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서방과 러시아가 경제 제재를 수단으로 본격적으로 신냉전(new cold war)에 돌입했다.

양측의 날 선 공방은 세계 경제에 상당한 파장을 몰고올 것으로 예상된다.
[GLOBAL MONITOR] 세계 경제 흔드는 푸틴의 ‘러시안룰렛’
미국과 EU는 지난 9월 12일 러시아에 대한 추가 제재를 단행했다. 미국 정부는 러시아 최대 은행인 스베르방크(Sberbank)에 대해 만기 30일 이상의 채권 발매와 주식 매매를 금지했다. 스베르방크는 러시아 은행 자산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상업은행이다. 미국 정부는 또 가스프롬과 로스네프트 등 러시아 국영 에너지기업에 대해서도 만기 90일 이상의 채권 구입과 금융 제공을 금지했다. 특히 미국 기업이 러시아 심해와 북극 연안 개발, 셰일가스 생산과 관련해 러시아 에너지기업에 상품이나 서비스, 기술을 수출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EU도 러시아 에너지기업 3곳과 방위산업체 3곳, 은행 5곳 등이 유럽 자본시장에서 만기 30일 이상의 채권을 발매하거나 주식을 매매하지 못하도록 했다. 미국과 EU는 지난 9월 5일 우크라이나 정부와 반군 간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자 러시아가 이를 이행하는지 지켜보겠다면서 추가 제재를 유보했었다. 미국과 EU가 추가 제재에 나선 것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서 친(親)러시아 분리주의 반군을 지원하기 위해 불법적인 군사 개입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엔 러시아 병력 1000여 명과 탱크, 방공미사일 등 중화기들이 배치돼 있다.

러시아는 그동안 우크라이나 크림반도와 동부의 핵심 지역인 루간스크 주와 도네츠크 주 등을 직접적으로 침공하는 대신 반군에 장비와 인력 등을 지원하는 등 은밀한 방식으로 군사 개입을 해왔다. 러시아는 또 정보기관과 전문 해커들을 동원해 정보전과 사이버 공격도 벌여왔다. 러시아의 이런 군사 개입을 일종의 ‘하이브리드 전쟁(hybrid war)’이라고 부른다. 하이브리드 전쟁에서 물리적 군사력은 전쟁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우크라이나 정부의 컴퓨터 시스템은 러시아가 개발한 ‘스네이크’라는 악성 바이러스 프로그램에 의해 감염돼 마비됐다. 우크라이나 반군은 러시아제 미사일로 말레이시아항공 여객기를 격추시켰으며, 러시아의 특수부대는 부대 표시도 없는 군복을 입고 민병대처럼 전투를 벌였다. 이런 식의 전쟁은 국제법적으로 볼 때 전쟁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심지어 러시아는 체첸, 북오세티아, 조지아 지역 출신들로 구성된 ‘바탈리온 보스토크(Battalion Vostok)’라는 용병까지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 투입했다. 오죽하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 군사 개입을 ‘침공(invasion)’이라고 부르는 대신 ‘침입(incursion)’이라고 표현했을까. 이런 전쟁은 국가와 국가 간의 정규군 병력이 무력 충돌하면서 벌이는 전투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EU vs 러시아, 팽팽한 기싸움
미국과 EU는 러시아의 하이브리드 전쟁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응 수단은 경제 제재밖에 없다고 보고 강력한 조치에 나서고 있다. 미국 정부는 이미 지난 7월 29일 우크라이나 내전 사태와 관련해 러시아의 에너지, 방위산업, 금융 분야에 대한 제재 조치를 단행한 바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에너지 분야의 특정 품목과 기술의 수출과 협력 금지, 러시아 경제개발 프로젝트를 위한 신용공여 제공 및 금융 지원 중단, 러시아 대외무역은행(VTB)과 자회사인 뱅크오브모스크바, 러시아 농업은행 등 3곳에 대한 미국인과 미국 기업의 신규 금융거래 중단 등이다.

미국 정부는 지난 7월 16일에도 러시아 국영 석유기업인 로스네프트와 국영 가스회사 가스프롬의 금융 자회사인 가스프롬뱅크, 최대 민영 가스회사인 노바테크, 국가경제개발은행 등이 미국 시장에서 중장기 자금을 조달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또 칼라시니코프 콘체른 등 러시아 국영 방산업체들에도 동일한 조치를 취했다. EU도 지난 7월 29일 제재 조치를 단행했다. 그 내용을 보면 러시아 정부가 주식의 50% 이상을 보유한 은행이 유럽 금융시장에서 주식과 채권을 팔지 못하도록 했다. 또 러시아에 대해 무기금수 조치를 취하고 심해 시추, 셰일가스와 북극 에너지 탐사 기술 등 민간 산업과 군사 부문에 동시에 사용될 수 있는 기술의 러시아 수출도 금지하기로 했다.

