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페루대사 부부 인터뷰

[한경 머니 = 김수정 기자]“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처럼 행복한 가정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가족구성원 간 격 없는 ‘대화’가 이뤄진다는 것이다. 다울 헤수스 엔리케 마투테 메히아(Daul Jesus Enrique Matute Mejia) 주한 페루대사와 부인 마리아 가브리엘라 블랑코 코레아(María Gabriela Blanco Correa) 여사는 그 점을 정확히 꿰뚫고, 실천하고 있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사진 이승재 기자
[big story]“해외 생활 어려움, 허물 없는 대화로 풀었죠”
페루 하면 역시 마추픽추(Machu Picchu)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장구한 세월 동안 세속과 격리돼 유유자적함을 고이 간직한 신비한 마추픽추는 여행자들의 성지 중 하나로 꼽혀 왔다. 안데스산맥의 해발 2430m에 위치한 마추픽추는 도시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려진 바가 없다고 한다. 더 궁금한 건 그곳에서 삶을 지켜 온 사람들의 모습이다.

마추픽추 사람들은 어떻게 생존할 수 있었을까. 또한 과연 그들에게 가족이란 어떤 존재이자 의미일까. 이 궁금증에 가장 근접한 답을 알고 있을 것 같은 두 사람을 만났다. 바로 다울 헤수스 엔리케 마투테 메히아 주한 페루대사와 부인 마리아 가브리엘라 블랑코 코레아 여사다.

지난해 주한 페루대사로 임명된 메히아 대사는 부인과 함께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페루대사관저에서 1년 넘게 반려견 쿠스코와 거주하고 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딸 다니엘라(23), 알렉산드라(22)와 아들 세바스티안(18)은 현재 미국 워싱턴에서 함께 거주하며 공부 중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부가 자녀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는 1년에 2번 정도인 상황이라고.

하지만 물리적인 거리는 가족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 듯 보였다. 매일 스마트폰으로 전화나 페이스타임을 하는 것은 물론, 마치 곁에 사는 것처럼 메신저로 대화가 자주 이어졌다. 실제로 이날 인터뷰 중에도 두 딸에게서 영상통화가 오자 부부는 아이처럼 즐거워하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다.

하지만 메히아 대사 가족의 이 같은 행복도 처음부터 ‘당연하게’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누구나 태어나자마자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니듯, 두 사람도 자녀들을 양육하면서 많은 시행착오들을 겪었다고 털어 놨다. 드라마틱했던 부부의 첫 만남부터 오랜 외교관 생활로 인해 겪어야 했던 자녀들과의 마찰들, 그리고 그 터널을 지나 이제는 온 가족이 사랑과 믿음으로 더 단단하게 결속돼 행복하다는 이 가족만의 ‘가화만사성’을 들어봤다. 더불어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페루 사람들의 가족관과 행복에 대해서도 살짝 엿들을 수 있었다.

지난해 주한 페루대사로 임명된 지 벌써 만 1년이 넘었네요. 처음 발령받았을 때 어땠나요.
코레아 여사(이하 여사) 아시아 국가에 (업무적으로) 온 것은 일본 다음으로 한국이 유일해서 오기 전부터 기대가 컸습니다. 모든 나라가 그렇듯, 한국만의 특징과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궁금했고요. 동시에 한국에 온다는 것 자체가 저희 가족에게도 새로운 도전이자, 시작이었죠.

메히아 대사(이하 대사) 페루 대통령께서 저를 주한 페루대사로 임명하셨을 때 정말 기뻤고, 기대가 됐습니다. 왜냐하면 한국과 페루는 형제국이라고 할 만큼 우호관계가 깊기 때문이죠. 실제로 한국은 페루의 3~4번째 수출국으로 페루에는 중요한 나라입니다. 또한 한국은 수많은 선진 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국민들의 교육수준도 높은 나라인 만큼 앞으로 양국이 경제, 무역, 금융 부분에 있어서도 다양한 공동 연구와 과제를 함께 수행할 수 있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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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얘길 하기 전에 두 분의 첫 만남 이야기부터 듣고 싶은데요.
여사
1994년 워싱턴의 한 파티 자리에서 처음 만났어요. 그때 제가 워싱턴에 살고 있었고, 남편도 총영사로서 워싱턴에서 근무할 때였죠. 남편을 만난 건 저희 어머니의 전 남편 소개를 통해서였죠. 그분도 페루 사람이셨거든요.

