 경영자로 변신하기도 했으며, 이후 마케팅 교수와 경영 컨설턴트를 거쳤다. 현재는 세계 역사의 현장답사 활동을 통해 책에서 읽는 내용을 확인하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조직에 독서경영 방법론을 전파하는 일도 병행한다. 직장인 독서토론 모임인 ‘독서경영포럼’을 창립해 7년째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는 <독서경영의 힘>, <성공하는 사람들의 독서습관>, <마흔에 배우는 독서지략>, <변화혁신, 역사에서 길을 찾다>, <안계환의 인문병법>, <중국 핵심 강의> 등이 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4호(2019년 01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