특히 미국과 EU는 제재 조치를 통해 러시아 정부의 장기적인 신에너지 개발 능력에 타격을 주려는 의도까지 드러냈다. 에너지 산업은 그동안 러시아 경제를 지탱해온 원동력이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원유·천연가스 매장량을 보유한 러시아는 지난 20년간 에너지 덕분에 경제적으로 급성장했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권력도 공고해졌다. 하지만 러시아의 에너지가 대부분 생산되는 시베리아 지역에선 머지않아 에너지 자원이 고갈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 때문에 러시아 정부는 셰일가스와 심해 시추 등에 눈을 돌리고 있지만 개발은 아직 걸음마 단계에 머물러 있다. 미국과 EU는 이런 점을 감안해 셰일가스, 심해 시추, 극지방 탐사 등 미래 에너지 개발에 필요한 기술 수출을 금지했다.

러시아도 미국과 EU의 제재에 대해 보복 조치를 내렸다. 러시아가 보복 조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농산품과 식품 분야다. 러시아 정부는 지난 8월 7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EU, 미국, 호주, 캐나다, 노르웨이 등에서 생산된 소고기, 돼지고기, 과일·채소, 닭고기, 생선, 치즈, 우유, 유제품 등의 수입을 전면 금지했다. 이번 조치로 EU 농가들은 큰 손실을 입을 것이 분명하다. 러시아는 EU의 가장 큰 과일·채소 수입국이다. 러시아의 지난해 전체 식료품 수입 중 40%가 유럽산이었다. 금액으로는 119억 유로(15조9200억 원)에 달한다. 제재 시행 직후 러시아는 발 빠르게 대체 수입국 발굴에 나서고 있다. 육류 및 해산물은 주로 중남미 국가에서, 채소와 과일은 중국, 터키, 이집트 등에서 수입 쿼터를 확대해 조달한다는 계획이다. 러시아는 미국과 EU의 추가 제재에 대한 보복 조치로 서방산 자동차와 의류 금수를 검토하고 있다.

제재와 보복 조치로 이어지는 양측의 대결 구도는 앞으로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과 EU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입장을 바꾸지 않는다면 제재를 더욱 강화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러시아도 버티기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서방의 러시아 전문가들은 대부분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굴복할 가능성이 낮다고 전망하고 있다. 특히 러시아가 향후 내놓을 수 있는 극단적인 카드는 유럽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 전면 중단이다. 러시아가 이미 가스를 무기로 서방을 옥죄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에 러시아산 가스를 재수출하던 폴란드, 슬로바키아 등을 상대로 가스 공급량을 줄인 것이다. 알렉산더 테멀코 우크라이나 출신 에너지 부문 컨설턴트는 “러시아는 에너지 전략을 군사 전략보다 더 효과적으로 이용하는데 실제 에너지 위협은 군사 위협보다 더 강력하고 위험하다”며 “러시아는 전 세계가 러시아 외에 다른 에너지 공급원을 찾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 가스 수출 봉쇄로 유럽 큰 타격
실제로 러시아의 가스 수출 봉쇄가 장기화될 경우 유럽 전역이 경제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유럽은 전체 가스 소비량의 31%를 러시아로부터 공급받고 있다. 이 중 15%는 우크라이나를 통과하는 가스관을 통해 들여온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긴장관계가 고조됐던 2006년과 2009년 가스공급을 중단한 바 있다. 러시아의 가스 공급에 차질이 생길 경우 가장 큰 타격을 입는 것은 동유럽 국가들이다.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는 러시아와 인접한 국가일수록 높기 때문이다. 2012년 기준으로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를 보면 폴란드 79.8%, 체코 100%, 슬로바키아 99.5%, 루마니아 86.1%, 불가리아 100%, 그리스 59.5%, 헝가리 43.7%, 불가리아 100% 등이다. 물론 러시아가 가스 공급을 중단할 경우 자국도 피해를 입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러시아 경제에서 석유와 천연가스는 수출의 67%를 차지하고 있으며 국가 예산의 50%가 석유와 천연가스 수출에서 얻은 수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EU 회원국들로부터 연간 2500억 달러(252조250억 원)를 벌어들인다. 러시아가 중국과의 에너지 협력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도 유럽에 대한 가스 공급 중단에 따른 손실을 막으려는 의도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9월 1일 동부 시베리아에 위치한 야쿠츠크를 방문해 러시아와 중국을 잇는 가스관 ‘시베리아의 힘(the Power of Siberia)’ 건설 기공식에 직접 참석한 것도 이 때문이다.
[GLOBAL MONITOR] 세계 경제 흔드는 푸틴의 ‘러시안룰렛’
올겨울 유럽의 ‘가스대란’ 공포가 점차 현실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EU의 28개 회원국은 러시아가 가스 공급을 중단할 것에 대비해 사상 최대 규모의 가스를 비축해 두고 있다. 무려 800억 ㎥ 상당의 가스를 저장탱크에 담아 두고 있다. 이는 전체 회원국의 연간 가스사용량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양이다. 또 EU는 기업들이 액화천연가스(LNG)를 유럽 외부로 판매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 등이 포함된 비상계획도 세워 놓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가스 공급 중단 조치가 장기화할 경우 EU의 대안은 마땅치 않다. 양측의 21세기판 신냉전은 사실상 경제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문제는 양측의 경제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양측이 끝까지 치킨 게임을 벌일 경우, 자칫하면 세계 경제가 커다란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러시안룰렛 게임’에 전 세계가 자칫하면 그 어느 때보다 추운 겨울을 보낼 수도 있다.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