대사 제가 재밌는 얘기하나 해드릴게요.(웃음) 장모님의 전 남편 분은 페루 출신의 의사셨는데 좋은 일들을 많이 하셨어요. 미국에 거주하는 페루 사람들을 돕기도 하시고, 페루에도 다양한 장비들이나 기술적인 지원을 하셨죠. 그래서 미국 워싱턴에 제가 총영사로 부임했을 때 그분을 직접 식사자리에 초대했어요. 쿠스코라는 식당이었는데 사람들이 음식을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레스토랑 가운데서 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그때 그분이 저한테 다가오시더니 ‘지금 막 우리 딸들이 도착했는데 그중 한 사람과 춤 한 번 추지 않겠냐’고 제안하시더라고요. 사실 청년시절 저는 숫기가 없어서 (이성에겐) 말을 잘 못 꺼내던 편이었거든요. 아무튼 춤을 추라고 하시니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서 따님들이 있는 곳으로 갔는데 똑같이 생긴 여자 두 분이 서 있었죠. 쌍둥이였던 겁니다. 그래서 불쑥 한 분에게 춤을 추자고 제안했는데 ‘난 약혼자가 있다’며 단번에 거절했어요. 소심하게 다시 자리로 돌아왔죠. 그때 그 의사분이 왜 돌아왔냐고 물으셔서 자초지정을 설명하고, 시간이 좀 흘렀을까. 거절하셨던 분과 꼭 닮은 여자분이 제게 오더니 ‘어, 난 춤 출 수 있는데, 혹시 나랑 같이 춤출래요?’라고 말했죠.(웃음) 지금의 제 아내입니다. 이렇게 25년 전 만나 1년 반 정도 연애하고 줄곧 함께 살고 있습니다.

페루의 가족 문화는 어떤가요.
대사 전반적으로 한국과 비슷합니다. 가족들이 함께 뭉쳐서 지내는 편이에요. 여전히 대가족 형태가 많고, 부모나 조부모에 대한 존경심이 큽니다. 다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페루는 크게 해안 지역, 산악 지역, 밀림 지역 등 3가지 지형으로 나뉘어 있어서 각 지역마다 특성이 좀 달라요. 밀림 지역은 정글이다 보니 항상 위험 요소가 도사리죠. 특히, 아마존 유역에는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해서 사람들은 그것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조심하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가족으로부터 배워요. 그들은 대개 항상 뭉쳐 삽니다. 그래야 그곳에서 생존할 수 있으니까요. 산악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좀 달라요. 페루에는 고산지대가 많은데, 최대 해발 6800m까지 산악지대가 있어요. 각 층마다 특성이 다 다르고요. 대부분이 농작 지역이라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가족들이 모여 살면서 농사와 가축 키우는 것을 배워요. 마지막으로 저는 주로 해안 지역에서 살았는데, 해안가에서 물고기를 잡거나 하면 함께 나눠 먹는 풍습들이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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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 저는 (가족 이민으로) 어린 시절부터 미국에서 살았는데 (남편과 비교해서) 크게 다른 점은 없었어요. 가족과 함께 특별한 날 파티나 저녁식사를 즐기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문화는 페루나 미국이나 비슷했거든요. 평일에는 아이들은 학업으로, 부모는 일로 바쁘지만, 주말에는 꼭 가족끼리 아침을 먹으면서 TV도 보고, 탁구도 치고, 대화하면서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의 중요성을 늘 느껴 왔죠.

자녀들과는 대화를 자주한다고 했는데 비결이 뭘까요.
대사
우선 아이들과 부모의 관계에서 벽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일방적으로 체벌하기보다는 부모들이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서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는지 주의 깊게 들어야 하죠. 그러기 위해선 단계가 필요합니다. 일단, 한 살부터 일곱 살까지 유아기엔 무조건적으로 아이들에게 사랑을 베풀 시기라고 생각해요. 스킨십도 많이 하고요. 그래야 아이들은 그 속에서 부모를 신뢰하며 유착관계가 형성될 수 있거든요. 이 시기를 단단하게 해야 자녀가 청소년기를 잘 받아들이고 부모로서 아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요. 가령, 청소년기에는 아이들에게 신체적·정신적 변화가 크게 오죠. 이때 아이들이 학교에서 일어난 일이나 고민거리들을 부모에게 가감 없이 털어 놓아야 하는데, 대개 또래 친구들끼리만 상의하다가 종종 문제를 키우거나 잘못된 길로 빠질 수도 있거든요. 그때야말로 부모가 적극적으로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상담을 통해 적절한 길로 아이를 구원해줘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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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계보다는 사랑으로 감싸주면서요. 사실 저도 과거 아이들과 힘든 시기를 겪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끝까지 아이들과 대화를 하려고 노력했어요. 물론, 잘못된 언행에 대해서는 강하게 말한 경우도 있었지만, 결코 체벌하진 않았어요. 중요한 건, 이 어려운 시기를 잘 지나가면 아이들에게 대학이나 결혼, 육아 등등 미래의 더 큰 문제를 맞닿았을 때 훨씬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여사 제가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아이와 허물없이 대화를 하는 게 결코 하루 만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서로 간 신뢰가 구축돼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저희도 지금의 부모와 자식 관계가 아이들 청소년기의 그것보다 훨씬 더 좋아졌거든요.

