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STORY 부의 추월차선

[한경 머니 = 배현정 기자] “양극화는 페어플레이, 기회의 균등, 공동체의식이 중요하다는 믿음을 무너뜨린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양극화로 인해 사회가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해 이렇게 일침했다. 부자로 가는 사다리를 걷어차였다는 탄식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흘러나온다. 가난해도 ‘용’을 꿈꿨던 과거와 달리, 계급 고착화에 대한 한숨은 역설적으로 ‘인생 한 방’을 꿈꾸는 투기 거품을 일으키는 토양이 되고 있기도 하다.


이에 한경 머니는 리서치 전문 업체인 오픈서베이의 도움을 받아 20대 이상 남녀 4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신뢰수준 95%, 표준오차 ±4.0%포인트)를 실시해 우리 사회 부자에 대한 인식을 알아봤다.


20억 원은 있어야 부자…
계층 이동엔 회의적

[big story] 끊어진 부의 사다리, 그래도 4명 중 1명 ‘부자 꿈’
대한민국에서 부자의 기준은 무엇인가. 우선 총자산이 얼마나 있어야 부자라고 할 수 있는지 물은 결과 20억 원 이상이 35.8%로 가장 많이 응답했고, 그다음은 50억 원 이상(28.0%), 30억 원 이상(19.5%), 100억 원 이상(12.8%) 순이었다. 전 연령대에서 부자의 자산 규모로 20억 원 이상이라고 가장 많이 응답했지만, 40대는 30억 원 이상(28.7%)을 부자의 기준으로 가장 많이 선택했다.


그렇다면 부자들이 생각하는 부자의 기준과 다를까.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가 금융자산 10억 원 이상을 보유한 자산가를 대상으로 조사한 ‘2019 한국 부자 보고서’ 설문에서 부자의 기준으로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금액은 50억 원이었다. 부자의 기준으로 총자산 50억 원을 꼽은 경우는 부자들 중 22.7%였다. 한경 머니에서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이번 조사보다 부자들의 기준이 상당히 높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부자들 가운데도 30억 원(17.2%), 20억 원 미만(12.0%)을 부자의 기준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아 ‘20억 원’은 한국 사회에서 부자로 일컬어질 수 있는 큰 자산임을 보여줬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경제적 계층 상승의 기회는 얼마나 열려 있을까. 우리나라 ‘부의 계급화’의 심각성을 묻는 질문에는 ‘매우 심각하다’는 답변이 91.0%로 단연 압도적이었다. 또한 계층 이동의 가능성에 대해선 전체 응답자의 75.5%가 ‘계층 이동 가능성이 낮다’고 답했고, 20.5%는 ‘계층 이동 가능성이 전혀 없다’를 택해 사실상 대다수가 경제적 계층 이동에 대한 가능성을 희박하게 여기고 있음이 드러났다. 이는 저성장 시대를 맞아 부의 축적 기회는 제한되고,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가속화할 것이라는 우려와 맞닿아 있다.


계층 이동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묻는 질문에서는 ‘개인의 노력’은 9.0%에 그친 반면 부모의 재산(물려받은 자산)은 무려 71.3%로 나타났다. 10년 전과 계층 상승의 기회를 비교하면 ‘매우 줄었다’(42.5%)는 응답이 가장 많았고, ‘다소 줄었다’도 20.0%에 달했다. 세간의 ‘금수저·흙수저’ 계급론처럼 상속받은 부(富)가 없다면 개인의 노력으로 부를 축적해 계층 상승의 꿈을 이룰 기회는 크게 줄었다는 인식이 지배적임을 알 수 있다.


4명 중 1명 “미래 부자를 꿈꾼다”

[big story] 끊어진 부의 사다리, 그래도 4명 중 1명 ‘부자 꿈’
현재 당신은 부자인가에 대한 물음에는 ‘아니오’(94.5%)란 응답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예’라는 응답자는 5.5%였다. 세대별로는 50대에서 부자라고 생각한다는 응답 비율이 가장 높았다. 50대 응답자의 87.5%는 ‘부자가 아니다’고 답했지만, 12.5%는 부자라고 생각했다. 세대별 부자라는 응답 비율은 20대는 0%, 30대는 6.5%, 40대는 5.0%인 수준에 비춰볼 때 상대적으로 50대가 자산 형성에 대한 자신감이 가장 높음을 보여줬다.


