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story 제 172호 (2019년 09월)

숲길과 계곡, 험지를 달리는 사람들

[한경 머니=정채희 기자 l 사진 서범세 기자 l 참고 서적 <트레일 러닝 교과서>] 백두대간 숲길과 부연동 계곡, 그 물길을 따라 달리는 총 16.2km의 ‘계곡바우길 오지 트레일런’. 그곳에서 만난 12인의 러너들이 전하는 특별한 러닝의 매력 속으로. 



8월 10일 오전 10시, ‘계곡바우길 오지 트레일런’ 행사가 한창인 강원 강릉의 부연동 계곡. 계곡으로 입수하는 레이스의 중간 지점에서 마지막 레이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전 7시 36분 첫 스타트를 끊은 지 2시간여 만에, 9시 7분에 첫 등장한 1등과는 1시간여 차였다.

“앗, 차가워!” 약 2시간여 숲길을 내리 달리다가, 시원하다 못해 차디찬 계곡물에 발을 내딛는 순간 외마디 비명이 곳곳에서 쏟아졌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자 경기도 잊은 채 어린아이들처럼 물을 튀기기 시작했다.

땀으로 젖은 온몸을 계곡물에 한 번 적시고, 수중 장비까지 꼼꼼히 점검을 마쳤다. 총 코스 16.25km로 구성된 계곡바우길 오지 트레일런 행사의 하이라이트, 계곡 런이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

숲길 헤치고 물길 가르고, run! run! run!
 
“오, 고라니예요! 고라니!” 8월 10일 새벽 2시 48분, 모두가 잠든 시각. 대관령 능선을 굽이굽이 지나는 차 안에서 김홍덕 워크앤런(WALK’N RUN) 대표가 소리를 질렀다. “뭐야, 와!” 새우잠을 자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카메라를 들기 바빴다. ‘계곡바우길 오지 트레일런’ 행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만난 선물 같은 고라니의 등장이었다.

“달리는 중간 ‘악’ 하고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뛰세요. 그래야 멧돼지들이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내려오지 않아요.” 김 대표는 러닝 도중에 야생동물을 만날 수 있다고 말했다. 대관령 숲길을 달리다 보면, 멧돼지가 나타나는 일이 종종 있다는 것이다.
 
‘에이, 설마’ 하던 찰나 뒷좌석에 앉은 참가자 황규만 씨의 무용담이 이어졌다. “백담사 계곡 뒤에서 새끼 멧돼지를 만났는데, 만지려고 하니까 그 뒤에 어미 멧돼지가 달려오더라고. 그럴 때 정말 조심해야 돼. 섣불리 도망가거나 움직였다가는 예민한 어미한테 큰일이 날 수 있어.”

멧돼지와 고라니, 두꺼비와 족제비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베이스캠프인 강원 부연동 계곡에 도착했다. 행사 시작 시간인 오전 6시까지는 3시간이 남은 시각. 별이 우수수 떨어지는 깜깜한 밤, 여성 참가자는 근처 민박집에서, 남성 참가자는 평상 위에서 쪽잠을 자기로 했다.
어슴푸레 날이 밝자 모두가 대회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참가자는 총 12명. 전날 밤 내린 폭우로 참가자가 줄었지만, 적잖은 인원이 모였다. 여성 참가자 4명과 남성 참가자 8명, 내국인 9명과 영국, 필리핀, 인도에서 온 외국인 3명. 성인 11명과 미성년자(중학생) 1명. 다채로운 참가자들이 오늘 트레일 무대의 주인공이다.

“원래 코스 길이는 20.5km, 소요 시간은 10시간 정도인데, 전날 폭우가 와서 코스를 좀 변경했어요. 계곡 코스가 줄어서 16.2km를 달리게 됩니다. 갈림길에서는 빨간 리본이 있는 곳으로 달리세요.” 김 대표의 설명에 참가자 전원 아쉬운 표정이 역력했다. ‘더 많이, 더 오래’ 한계에 도전하고 싶은 마니아 러너들만이 느끼는 감정이다.

베이스캠프(파이널 지점)에서 차로 꼬박 50분을 달리자 오늘의 스타트 지점이 등장했다. 지름길을 차로 달렸으니, 도보로 숲길을 헤치고 물길을 가르려면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리라.

“삐~” 준비운동을 마친 참가자들이 김 대표의 휘슬 소리에 달리기를 시작했다. 오전 7시 36분, 자연과의 교감을 위한 트레일 런의 상쾌한 첫발을 뗐다. 이제 코스는 하나, 계곡길이 나올 때까지 굽이굽이 난 대관령 숲길을 따라 달리는 것이다.