자녀들과 어떤 문제가 있었나요.
대사 일단, 외교관의 자녀들이 겪는 삶의 어려움을 좀 말씀드리고 싶어요. 대부분의 외교관 자제들은 외교관이 되기 싫어하는 경우가 많아요. 왜냐하면 (부모의 임기에 따라) 학교를 5년마다 바꾸게 되거든요. 외교관이 된 것은 부모의 선택이지 아이들이 선택한 삶은 아니잖아요. 특히, 청소년기에 학교생활, 교우관계 등이 갑자기 바뀌면 아이들은 새로운 환경에 또다시 적응하는 걸 무척 힘들어 해요. 간혹 트라우마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고요. 외교관을 꿈꾸는 분들 중에 외교관으로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업무상 계속해서 주거를 옮기고, 생활환경이 바뀌는 걸 힘들어 하는 사람들도 정말 많답니다.

그럼 어떻게 극복했나요.
여사 가장 힘들었을 때가 온 가족이 워싱턴에서 살다가 페루로 돌아갔을 때였어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미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처음 페루에 갔을 때 언어나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어 했어요. 그런데 부모로서 제 입장에서는 그저 아이들이 빨리 적응하고, 모든 걸 터득해 나갔으면 하는 마음이 너무 앞섰어요. 그러다 보니 아이들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들을 요구했던 것 같아요. 사실, 어른들은 살면서 크고 작은 경험이 많다 보니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게 비교적 수월할 수 있지만, 아이들은 더딜 수밖에 없잖아요. 당연히 아이들과 갈등이 끊임없이 생겼고, 관계가 무척 나빠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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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그때 제가 가장 잘한 일은 천사 같은 선생님을 저희 집에 모신 거였죠. 그분과 5년을 함께 지냈는데 방식은 이랬어요. 그 선생님이 저희 아이들을 가르치시는 게 아니라 저를 가르치시면 제가 아이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이었죠. 그렇게 5년을 하다 보니 아이들과 관계도 회복됐고, 아이들과 즐겁게 놀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터득하게 됐죠. 물론, 어떻게 매번 가족이 사랑과 평화만 가득할 수 있겠어요. 다만, 아이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방법을 그 선생님으로부터 많이 배웠어요.

가령, 한국에서는 교육과 관련해 부모들이 굉장히 엄격한 편이라고 들었어요. 그런데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시험의 결과보다는) 아이가 얼마나 집중하고 노력했는지를 칭찬하는 게 필요해요. 만약 아이가 며칠 밤을 새워서 시험을 준비했는데도 성적이 좋지 않게 나왔다고 가정해보죠. 이때 아이를 성적으로 평가하면 안 돼요. 아이가 노력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칭찬해줘야 추후에 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거든요. 되레 ‘바보야, 성적이 이게 뭐니’라고 책망한다면 아이가 공부에 대한 흥미를 잃는 것은 물론, 부모와 자식 관계는 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 역시 선생님과 5년간 생활하면서 아이들의 결과를 칭찬하는 것보다 노력에 대해 인정해주고 칭찬해주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그럼 지금은 자녀들과 어떻게 소통하나요.
대사 기술이 발달한 덕분에 채팅이나 페이스타임 등을 통해서 스마트폰으로 손쉽게 얼굴을 보며 대화해요. 거의 매일 아이들과 통화하고, 근황을 묻죠. 다만, 아쉬운 건 방학이나 휴가에도 아이들과 저희 스케줄이 겹치지 않을 때가 있기 때문에 직접 만나는 게 녹록지 않아요. 뭐, 결국 그것 역시 저희 가족이 (한국에서) 살면서 터득해 나가야 할 부분이겠죠. 그래도 가끔은 한국에서 맛있는 길거리 음식을 먹다가 ‘아, 우리 아이들이 지금 내 옆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을 자주하죠.

역시 부모 마음은 다 똑같은가 봐요.
여사
그럼요. 가족은 제게 ‘토도(전부, todo)’예요. 만약 가족이 없다면 정말 슬플 것 같아요. (잠시 감정이 올라 와 눈물을 보였다) 제게 가족은 그런 존재죠. 전부예요.