앞으로 부자가 될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는 부정적인 답변이 지배적이었다. ‘현재 부자가 아니다’라고 응답한 이들 가운데 언제쯤 부자가 될 수 있을까 묻는 질문에 ‘평생 어렵다’는 응답이 72.5%에 달했다. 하지만 부자가 될 소망을 품고 미래 부자의 꿈을 꾸는 응답자도 전체의 24.8%였다. 4명 중 1명은 미래 부자를 꿈꾸고 있는 셈이다.


부자가 될 가능성은 기간을 장기로 볼수록 높아져 ‘5년 이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5.0%, ‘10년 이내’는 8.7%, 20년 이내는 11.1%로 상승했다. 부자가 되는 것은 단시일에 이루기는 어려운 소망이지만, 10년, 20년 오랜 시간 준비하면 가능성이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을 엿보인다.


부의 축적,
상속·증여 아니면 복권 당첨?

[big story] 끊어진 부의 사다리, 그래도 4명 중 1명 ‘부자 꿈’
우리나라에서 부자가 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는 상속·증여와 부동산 투자가 단연 으뜸으로 꼽혔다. 부를 대물림하는 상속·증여(43.8%), 불로소득으로 일컬어지는 부동산 투자(31.8%)가 부자가 되는 지름길이라는 생각이 주를 이뤘다.


반면 사업(창업)소득은 11.3%, 저축은 1.8%로 땀 흘려 일하거나 살뜰하게 아껴 가며 자산을 일구는 방법에 대한 기대치는 낮았다. 금융상품 투자(2.3%)에 대한 기대치도 운에 맡기는 복권 당첨(8.5%)보다 현저히 떨어졌다. 기타 응답으로는 연예인이 돼 큰돈을 번다거나 이민을 간다는 답변 등이 나왔다.


그렇다면 현재 자신이 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부를 이룬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앞서 ‘당신은 부자인가’에 ‘예’라고 답한 응답자를 대상으로 부자가 된 비결을 다시 물었다. 부자라고 생각하는 응답자 중 36.4%는 근로소득을 부의 원천이라고 꼽았고, 22.7%는 사업소득이라고 답했다. 이어 부동산 투자(13.5%), 상속·증여(9.1%), 금융상품 투자(4.5%) 순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에서 부자가 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시각과 실제 자신이 부자가 된 비결에 대한 상당한 시각차다. 부의 원천에 대한 인식에서 ‘내로남불’이 엿보인다.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근로소득, 사업소득을 주요한 부의 비결로 꼽았지만, 우리 사회가 바라보는 부자의 비결은 부동산 투자와 상속 등 불로소득이 바탕으로 된 것으로 바라본다. 부의 기회가 공정하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으로 풀이되는 대목이다.


가장 높은 수익이 예상되는 투자처에 관한 응답에서도 인식의 ‘쏠림’이 나타났다. 응답자들은 ‘빌딩·상가’를 가장 유망한 투자처로 꼽았다. 전체 응답의 54.3%로 압도적이었다. 주택(16.5%), 토지·임야(15.5%) 등 부동산이 역시 유망 투자처로 뒤를 이었다. 주식(7.5%), 예·적금(2.8%), 펀드(1.3%), 저축성 보험(1.0%) 등 금융상품을 유망 투자처로 응답한 비율은 12.6%에 그쳤다. 암호화폐(0.8%) 등 기타 의견도 미미했다. 투자의 균형이 깨져 ‘부동산공화국’이라 불리는 현실이 여실히 투영돼 있다.


한편, 개인의 삶에서 부가 정점을 이루는 시기로는 ‘50대 이전’과 ‘60대 이전’이 각각 47.3%와 28.2%로 꼽혔다. 이는 은퇴 전 소득 활동이 가장 왕성한 시기와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이어 40대 이전(14.2%), 60대 이후(8.0%), 30대 이전(1.8%) 순이었다.


자식 세대에 대한 상속·증여의 적절한 시기로는 60대 이후에 대한 선택(54.4%)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이어서 60대 이전(13.5%), 50대 이전(12.8%), 40대 이전(10.0%) 순으로 나타났다. 기타 의견으로는 사망 전후가 주를 이뤘다. 일반적으로 죽음을 전제로 하는 상속·증여에 관해서는 주로 은퇴 이후로 고려하며 체계적 생애 설계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음을 시사했다.


언제쯤 부자가 될 수 있을까 묻는 질문에 ‘평생 어렵다’는 응답이 72.5%에 달했다. 하지만 부자가 될 소망을 품고 미래 부자의 꿈을 꾸는 응답자도 전체의 24.8%였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5호(2019년 12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