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문현선 문화콘텐츠 비평가] 살아가는 데 정작 필요한 것을 배우지 못한 이들에 대한 위안, TV가 다시 우리에게 손을 내민다.
[big story] 사유하는 콘텐츠, 아는 것이 힘이다
부모님은 그것은 바보상자라고 불렀다. 어릴 적부터 들여다보고 있으면 바보가 된다고, 보면 안 된다는 말도 자주 들었다.

하지만 원래 ‘바보상자’는 기술력의 부족으로 부족한 콘텐츠밖에 보여주지 못했던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니까 TV 말이다. 사실 이런 평가를 들어 온 것은 TV만은 아니다. TV, 컴퓨터, 스마트폰 등 유력한 미디어들은 모두 그런 혐의를 받아 왔다.

심지어 하루에 3시간 이상 TV를 보는 사람들은 보다 적극적인 신체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 비해 치매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하고, 디지털 기기에 대한 의존이 기억력 저하를 일으킬 뿐 아니라 전자파로 인한 물리적인 뇌 손상 위험까지 동반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런데 줄곧 그렇게 저평가되던 미디어 콘텐츠들이 달라지고 있다. 미디어에 의존하는 대중의 시대가 벌써 한 세기를 넘어섰으니, 콘텐츠들도 그에 걸맞게 진화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알쓸신잡>, <차이나는 클라스>, <방구석 1열>, <선을 넘는 녀석들>, <어쩌다 어른> 등 잘나가는 교양 프로그램들을 시청하노라면 내가 지금 바보상자를 들여다보고 있는 건지, 아니면 대학 강의실에 앉아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압도적인 지식과 정보량이 흘러넘치는 이 콘텐츠들은 수업이 있는 주중에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불태워야 하는 금요일과 주말의 황금시간대에도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왜 사람들은 바보상자를 들여다보며 똑똑해지기를 바라는 걸까.

바보상자의 변신? 또는 진화

음악밖에 모르는 바보를 자처하며 출연자 중 가장 ‘평범한’ 일반인 코스프레를 능숙하게 해내는 메인 MC, 세상에 모르는 게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전방위적 지식과 정보량을 뽐내는 잡학박사, 종종 생활에서의 미숙함을 드러내 오히려 전문가임을 증명하는 미식박사, 문학박사, 과학박사, 건축박사, 도시박사 등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수다를 떤다.

그들의 대화 속에서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일상의 순간마저 아카데믹한 강의로 변모한다. 그들의 언어는 마치 신비한 마법사의 지팡이 같다. 엑스펠리아르무스!

시청자는 1시간을 훌쩍 뛰어넘는 이 끝날 줄 모르는 대화를 홀린 듯 바라본다, 바보처럼.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줄임말로 <알쓸신잡> 바로 그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의 포맷은 ‘여행’과 ‘지적 대화’를 연결해 ‘아는 것 많은’ 출연자들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는 것이다.

첫 시즌 때는 방영 시작 한 달 만에 ‘한국인이 사랑하는 프로그램 3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고, 프로그램 중 출연자들이 언급한 책은 급격한 판매신장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영향력을 따진다면 시청률이 몇 배나 되는 인기 드라마에 필적한다.

<알쓸신잡>만이 아니다. 여행 프로그램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역사 공부를 강요하는 <선을 넘는 녀석들>, 영화를 보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대중문화사와 관련된 온갖 지식들에 대한 습득 의무를 자극하는 <방구석 1열>, 모르는 것을 모르는 채 남겨 두고 살아가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리게 만드는 <차이나는 클라스>, 제대로 어른 노릇을 하려면 지금부터라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는 <어쩌다 어른> 등.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참담하게 무너지고 있는 대한민국 공교육의 현실 앞에서 미디어 콘텐츠들은 마치 이 ‘위기’를 절호의 ‘기회’로 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다가 TV 방송국은 우리에게 필요한 거의 모든 지식을 전해주는 교실이 됐을까.
[big story] 사유하는 콘텐츠, 아는 것이 힘이다
TV는 바보상자의 효시로 손꼽힌다. 1936년 영국의 BBC가 첫 방송을 시작한 이래 지식인들은 줄곧 이 새로운 미디어를 미심쩍은 눈초리로 견제해 왔다.

대부분 국가에서 TV는 약화되는 교육 체계의 영향력과 문란해지는 사회 풍속, 점점 더 통제가 불가능해지고 있는 청소년 문제의 원흉으로 지목됐다. 대한민국에서 TV 방송이 처음 시도된 것은 1956년이다.

그러나 TV가 사람들의 일상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였다. 방송과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정치 상황 속에서 TV가 사로잡은 것은 양식을 갖춘 ‘어른’들이 아니라 언제나 쉽게 새로움에 매료되는 ‘아이’들이었다.

어른들은 스스로 사고하게 만드는 ‘책’을 읽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보고 듣게 만드는 ‘TV’를 보는 아이들을 나무랐다. 그러나 진정으로 새로운 미디어에 속하는 세대는 원래 발명가들이 아니라 그들의 자녀다. 일하는 사람은 보통 그 ‘업무’를 가지고 ‘놀지’ 못한다.

그러므로 설명서에 쓰인 목적과 용도 이상의 것을 발견하기 힘들다. 가지고 노는 세대야말로 그 미디어의 진짜 주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대한민국의 중년은 TV 세대다. 유치원에 다니지 않은 중년은 있어도 TV를 보지 않고 자란 중년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들의 유년은 TV에 점령됐다. 그들은 TV 광고를 통해 세상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받아들였다.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유년의 시공간에서 배우는 것이라면, 오늘날 대한민국 중년은 아주 많은 것을 TV라는 ‘유치원’을 통해 배웠을 것이다. 비록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2개의 채널뿐이었고, 방송 시간에는 제한이 있었을 뿐 아니라 채널과 프로그램의 결정권은 가장의 권위에 달려 있었을지라도.