대사님에게 가족은요.
대사 저에게도 가장 중요한 개념은 바로 가족입니다. 제가 외교관이기도 하지만 사실 어떻게 보면 국가를 지키는 가장 작은 개념이 가족이고, 경제 성장을 일으킬 수 있는 것도 가족에서부터 시작하잖아요. 그래서인지 제겐 더욱 그 의미가 큽니다.
[big story]“해외 생활 어려움, 허물 없는 대화로 풀었죠”
사실 한국에서 수년째 가족의 해체라는 말이 적잖이 회자되고 있고, 가족 간 대화도 줄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가족들과 대면해도 어색해하고요. 두 분은 오랜만에 자녀들과 만나면 어색한 건 없나요.
여사 아이들과 자주 소통해서 대화하는 게 어색하진 않지만, 가령 그런 문제는 있습니다. 오랜만에 워싱턴에서 아이들을 만나면 아이들이 자기의 공간과 영역을 침범받는다는 생각이 들 수 있어요. 그래서인지 아이들도 저희에게 “엄마, 아빠, 여기에서 주무세요”라고 하곤 자신의 공간과 저희의 공간을 정확히 분리해요. 그래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죠. 남편과 저는 침대에 눕고, 아들은 바닥에 누워서 같이 영화를 보면서 공감대를 쌓기도 하고요.

물론, 저희도 서로 바쁘다 보니 가끔은 연락이 잘 안 될 때가 있어요. 그럴 땐 제가 엄마로서 “너희 바쁜 건 충분히 알지만 대답은 해”라고 꼭 얘기해요. 반대로, 아이들이 (시차가 달라서) 새벽 3시에 전화해서 “엄마 이런 일이 있었어, 저런 일이 있었어” 시시콜콜 말하더라도 저는 기꺼이 들어줘요. 그건 그리 힘든 일도 아니거든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아이들이 제게 이야기를 해주는 것 자체가 저와 신뢰관계가 형성됐다는 것이잖아요. 부모가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아이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주는 것이 중요해요. 이처럼 가족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모두가 노력해야 합니다. 본인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어느 정도 시간을 할애해서 그 시간에 투자했을 때야 비로소 진정한 가족 관계가 유지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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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5월은 가족의 달인데, 한국 사람들에게 가족끼리 갈 만한 페루 여행지나 음식을 추천한다면요.
대사 한국인들이 페루를 방문하는 수가 매해 늘어나고 있습니다. 4년 전만 해도 1만9000명이었는데 최근에는 3만2000명의 한국인이 페루를 방문하고 있어요. 중장년층에게 흥미롭게 다가올 곳은 파라카스(Par acas) 지역이나 지상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볼 수 있는 나스카라인, 마추픽추도 유명하고요. 제 고향인 와카치나(Huacachina)도 자연 오아시스가 있어 방문해볼 만합니다.

청년들에겐 수도인 ‘리마’를 추천해요. 다양한 여가시설과 음식들을 맛볼 수 있는데, 페루는 세계 4·5·6위 레스토랑을 보유할 정도로 미식 국가입니다. 생선살이나 오징어, 새우, 조개 등을 얇게 잘라서 레몬즙이나 라임즙에 재운 후에 잘게 다진 채소와 함께 소스를 뿌려 차갑게 먹는 세비체(ceviche)도 한국인들 입맛에 맞을 겁니다.

또 노란 소스를 곁들인 감자요리 ‘파파 알 라 우앙카이나(Papa a la Huancaína)’와 한국의 장조림 같은 음식인데 소고기를 간장으로 졸인 로모 살타도(Lomo saltado)도 추천합니다. 무엇보다 페루에 오시면 퀴노아와 감자로 만든 음식들을 많이 드셔보세요. 감자 종류만 3000가지가 넘습니다.

반대로 7월에 자녀들이 한국에 오면 가고 싶은 곳은요.
여사
지난해 아이들이 한국 왔을 땐 제가 워싱턴에 갈 일이 생겨서 함께 투어를 많이 못했는데, 이번에 오면 우선 서울의 주요 관광명소를 쭉 투어해보고 싶어요. 저희 첫째 딸이 예전에 부산에서 인턴십으로 공부를 한 적이 있어서 부산도 가보고 싶고요. 특히, 제주도를 가고 싶은데 둘째딸이 건축학을 전공하고 있어요. 제주도에 가면 좋은 건축물들이 많다고 해서 꼭 한번 가고 싶습니다. 그 밖에도 대사관 직원들 추천을 받아서 이곳저곳 다녀볼 생각이에요.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8호(2019년 05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