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김수정 기자]바야흐로 결핍의 시대다. 경제적 빈곤을 넘어 정서적 결핍이 우리 사회를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다. 과연, 지금 이 시대에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big story]결핍 시대, 다시 사랑에게 길을 묻다
사람들은 종종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의 가치를 잊고 살 때가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대개는 그것이 너무 쉽게 주어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가령, 물과 공기가 그렇다. 예로부터 한국인들은 깨끗한 물과 공기가 영원불멸 ‘주어질 것’으로 여겼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물을 사 먹는 건 사치에 가까웠고, 미세먼지라는 용어는 <먼나라 이웃나라>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든 외계어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물을 사 먹는 건 특정 계층의 기호가 아닌 모두에게 ‘흔한 일’이 돼 버렸고, ‘삼한사미(3일 춥고 4일 미세먼지)’ 공포에 전전긍긍하는 세상이 됐다. 소를 잃고 나서야 우리는 그것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비로소 통감하고, 회복하려는 ‘의지’를 보이기 시작했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의 위대함에 대해 이견을 낼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우울과 불안, 분노와 무관심, 자살 등등 수년째 한국을 관통하는 키워드마다 사랑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다이내믹 코리아란 감투 속에 벌어지는 잔혹한 무한경쟁과 양극단의 시대에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사랑보다는 냉대를, 배려와 이해보다는 비난과 혐오를 서슴지 않고 분출한다. 그 지표는 이미 우리 사회 곳곳에서 도출되고 있다.

한국의 성인 약 5명 중 1명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불행하고 미래에도 불행할 것이다”고 생각하는 ‘행복취약층’인 것으로 파악됐다. 10명 중 7명은 “자칫하면 하층으로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3명 중 1명은 “일류 직장에서 시작하지 못하면 평생 꼬인다”고 보는 등 사회 시스템과 사회 이동성에 대해 큰 불안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보건복지포럼’ 11월호에 실린 ‘한국인의 행복과 행복 요인’(이용수 한국개발연구원 경제정보센터 자료개발실장)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성인의 20.2%는 ‘현재 불행하며 과거에 비교해 나아지지 않았고 미래도 희망적이지 않다’고 느끼는 것으로 조사됐다.
‘과거보다 나아졌으나 현재 불행하고 미래도 희망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2.4%로, 성인의 22.4%는 ‘희망취약층’으로 분류됐다.
[big story]결핍 시대, 다시 사랑에게 길을 묻다
2018년 유엔의 ‘세계행복보고서(World Happiness Report)’에 따르면 한국의 행복지수는 5.875점으로 국가별 비교 순위로는 157개국 중 57위였다. 국민이 느끼는 행복의 격차를 알아보는 ‘행복불평등도’는 한국이 2.155점으로 157개국 중 96위였다.

뿐만 아니다. 15년 연속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와 함께 분노사회의 위험도 나날이 가중되고 있다. 지난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보건의료 빅데이터에 따르면 ‘습관 및 충동장애’로 진료를 받은 사람은 2015년 5390명, 2016년 5920명, 2017년 5986명으로 늘어났다.

분노를 넘어 혐오의 정서도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여혐 vs 남혐’ 논쟁부터 세대 갈등과 노인 혐오, 난민 문제로 촉발된 인종 혐오 등등 수많은 혐오의 정서가 우리 사회 내 사랑의 결핍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다. 지금 우리가 다시 사랑을 써야 하는 이유다.

사랑의 요체는 행동 의지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사랑하라는 것일까. 사회, 경제적 압박으로 인해 포기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은 엔(N)포 세대에겐 사랑은 ‘배부른 타령’으로만 들리고, 사랑도 이별도 해볼 만큼 해봤다는 중년들에겐 ‘덧없는 염불’처럼 느껴질 뿐이다.

하지만 사랑이란 개념을 단지 추상적인 것, 혹은 특정한 대상을 향한 것으로 한정하지 않는다면 사랑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실제로 사랑을 연구한 학자들 상당수가 사랑애 대해 ‘한순간의 정열’이나 ‘특정한 경험’으로 정의하기보다는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행동’으로 설명한다.
[big story]결핍 시대, 다시 사랑에게 길을 묻다
세계적인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거듭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의지가 담긴 행동’이라고 주장하며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감정적으로 굉장히 끌린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결정이고, 판단이며, 또한 하나의 약속이다. 사랑이 단지 감정일 뿐이라면 서로 영원히 사랑하자는 맹세는 아무런 근거나 토대가 없는 공허한 것이 돼 버린다. 왜냐하면 감정이란 왔다가도 언제든지 떠나갈 수 있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즉, 사랑은 막연한 이상이 아닌 살아가면서 자신이 선택하고, 실천해야 하는 삶의 양식인 셈이다. 가령, 대중교통에서 임산부나 노약자 등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거나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고, 가족들에게 전화로 안부를 묻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사랑은 표현되고, 힘을 발휘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다양한 사랑의 모양, 적극 수용해야
동시에 사랑은 개인의 선택이기에 그 형태의 ‘다양성’도 담보돼야 한다. 실제로 현대인들에게 사랑의 방식은 날로 다양해지고 있다. 나를 사랑하는 ‘포미족’, 동물을 사랑하는 ‘반려인’의 증가는 물론이고, 대중문화에서도 사람이 아닌 로봇이나 도깨비와의 사랑까지도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따라서 관련 사업 아이템이나 문화 콘텐츠들의 증가도 눈에 띄게 늘어나는 양상이다.

가족의 개념도 달라지고 있다. 이혼, 졸혼, 비혼, 재혼 등등 결혼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행동양식이 변하면서 가족애에 대한 관념도 새롭게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수단이 본질을 앞서지 못하듯 사랑의 모양이 바뀌어도 그 본질은 같다. 애정과 배려, 존중, 책임감, 신뢰, 그리고 지키려는 의지만 있다면 사랑은 언제든 회복될 수 있다. 강학중 가족경영연구소장은 사랑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사랑이란 다양한 감정의 결합 같아요. 부부 간에도 뜨거운 열정은 2~3년 이상 지속되기 어렵지만, 살면서 우정도 쌓고, 의리도 더하고, 때론 어떤 사안에 대해 밀고 당기며 조율도 하고, 배려심도 배우고, 의지하면서 사랑을 만들어 가는 것 같아요. 그게 사랑의 본질이자 그런 마음들이 모여야만 우리 사회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5호(2019년 02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