“인생의 지혜는 상아탑 꼭대기가 아닌 유치원의 모래성 속에 있다”라고 주장하는 로버트 풀검의 저서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출간되자마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수

능이 대한민국의 입시 제도로 정착된 지 10년쯤 됐을 무렵이다. 이 책의 존재는 대학과 입시가 생애 최고의 목표였을 대한민국 수험생들과 그들의 부모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충격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시합이 시작되기도 전에 출전 자격을 박탈당한 선수처럼 “내가 아는 게 별로 없는 건 유치원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자조적으로 이죽대기도 했다.

그러나 삶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지혜는 결국 유년기에 습득된다는 이 책의 주지에 반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심지어 10여 년이 지난 뒤에도 재출간될 만큼 저자의 주장은 충분한 호소력을 지닌다. 그러니 오늘날 대한민국 중년에게 TV는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가르쳐준 중요한 교재이자 학습 도구인 셈이다.

우리는 플랑크톤의 일종인 클로렐라가 달걀이나 우유와 마찬가지로 완전식품이라는 사실도 TV에서 배웠고(클로렐라라면 광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행복한 결혼 생활의 전제라는 사실도 TV에서 배웠으며(한국형 멜로드라마의 서사 구조), 왕조사와 민중사의 구별법과 역사 발전의 법칙도 TV에서 배웠다(정통 사극과 팩션 장르의 진화). 그러고 보니 입시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쳐준 것도 TV였다(EBS 교육방송).

그러므로 학교에서 배운 지식과 정보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충분하지 않은 사실을 깨달았을 때, 가장 먼저 손을 내밀게 되는 구원의 대상이 TV가 되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TV 세대 중년에게 다시 내민 손

“질문은 모든 새로운 것의 시작. 기본적인 질문조차 허하지 않는 불통의 시대. 궁금한 것에 대해 묻지 못했고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아무것도 몰랐기에 우리의 삶이 무너져 가는 것도 몰랐다. 이제 우리의 교양을 위한 질문이 아닌 생존을 위한 질문을 던진다.” 앞에서 언급했던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는 관련 정보에서 이와 같은 기획 의도를 밝혔다.

이 프로그램은 ‘앎’과 ‘질문’이 ‘생존’을 위한 것임을 확인시켜준다. 이 콘텐츠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결국 ‘생존’의 문제를 의식하고 있는 셈이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알고자 한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들은 학교에서 모두 가르쳐주지 않았던가.

아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은 당시에 필요한 것들이었을 뿐이다. 세상은 무척이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으며, 사회구성원은 변화하는 삶의 조건들에 따라 재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 교과서에도 다 나와 있는 말이다. ‘사회구성원의 재교육.’

그러나 학교나 회사와 같은 기관에서 가르치는 것은 해당 사회의 존속을 위한 정보와 지식뿐이다. 개인적인 삶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개개인의 몫이 아닐 수 없다. 개인의 차원에서 오늘날의 중년을 가르친 것은 TV였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TV 앞으로 다시 돌아간다.

불타는 금요일을 클럽에서 보내기에는 이제 조금 피곤한 나이가 돼 버린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편한 차림으로 좋아하는 맥주 한 캔을 들고 <방구석 1열>을 볼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을 이끌어 가는 것은 그들과 청춘을 함께 한 감미로운 노래를 들려준 그 사람이다. 더 이상 멋지게 보이려고 애쓰지 않는 동시대의 스타는 함께 늙어 가는 친구처럼 보인다.

그 친구에게는 열심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구박을 받으면서도 씩씩하고 싹싹하게 곁을 지키는 후배가 있다(나한테는 비록 없을지 모르지만 왠지 덩달아 뿌듯하다. 혹은 내게도 그런 후배가 있다는 사실이 기억나 흐뭇해질 수도 있겠다).

일주일에 한 번씩 그의 휴대전화 주소록에 있다는 얼굴을 알 만한 혹은 이름을 들어봤 을 법한 유명인사들이 새로운 영화와 함께 찾아온다(가끔은 지나치게 노골적인 광고로 보여서 다소 맘이 상할 수 있지만, 돈을 주고 리뷰를 찾아 볼 때도 있으니 그 또한 나쁘지 않은 덤이라 여긴다).

그들이 들려주는 영화계의 뒷이야기, 영화 너머의 정치, 사회, 경제, 역사, 문화의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모르는데 알게 돼서 즐겁기도 하고 아는 얘기인데 유명한 사람도 알아서 더 기쁘기도 하다. 그들의 대화를 따라 종횡으로 내달리다 보면 내가 알고 있었던 산산이 부서진 정보의 조각들이 제법 그럴듯해 보이는 지적 자산으로 거듭난 것만 같다.

어쩐지 내일은 좀 더 많은 사람들도 불편 없는 대화가 가능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금요일을 하얗게 불태우지 않고도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은 이렇게 채워진다. 좋지 아니한가!

◆문현선 비평가는…

세종대 소프트웨어융합대학 초빙교수이자 인문연구모임 문이원 연구원이다. 이야기 공작소 파수(破守)의 스토리텔러이자 캐릭터 프로파일러로도 활동한다. 세상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을 이해하는 모든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문턱이 낮은 인문학’을 향한 모험을 즐기고 있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과 정보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충분하지 않은 사실을 깨달았을 때, 가장 먼저 손을 내밀게 되는 구원의 대상이 TV가 되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7호(2019년 04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