“여기예요, 여기!” 오전 9시 7분, 부연동 계곡 길로 빠지는 1차 포인트 지점으로, 참가자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54세, 윤석기 씨다. 계곡으로 내려갈 수 있는 1차 포인트 지점은 밀림처럼 울창한 숲길을 헤쳐야 나오는 곳, 윤 씨는 이쯤은 우습다는 듯 1시간 30분여 만에 숲길을 다 돌고, 이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계곡으로 돌진했다.

그로부터 10분 안에 3위까지, 선두그룹이 쏙쏙 도착했다. “파이널 지점에서는 1등과 꼴등의 차가 9시간 가까이 날 때도 있어요. 오늘은 3시간 정도 예상해요. 마냥 기다릴 순 없으니까 행사마다 운영 시간을 지정해 놔요.” 황태인 워크앤런 이사가 트레일 러닝의 기본 규칙을 설명했다.

기다림이 슬슬 지겨워질 무렵, 마지막 참가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10시 10분, 중간 1위와는 1시간 차였다. 계곡 물길 속으로 7명의 참가자가 뛰어들었다. 여성 참가자, 영국에서 온 에일런, 중학생과 함께 참가한 아빠 등 총 7명이 서로에게 물장난을 튀기며 입수를 즐겼다.

“오늘 행사는 기록대회가 아니라서, 모두 즐기면서 달리고 있어요. 꼴찌를 기다려주기도 하고, 서로 다독이면서요. 기록대회는 살벌해요.” 황 이사는 ‘계곡바우길 오지 트레일런’만의 특징이라고 말을 건넸다.

8월 찜통더위가 내려앉은 날씨였건만, 이곳은 ‘하늘 아래 첫 동네’라고 불릴 만큼 오지인 곳. 영상 25도. 낮 최고 기온이 37도에 달한 서울과는 무려 12도 차이다. 훅 하고 밀려드는 차가운 물에도 트레일 러너들의 속도에는 거침이 없다.

그러나 전날 내린 비로 인해 빠른 유속, 허리까지 찬 계곡물은 전문 러너들에게도 위험한 구간. 순간 중심을 잡지 못해 떠내려갈 뻔한 참가자를 노희성 씨가 붙잡았다. 잡고, 또 잡고. 참가자 전원이 조심조심 서로를 의지하며 계곡 물길을 달린다.

백세시대, 액티브 시니어로, run! run! run!

라스트 지점, 이변은 없었다. 10시 45분, 윤석기 씨가 결승 테이프를 끊고, 1등으로 골인했다. 16.25km, 2시간 40분만의 완주였다. 윤 씨는 15년 전 즐기던 마라톤을 잊고 살다가, 지난해부터 다시 트레일 러닝의 세계에 빠져들었다고 했다. “1차 포인트 끝나고, 물길 지날 때 유속이 빨라서 조금 위험했어요. 그길 지나니까 괜찮더라고요.” 


그 뒤를 이어 2위와 3위가 순서대로 골인 지점에 들어왔다. 마지막 그룹이 들어온 건 그로부터 2시간여 뒤인 12시 50분쯤이다. 황 이사의 3시간 예언을 1시간여 단축한 꼴찌그룹의 선전이었다.

참가자 12명, 완주한 사람도 12명. 이날 행사는 특별한 부상자나 중도 포기 없이 모두가 결승 테이프를 끊으면서 성료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로 땀으로 젖었지만 이들에게서
‘피로함’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윤 씨는 “트레일 러닝은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과 호흡하는 것”이라며 “양껏 호흡하며 달릴수록 모든 오염으로부터 벗어나 심신이 정화된다”고 말했다.

아버지 황규만 씨를 따라 초등학교 때부터 트레일 러닝을 즐겼다는 황동현(13) 군은 중간 가시덤불에 긁혀서 부상을 입었지만, 완주에 성공했다. 황 군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아빠를 따라 트레일 런을 즐겼는데, 자연에서 아빠와 함께 달리는 게 좋다”고 말했다.

아버지 황 씨 역시 “부자간에 서로 마음을 터놓고 즐길 행사가 많이 없는데 이렇게 달리다 보면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해하게 된다”며 “모든 가족에게 추천한다”고 말했다. 그는 ‘액티브 시니어’를 즐기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도 트레일 러닝이 제격이란 말을 빼놓지 않았다.

남녀노소가 즐긴 트레일 러닝의 시간은 서울에서 출발한 지 꼬박 13시간 만에 마침표를 찍었다. 행사를 주최한 김 대표는 “트레일 러닝은 신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적 힐링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니즈를 채워주는 스포츠”라며 “대관령 숲길처럼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한적하고 부드러운 숲길을 위주로 한 트레일 코스들을 발굴해 이를 세계에 널리 전파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도심 속 뻔한 달리기에 조금은 지겨움을 느꼈다면, 트레일 러닝에 도전해보자. “한 번 사는 인생, 즐겁지 아니한가!”

어서 와, 트레일 러닝은 처음이지?
트레일 러닝의 세계는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러나 ‘장비’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2호(2019년 09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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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19-08-29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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